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알베르 카뮈 전문가로 꼽히는 불문학자 김화영 교수와 서울시극단 문삼화 단장이 만났다. 카뮈의 전작을 번역한 불문학자 김화영 교수와 카뮈의 <정의의 사람들>을 무대에 올리는 문삼화 단장은 카뮈에 대한 애정으로 초면임에도 불구하고 대화가 잘 통했다. 연극 <정의의 사람들>은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대공에게 폭탄을 던졌던 러시아 젊은이들의 실제 테러를 소재로 삼은 카뮈의 작품을 원작으로 만들어졌다. 오는 4월 23일부터 5월 9일까지 세종문화회관에서 만날 수 있다.
Q. <정의의 사람들>을 서울시극단 첫 번째 작품으로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문삼화: 이전부터 무대에 올리고 싶은 희곡 리스트에 <정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사실 카뮈가 희곡은 많이 쓰지 않았는데, 희곡 <정의의 사람들>을 보고 매료되었지요. 카뮈는 항상 젊음의 상징으로 인기가 높았어요. 유행처럼, 젊음의 열병처럼 카뮈의 작품을 좋아했는데, 한동안 잊고 있다가 세종문화회관 앞 광화문 광장을 보니 <정의의 사람들>이 떠올랐습니다.
‘1957년, 까뮈는 소설 <이방인>으로 최연소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Q. 카뮈 작품 세계의 큰 특징은 무엇이라고 보는지요?
김화영: 카뮈는 소설가이자 철학자이기도 합니다. 다른 작가들은 하나의 주제로 한편의 작품을 쓰는데, 카뮈는 이렇게 산발적으로 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제시하는 문제 해결 방식을 조직적으로 표현했어요. 하나의 주제로 먼저 소설을 쓰고, 연극을 만들고, 마지막으로 철학적 에세이를 씁니다. 이러한 한가지 묶음을 사이클이라고 표현하는데요. 첫 번째 주제는 ‘부조리’였습니다. 각 장르마다 문제를 제기하는 방법이 다르지요. 소설은 이야기, 연극은 대화 그리고 전체 조감은 에세이로 표현합니다. ‘부조리’라는 주제는 소설 <이방인>, 연극 <칼리굴라>, 에세이 <시지프스의 신화>로 이루어졌지요.
두 번째 사이클 주제는 ‘반항’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이데올로기와 이상에 의한 살인이 자행되었는데요. 카뮈는 이것은 우리 모두의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유명한 레지스탕스였던 카뮈는 히틀러 정권을 경험하면서 독재 정치는 옳지 않으니 반항해야 한다고 봤습니다. 이때 발표한 소설은 <페스트>, 연극은 <정의의 사람들>, 에세이는 <반항하는 인간>이었지요. 세 번째 사이클로 나아가던 카뮈는 아쉽게 교통사고로 사망했습니다. 세 번째 주제는 ‘사랑’이었습니다.
Q. 21세기의 정의란 무엇일까요? 카뮈의 시대와 무엇이 달라졌을까요?
김화영: 지금 정의의 문제는 굉장히 복잡합니다. 제목에서부터 정의가 들어간 <정의의 사람들>은 테러리스트의 이야기인데요. 1905년 학생단체의 젊은이들이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러시아 황제의 숙부인 세르게이 대공을 암살하려고 합니다. 정의를 행사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지만, 우리가 남을 죽을 권리가 있는지 카뮈는 작품을 통해 묻고 있습니다. 자살이 타당한 것인지, 사람을 죽이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는지 말이지요. 카뮈는 정의를 위해 죽는 것은 가능하겠지만 그 어느 것도 정당화되지 않는다고 봤어요. 실제로 카뮈는 유명한 사형 반대론자입니다. 사형은 국가가 하는 살인이며, 누구도 사람을 죽일 권리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독재자를 죽이는 것은 가능할까요? 2021년은 과거와 다르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여전히 무형과 유형의 독재자가 있습니다. 그것은 코로나19일수도 있지요. 우리는 그것에 저항하고 결속해야 합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정의가 있습니다. ‘우리’라는 근본적인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정의보다 중요한 것은 정의의 한계입니다.
까뮈가 즐겨 머물며 글을 썼던 파리의 ‘카페 드 플로르’.
문삼화: 절대불변의 정의는 없습니다. 시대별로 요구되는 정의가 있을 뿐이지요. 칼리야예프 시대에는 억압과 불평이 너무 많았기에 혁명이 필요했습니다. 시대가 바뀌면서 정의에 대한 개념은 변화해왔습니다. 종교조차도 각자의 정의를 주장하는 세상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마지막 부분 대공의 말처럼, 다른 것이 아니라 각자의 욕망만 있을 뿐이지요. 사실 우리 집은 각자 다른 색깔의 집회를 나가는 가족입니다. 촛불집회, 태극기부대의 집회를 나갑니다.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집회이기에 그들의 주장에 동의할 수는 없지만 가족을 존경합니다. 생각이 다르다고 정의롭지 않다고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각자의 정의가 너무 많아요. 내 의견만이 정의라고 부르짖는 순간 해결이 더욱 어렵게 됩니다. 누구나 각자의 정의를 주장할 권리가 있는 만큼, 서로 이해를 못하더라도 서로의 주장을 인정해야 되지 않을까요. 이 작품을 통해 관객이 정의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오늘날의 정의는 정의의 살인자들에게 알리바이가 되어주고 있는 것이다.’
