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OPLE


나의 ‘세종 톱텐’

1978년 개관 이후 수많은 명공연이 열린 세종문화회관.
뮤지컬 평론가 원종원이 ‘내 인생 최고의 세종 공연 10개’를 꼽았다.

세종문화회관에는 추억이 많다. 언제나 즐겁고 반가운 곳이었다. 특히 공연을 통해 울고 웃었던 시간에 대한 감사한 마음이 있다. 세종문화회관에서 감상한 공연 중 내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을 최고의 무대 10개를 꼽아봤다.

1. <베를린 필 내한공연>(1984)

어릴 적 어머니 손을 잡고 찾았던 베를린 필 내한공연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베토벤 교향곡 중 ‘영웅’과 ‘전원’을 들려줬다. 성음 레코드가 하얀색으로 고급스럽게 치장해 만든 카세트테이프를 동네 음반가게에서 구입해 닳아버릴 정도로 듣고 무대를 찾았는데, 눈물을 찔끔 흘릴 만큼 감동받았다. 그때 우리나라 관객들은 기립박수가 익숙하지 않았는데도 대극장이 떠내려갈 정도로 열렬한 환호와 박수가 이어졌다. 하지만 카라얀은 딱 한 번의 커튼콜을 끝으로 무대로 되돌아오지 않았다. 객석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한번 쑥 훑어보고 가벼운 목례를 했던 그의 모습은 30여 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난다. 기립박수를 보내지 않은 것이 아직까지도 후회된다.

2.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1990)

현대극장에서 만든 대형 무대였다. 요즘엔 저작권 없이 막을 올린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국제저작권협약에 가입되지 않았던 80~90년대에는 이런 사례가 있었다. 아이러니하지만 이 덕분에 그때 무대에 올랐던 수많은 작품은 우리 예술가들에 의해 재해석되거나 파격적인(?) 변화를 겪기도 했다. 세종문화회관에서 만났던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도 마찬가지다. 주머니 사정에 여유가 없던 시절이라 3층 객석에서 배우 얼굴보다 헤어스타일이 더 잘 보이는 관극을 경험했지만, 백스테이지에서 조명을 뒤로하고 걸어 나오던 앙상블들의 실루엣은 꿈에서도 나올 것 같은 멋진 광경이었다.

<세종문화가이드> 1990년 12월호

3. <파트리샤 카스 내한공연>(1994)

무대에서 노래하던 그녀가 갑자기 객석으로 내려왔다. 그리곤 한 중년 사내를 객석 통로로 불러내 춤을 추기 시작했다. 2층에 있던 나와 일행은 비명을 질렀다. “1층 객석 표를 샀어야 했는데!” 프랑스 최고의 여가수로 활동하던 그녀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만난 건 그해 최고의 행운이었다.

4. <노트르담 드 파리>(2005)

“DVD 사세요” 공연 보러 가는 길에 웬 청년이 불쑥 말을 걸었다. 불법으로 저작물을 복사해 파는 호객행위였다. 프랑스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의 인기 덕분이었다. 요즘엔 이런 풍경도 다 사라졌다. 문화산업이나 예술가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정말 다행이다. 이 공연은 그야말로 선풍적인 인기를 누렸다. 90년대 말 파리에서 첫 공연이 열렸을 때 골목을 돌아설 때마다 <노트르담 드 파리>의 ‘대성당의 시대’가 들렸던 신기한 체험을 했는데, 서울 공연도 그 못지않게 세인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노트르담 드 파리> 프로그램북

5. <애니>(2006)

앞니 빠진 꼬마가 노래한다. 춤도 춘다. 그것도 잘 부르고 잘 춘다. 이미 관객들의 입꼬리는 귀까지 닿았다. 고아들의 세상 시름, 신세 한탄이 이렇게 귀여울 수 없다. 우리나라에서는 가족 뮤지컬과 어린이 뮤지컬을 혼동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엄연히 다르다. 가족 뮤지컬에서 성인 관객은 꿔다 놓은 보릿자루가 아니다. 아이들이 봐도 어렵지 않고, 어른이 봐도 유치하지 않은 완성도를 지니고 있다. <애니>는 바로 그런 무대였다. 도대체 이 아이들이 크면 어떤 모습이 될까. 수학, 과학만 영재 교육이 필요한 게 아니라 예술도 마찬가지라는 교훈을 남긴 무대였다.

