옛 프랑스어로 ‘사랑받다’라는 뜻을 가진 에스메(Esmé) 콰르텟은 여성 음악가들로 구성된 현악 4중주단입니다. 2016년 독일을 거점으로 활동하던 배원희와 하유나(바이올린), 김지원(비올라)과 허예은(첼로)이 결성한 뒤, 2018년 런던 위그모어홀 국제 현악 4중주 콩쿠르에서 우승하며 세계 실내악 역사를 새롭게 쓰고 있습니다.
클래식 음악의 전통과 문화의 보고, 현악 4중주
클래식 음악은 독주·실내악·오케스트라 등 여러 장르로 나뉩니다. 그중 실내악은 2중주부터 9중주나 10중주까지 악기를 구성하는 개수에 따라 다양한 음악으로 구성된 장르인데요, 그중 현악 4중주는 실내악을 대표하는 장르로 자리매김해왔습니다.
현악 4중주는 넉 대의 현악기가 4개의 성부를 구성합니다. 4개 성부는 클래식 음악에서 매우 중요한 구성입니다. 현악 4중주는 물론, 소프라노·알토·테너·베이스로 구성된 합창도 그러합니다. 오케스트라도 분석해보면 4개 성부와 조합의 결속체입니다. 기본적으로 현악기는 바이올린·비올라·첼로·더블베이스로, 목관악기는 오보에·클라리넷·플루트·바순으로, 금관악기는 트럼펫·트롬본·호른·튜바로 되어 있기 때문이죠.
이처럼 작곡가들은 사각형이 주는 안전한 형식인 ‘4성부’ 음악은 각자의 실험적인 기법과 변화도 수용하는 완벽한 형식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현악 4중주는 실내악에서 일찍부터 발전했고, 작곡가들이 도전과 실험을 행한 장르였습니다.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등의 작곡가들이 현악 4중주의 양식과 특성을 활용해 대표적인 작품을 남기기도 했죠.
에스메 콰르텟은 2018년 런던 위그모어홀에서 우승기를 꽂았다. ⓒjino park
실내악의 중심에 우승기를 꽂다
서양에서 음악은 ‘즐기는 예술’이자, 그들이 가꿔가는 ‘역사의 유산’입니다. 이런 관점으로 콩쿠르를 보면, 그것은 음악을 놓고 벌이는 별들의 경기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그들의 역사와 전통이 배어 있는 음악 유산을 이어나갈 후예를 꼽는 장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자국의 전통을 이어갈 후예를 다른 나라 음악가에게 맡긴다는 점은 큰 결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국의 국악을 파란 눈의 서양인이 이어간다고 한다면 어떨까요? 이렇게 본다면 오늘날 콩쿠르에서 입상하는 젊은 음악가와 앙상블이 얼마나 복잡한 과정을 지나게 되는지 조금은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에스메 콰르텟이 2018년 우승 깃발을 꽂은 런던 위그모어홀은 1901년 문을 연 실내악 전용 홀입니다. 1979년부터 시작된 현악 4중주 콩쿠르는 이런 공연장의 성격을 십분 활용한 결전이자, 오늘날 위그모어홀의 위상을 높이고 있는 콩쿠르입니다. 3년 단위로 개최되고 있는데요, 어느 콩쿠르나 그렇듯 역대 우승자들이 콩쿠르의 수준과 역사를 보증합니다. 위그모어홀 현악 4중주 콩쿠르의 우승자는 타카치 콰르텟(1979), 하겐 콰르텟(1982), 대니시 콰르텟(2009), 아르카디아 콰르텟(2012) 등 세계적인 현악 4중주단입니다.
보통 콩쿠르가 독주자 중심으로 되어 있다면, 현악 4중주 등을 위한 실내악 콩쿠르는 준비부터 남다릅니다. 전자는 혈혈단신으로 콩쿠르 현장에 출전하여 그 안에서 만난 피아니스트, 지휘자, 오케스트라 등과 호흡을 맞춰가야 하는 ‘변수의 드라마’라면, 실내악 콩쿠르는 이 모든 과정을 접수 이전에 마쳐야 하는 ‘결속의 드라마’입니다.