-알베르 카뮈
Q. <정의의 사람들>에서 특별히 애착이 가는 등장인물이 있나요?
문삼화: 아무래도 주인공 칼리아예프에 대한 애정이 커요. 원작과 달리 이번 연극은 칼리아예프의 기억으로 이루어집니다. 원작에서는 아지트에서 독방으로 시간 순으로 이동하지만, 연극에서 과거 아지트에서의 이야기는 칼리아예프의 기억으로 소환되는 것이지요. 역사적인 사건은 그가 환영으로 보는 것이고요. 대공을 암살한 그가 시대의 정의를 위해 목숨을 바친 젊은이의 상징이기에 다른 배역도 매력적이지만 유독 그에게 마음이 갑니다.
김화영: 테러리스트 집단의 막내인 부아노프가 3막에서 유명한 대사를 하지요. “시가지 위로 어둠이 스며들 때 뜨거운 수프와 아이들, 그리고 따뜻하게 맞아주는 아내에게로 돌아가려고 바삐 걸어가는 사람들 틈에 끼여, 팔 끝에 폭탄의 무게를 느끼며 말 없이 꼼짝도 않고 서 있는 것. 그리고 이제 3분, 2분, 몇 초만 있으면, 반짝거리며 달려드는 마차 앞으로 뛰쳐나가야 한다는 걸 알고 있는 것. 그것이 바로 테러거든요.”
부아노프는 주인공 칼리아예프의 폭탄 테러가 실패하면 2차로 폭탄을 던지기로 되어 있었던 젊은이였습니다. 솔직하게 자신은 겁쟁이라서 사무 보는 팀으로 옮기겠다고 테러를 포기하지요. 내가 대학교 때 드라마센터에서 프랑스어 연극을 공연하면서 이 부아노프 역할을 맡았던 적이 있습니다. 부아노프는 카뮈에게 중요한 존재였어요. 폭탄 던지는 것을 기다리는 순간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급진적 성향의 스테판과 시인 칼리아예프, 젊은 부아노프는 대치를 보입니다. 이러한 긴장된 설정은 고전적 배치이지요.
김화영 교수와 문삼화 단장은 카뮈에 대한 공통적인 애정으로 심도 깊은 이야기를 이어갔다.
Q. <정의의 사람들>에서 특히 인상적인 부분이 부분은 무엇인지요?
김화영: 죽음에 대한 카뮈의 생각입니다. 대공의 어린 조카들과 대공비가 마차에 함께 타고 있었기 때문에 칼리아예프는 첫 번째 테러를 포기합니다. 카뮈의 소설 <페스트>에도 어린아이가 죽는 장면이 핵심입니다. 아이가 고통에 몸부림치면서 죽는데, 신부가 나와서 하나님이 우리 죄를 벌하는 것이라고 설교를 합니다. 하지만 어린아이는 죄를 지을 시간도 없었는데, 하나님이 왜 죽이냐는 반문이 나옵니다. 카뮈는 스탈린을 가장 먼저 비판한 좌파이며 사형반대론자였습니다. 잘못 판단해서 사람을 죽이면 되돌릴 수 없다고 보았기에, 주인공 칼리아예프도 어린 아이에게는 폭탄을 던지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의 모든 작품에서 살인한 자는 꼭 죽습니다. 소설 <이방인>에서 당시 백인으로 아랍인을 죽여 사형당한 경우는 없었지만, 남자는 죽었습니다. 특히 <정의의 사람들>에서처럼 독재자를 죽이는 것도 정당화되지 않습니다. 정당성을 부여하지 않습니다. 칼리아예프는 결국 대공비의 사면 제안을 거절합니다. 사면을 거절하는 것은 일종의 자살 행위이지요. 아무리 나쁜 사람이라고 해도 죽이면 안 된다는 메시지인 것이지요. 정의를 행사하는 사람은 추상적 개념에 매달리는데, 그러다 보면 사람이라는 존재를 잊게 됩니다. 사람은 구체적이고, 그 것을 살피는 사람이 예술가입니다. 사실 정의를 본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을 보는 것이지요.
Q. 이번 연극은 원작과 어떤 다른 차이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문삼화: 그간 셰익스피어, 체호프 등 몇 편의 고전을 연극 무대에 올렸습니다. 하지만 그때는 원작을 거의 그대로 무대에 올렸고 재창작을 한 적은 없었습니다. 작년에 서울시극단 단장으로 취임하면서 콘셉트를 ‘컨템포러리’로 잡았습니다. 서울시극단은 작품수가 많지 않고 다른 공공극장과 변별성이 있어야 한다고 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현대인의 시각으로 <정의의 사람들>을 재창작하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물론 고전 그대로 공연하는 것도 충분한 의미가 있지만, 이렇게 현대적 개입을 하게 되었으니 연출이 더욱 중요합니다. 작가는 대본을 책임지고, 연출은 작품을 무대화합니다. 드라마투르그는 중간에서 작품이 다른 길로 빠지지 않도록 길잡이를 해주는 역할을 담당합니다. 제가 카뮈의 작품을 무대에 올리는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연극 <정의의 사람>에 대한 많은 기대를 부탁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