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문화회관 산하 예술단이 협업해 제작하는 공연인 ‘ART-9세종’의 두 번째 프로젝트, 뮤지컬 <조선 삼총사>는 1811년(순조 11년)에 일어난 홍경래의 난을 배경으로 합니다. <조선 삼총사>는 설화로 내려오는 평양 출신 희대의 사기꾼 김선달과 농민 반란을 이끈 홍경래, 강직한 금위영 대장 조진수가 어릴 적 친구라는 상상에서 시작하는 대형 창작 뮤지컬인데요. 이들은 어떤 세상에 살았기에 새로운 조선을 만들려고 했을까요? 홍경래와 친구들을 둘러싼 당시 시대의 풍경을 살펴봅시다.
막이 오르면 평안 감영 선화당 앞뜰이 보입니다. 평안감사가 중앙에 앉고 관속들은 세금을 걷고 있군요. 백성들의 재산 대부분을 세금으로 빼앗기는 모습을 본 홍경래와 친구들은 세상을 바꾸자는 결의를 다집니다.
당시는 이른바 ‘삼정의 문란’이 극에 달하던 시기였습니다. 징집 대상인 장정에게 걷는 세금인 군포는 노인과 갓난아기, 심지어 죽은 이들에게도 부과되었지요. 다산 정약용이 ‘애절양(哀絶陽)’을 지은 것도 이 무렵이었어요. 다산은 이 한시에서 갓난아기에게 군포가 나오자 아비가 항의하며 자신의 생식기를 잘라버린 사건을 담았습니다.
소초(疏草)는 왕에게 건의, 청원 등을 아뢰는 글이다. 이 소초는 왕에게
삼정(三政) 문란의 폐해를 나열하며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
극에서 어느 백성이 “빌려주실 때 곡의 절반이 모래였습니다” 하고 말한 것은 환곡을 가리키는 듯합니다. 나라에서 봄에 곡식을 빌려주고 가을 추수 뒤에 갚도록 한 환곡은 원래 구휼책이었어요. 그러던 것이 어느새 강제로 빌려주고 고리를 받는 세금이 되어버린 겁니다. 심지어 줄 때는 모래를 절반이나 섞고, 받을 때는 알곡으로 받는 일이 다반사였죠. 군포(군정)와 환곡(환정), 거기다 토지세(전정)까지 더한 삼정의 문란은 19세기 조선 백성을 옥죄는 부조리였습니다.
삼정 문란에 평안도 지역 차별까지
이런 와중에 평안도 백성의 고통은 더욱 심했습니다. 변방인 평안도는 세금으로 거둬들인 곡식을 중앙에 보내지 않고 국방비와 사신 접대 등에 사용했는데, 이 시기 국가 재정이 어려워지자 중앙에서 지방 조세를 가져가 버렸거든요. 결국 국방비와 사신 접대비는 다시 백성들이 부담해야 했습니다. 평안도에 대한 지역 차별도 심했지요. 홍경래가 난을 일으키며 선포한 격문에 “조정은 우리 지역을 거름 취급하고, 심지어 권세가의 노비도 우리를 보면 ‘평안도놈’이라 일컫는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으니까요.
설화 속 ‘희대의 사기꾼’인 봉이 김선달은 대중 매체에 자주 등장했다.
<조선삼총사>에서 김선달(허도영 배우)은 장사로 돈을 벌어 자신의 재산으로 백성을 구한다.
평안도민은 과거에 급제하기도 힘들고, 급제해도 출세하기 어려웠습니다. 홍경래의 친구로 나온 김인홍과 조진수도 그랬을 겁니다. 그나마 무과에 응시했다면 김인홍이 급제를 할 수도, 극 중 설정처럼 조진수가 풍양 조씨 집안이었다면 고위직에 오를 수도 있었겠지만요. 사실 이 무렵 과거 급제는 평안도민에게만 어려운 일이 아니었어요. 힘없고, 돈 없고, ‘빽’ 없는 이들에겐 과거, 특히 ‘대과’라고도 불리는 문과 급제는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조선 후기 과거 시험장에선 부정행위가 대놓고 이루어졌습니다. 돈 있고 권력 있는 자들은 답안을 대신 지을 문장가(거벽), 글씨를 대신 써줄 명필(사수)에다 좋은 자리를 맡아주는 몸싸움꾼(선접꾼)까지 고용해서 함께 들어갔죠. 과거 감독관들도 이를 막지 않았습니다. 결국 당사자의 실력과는 상관없이 권문세가의 자제들만 과거에 급제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이런 과거 시험 비리는 조선이 망할 때까지 이어져, 젊은 시절 과거를 보러 갔던 김구 선생도 이에 좌절하고 말았답니다.
조선시대 평안도 지도. <조선삼총사>의 무대인 평안도 주민들은 심한 차별을 받았고
이는 홍경래의 난을 부른 한 이유가 되었다.