6. <미스 사이공>(2006)

세트는 영상으로 대체됐고, 아메리칸드림 장면은 애니메이션으로 바뀌었음에도 <미스 사이공>이 ‘세계 4대 뮤지컬’ 타이틀을 거저 얻지 않았다는 걸 여실히 증명했다. 로렌스 코너가 각색한 새로운 버전은 이야기의 중심에 킴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베트남 전쟁이라는 현대사의 아픔을 도드라지게 드러냈다. 대사 한 마디, 노래 한 줄 없지만 극의 마지막 커튼콜에선 제일 마지막에 나오는 꼬마 탐의 존재가 이 작품의 주제를 명확히 보여준다. 커다란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무대가 그 작은 아이 하나로 가득 채워짐을 느낄 수 있었다.

2019년 <애니> 공연

<미스 사이공> 프로그램북

7. <클로드 볼링 내한공연>(2007)

나는 아직도 피아노 위를 춤추듯 휘저으며 음악을 들려주던 그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떠올린다. 클로드 볼링. 2007년 내한한 그는 음반으로나 듣던 주옥같은 선율의 음악에 쏟아내듯 생명을 입혔다. 화려하면서도 환상적인 체험이었다. 얼마 전 그의 타계 소식이 들렸다. 이제 다신 만날 수 없겠구나. 세종문화회관에서의 모습이 추억으로 남아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8. <모차르트!>(2010)

뮤지컬로 만난 모차르트는 파격에 가까웠다. 그의 천재성을 표현하기 위해 찢어진 청바지와 레게 헤어, 그리고 록스타를 방불케 하는 가창력이 동원됐다. 클래식 애호가 입장에서는 천인공노할 발칙한 상상일지 모르지만, 요즘 젊은 세대에겐 이보다 더 구체적이고 납득할만한 모습도 없을 듯하다. 수많은 스타가 <모차르트!>를 거쳐 갔지만 김준수의 무대는 단연 엄지손가락을 치켜들게 만든다. 그는 여러 작품에서 두각을 나타냈지만 가장 잘 어울리는 옷은 단연 모차르트였다. 잘츠부르크 영주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고뇌했던 모차르트는 배우 김준수에게 가장 잘 공명되는 역할이기 때문이었을까.

1978년 개관 이후 수많은 명공연이 열린 세종문화회관. 뮤지컬 평론가 원종원이 ‘내 인생 최고의 세종 공연 10개’를 꼽았다.

2010년 <모차르트!> 2010년 공연
ⓒEMK Musical Company

9. <앤드루 로이드 웨버 기념 콘서트>(2018)

카민 라림루가 왔다. 그리고 내 눈 바로 앞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오페라의 유령’을 노래했다. 꿈이 아니다. 현실이다. 오히려 잠들면 꿈처럼 깰까 두려울 정도였다. 25주년 기념 공연 영상에서도 유령으로 등장했던 바로 그다. 무대에서는 추가로 러브 네버 다이스의 ‘당신 노래를 다시 들게 될 때까지(Till I hear you sing)’도 들려줬다. 뮤지컬 마니아로서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았다.

10. <캣츠>(2021)

네이밍 더 캣이 시작되자 고양이들이 객석 통로를 점령했다. 이리저리 쏘아보고 휙 돌아서는 모습이 영락없는 진짜 고양이들이다. 마스크를 쓰고 있는 모습이 조금은 낯설기도 하지만 그래도 하나하나 얼마나 반가운지 모른다. 럼 텀 터거, 제니 애니 닷, 봄발루리나와 빅토리아 등 이젠 몇몇 고양이들의 이름까지 외울 수 있다. 코로나19 팬데믹 시대가 오면서 지금까지의 관극 체험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새삼 절감하게 된다. 세종문화회관, 나에겐 축복이다.

1978년 개관 이후 수많은 명공연이 열린 세종문화회관. 뮤지컬 평론가 원종원이 ‘내 인생 최고의 세종 공연 10개’를 꼽았다.

2021 <캣츠> 공연사진

서울시무용단의 전통춤 시리즈 을 새롭게 만들 지원군이 도착했다. 김현보 음악감독이다.

김현보 음악감독은 가장 잘 만든 음악은 극과 잘 어울려 들리지 않는 곡이라고 말한다.

_원종원(뮤지컬 평론가, 순천향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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