에스메 콰르텟의 성공은 현지에서 결성한 실내악 단체들이 해외 콩쿠르의 문을 두드리는 계기가 됐다.
에스메 콰르텟도 쾰른 국립음대 실내악 콩쿠르 입상을 기점으로 결속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준비 과정도 남달랐는데요. 한국과 달리 유럽의 음악대학에는 ‘실내악’ 과정이 있습니다. 이는 팀을 결성하여 입학하는 체제로, 에스메 콰르텟 4인방도 뤼베크 국립음대 하이머 뮐러 교수가 있는 실내악 과정에 입학했고, 아르테미스 콰르텟의 제2바이올리니스트로 활동했던 뮐러 교수의 노하우를 쭉쭉 빨아들였습니다(2007년 창단하여 이듬해 일본 오사카 실내악 콩쿠르에서 입상한 노부스 콰르텟도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동문이라는 것이 이들의 발족에 큰 힘이 되었습니다. 한국예술종합학교는 국내 음악대 중 유일하게 실내악 전문 교수진과 전문 커리큘럼을 가졌습니다).
에스메 콰르텟은 2017년 노르웨이 트론하임 국제 실내악 콩쿠르에서 현악 4중주 부문 3위에 입상하고, 2018년 위그모어홀에 승리의 깃발을 꽂습니다.
한국 실내악의 마중물이자 새 흐름, 세종 체임버시리즈
에스메 콰르텟은 세종문화회관이 지난 6월부터 선보이고 있는 ‘2021 세종 체임버시리즈’의 두 번째 무대에 초청받아 하이든(1732~1809), 코른골트(1897~1957), 슈만(1810~1856)의 대표적인 현악 4중주곡을 선보입니다. 현악 4중주의 뿌리와 전통(하이든), 현대적 감각(코른골트), 로맨스(슈만)를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는 공연이죠.
앞서 현악 4중주는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닌 장르라고 했는데요. 이를 ‘일출’이라는 부제가 붙은 하이든의 현악 4중주 78번이 잘 보여줍니다. 70곡이 넘는 현악 4중주를 작곡해 현악 4중주의 시조라 불리는 하이든의 현악 4중주 78번을 통해 현악 4중주의 ‘뿌리와 전통’을 만나볼 수 있다면, 오스트리아의 전통을 이어받아 20세기 영화음악에 녹인 코른골트의 현악 4중주 2번을 통해 ‘현대적인 감각’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슈만의 현악 4중주 1번은 아내 클라라의 23번째 생일에 바쳤던 작품으로 슈만 특유의 로맨스를 만날 수 있습니다.
실내악 전용 공연장인 세종 체임버홀에서 열리는 세종 체임버시리즈를 통해
참신한 실내악 기획 공연이 이어지고 있다.
최근 우리나라의 뛰어난 실내악 단체들이 콩쿠르나 해외 무대에서 활약하고 있습니다. 에스메 콰르텟과 노부스 콰르텟의 성공은 앞서 말한 실내악 과정으로의 유학이나, 현지에서 결성한 단체들이 해외 유수의 실내악 콩쿠르의 문을 두드리는 계기가 되었죠.
더불어 국내에도 이들을 위한 마중물로 실내악 기획 공연들이 이뤄지고 있는데요. 세종문화회관의 ‘세종 체임버시리즈’가 그 대표적인 경우라 할 수 있습니다. 체임버(Chamber)란 오늘날 실내악을 일컫는 말이죠. ‘K-클래식’의 흐름을 실내악 중심으로 이어가고 있는 세종 체임버시리즈는 2015년부터 실내악 전용 공연장인 세종 체임버홀에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에스메 콰르텟의 이번 무대는 지난 6월 2021년 시리즈의 서막을 연 클럽M에 이어지는 두 번째 시간입니다. 2018년 에스메 콰르텟이 위그모어홀에서 보여준 영광의 순간을 한국 대표 실내악 공연장인 세종 체임버홀에서 다시 한번 느껴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