붕당 정치의 말기적 형태, 세도 정치
삼정의 문란과 평안도 지역 차별, 과거 부정 등과 함께 이 시기 ‘조선 삼총사’와 백성을 괴롭힌 것은 세도 정치였습니다. 세도 정치란 몇몇 가문이 권력을 독차지하는 정치 형태를 가리킵니다. 왕비를 배출한 외척 세력들은 왕보다 더 큰 권력을 갖고 나랏일을 좌우했지요. 그러면서 나라와 백성보다 자기 가문의 이익만 중시했습니다. 돈을 받고 벼슬을 팔거나 관리들로부터 뇌물을 받는 것도 서슴지 않았어요. 그러니 관리들은 백성들을 더욱 쥐어짤 수밖에요.
세도 정치가 시작된 건 정조 사후 어린 순조를 대신해 정권을 쥐고 있던 정순왕후가 세상을 뜬 1805년부터입니다. 이전까지는 특정 당파(붕당)가 권력을 차지하는 붕당 정치가 이루어지고 있었어요. 당쟁이라고도 불리는 붕당 정치는 정치적 입장이 다른 여러 붕당이 서로를 견제하면서 국정을 운영하는 정치 형태입니다. 때로는 견제와 균형이 이루어져 좋은 결과를 내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과도한 당쟁으로 흘러 나라를 혼란에 빠뜨렸죠. 영조와 정조는 당쟁을 없애기 위해 탕평책을 펼쳤지만, 정조 사후 권력은 정순왕후와 노론 벽파(강경파)의 손으로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홍경래(한일경 배우)는 핍박받는 농민을 모아 부조리한 권력에 반란을 일으킨다.
정순왕후 사후, 권력은 아직 어린 순조의 장인인 김조순의 손으로 넘어갑니다. 그는 노론 시파(온건파)였으나 권력을 자신이 속한 붕당 대신 자기 집안(안동 김씨) 사람들과만 나누었습니다. 덕분에 안동 김씨는 조선 최고의 세도 가문으로 떠올랐고, 소수의 손에 집중된 권력은 더욱 심하게 부패하게 된 거예요. 홍경래의 난이 일어날 무렵에도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가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앞서 본 홍경래의 격문에 ‘나이 어린 임금 위의 권세 있는 간신배’로 김조순을 콕 찍어서 말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지요.
극중 인물 조진수의 집안인 풍양 조씨가 새로운 세도가로 떠오른 건 순조의 뒤를 이른 헌종 대의 일입니다. 물론 당시에도 풍양 조씨는 고위 관리를 많이 배출한 명문가였으니, 조진수가 과거에 급제하는 건 그리 힘든 일이 아니었을 겁니다.
홍경래의 격문에 간신배로 지목된 김조순이 쓴 편액.
‘蘭臺秘室(난대비실)’이라 적고 왼쪽 아래 ‘金祖淳印(김조순인)’ 낙관이 찍혀 있다.
김선달의 길, 홍경래의 길
조선 삼총사를 둘러싼 시대 상황이 어둡기만 한 건 아니었습니다. 조선 후기에는 농업 기술이 발달해 생산량이 늘고, 물자가 풍부해져 상업도 발달했거든요. 덕분에 부농과 대상인들이 나타났지요. 국경지역이었던 평안도에서는 청나라와의 무역으로 부를 일군 상인들이 많았습니다. 극중 홍경래의 친구인 김인홍(김선달)이 청나라 상인에게 인삼을 팔아 한몫을 잡는 것도 그럴 법한 장면입니다.
조선 후기 장사로 부자가 된 이들 중에선 김선달처럼 자기 재산을 털어 백성을 구제한 사람도 있었어요. 정조 때의 제주도 여성 김만덕이 그랬습니다. 제주도 항구에서 객주를 운영하며 부를 일군 김만덕은 흉년이 들자 자기 집 곳간을 열어 백성들을 구했죠. 이 미담을 들은 정조가 그녀를 서울로 불러서 큰 상을 내리기도 했답니다.
조진수(김범수 배우)는 권력을 잡아야 국민을 위한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조선 후기 서민 부자 중에서는 김선달이 아니라 홍경래의 길을 간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삼정 문란으로 권력층에게 세금을 과도하게 뜯기고, 지역 차별까지 받았던 평안도의 서민 출신 부자들이 바로 그랬습니다. 노비 출신으로 청나라와의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했던 이희저가 대표적 인물입니다. 홍경래는 이희저의 집이 있던 다복동을 근거지로 삼고 아낌없는 지원을 받았습니다. 그는 이 돈으로 인근에 광산을 열고 땅 없는 농민들을 불러 모아 봉기의 주력군으로 삼았죠. 부자와 가난한 이들이 힘을 모아 부조리한 세상을 바꾸려고 일어선 겁니다.
안타깝게도 홍경래의 난은 실패하고 말았지만, 세상을 바꾸려는 ‘조선 삼총사’의 꿈은 임술농민항쟁과 동학농민운동 등으로 이어집니다. 역사는 꿈꾸는 이들에 의해 조금씩 바뀌어나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