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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의 입맛까지 사로잡다

새로운 관객을 유치하고 더 자유로운 감상을 위해 공연장들이 식음료 시설과 서비스를 강화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세종문화회관의 시도가 가장 대표적이다.

©ROH

런던 클래식의 중심, 코벤트 가든 로열 오페라 하우스는 2016년부터 2년 동안 약 5천만 파운드(한화 약 760억)을 들여 ‘오픈 업’(Open Up)이라는 이름으로 대대적인 레노베이션을 진행했다. 오페라와 발레를 대중에게 보다 밀착시킨다는 목표 아래 공연 기반 시설을 현대화했고, 건물 옥상에 코벤트 광장이 내려다보이는 레스토랑과 바(bar)를 신설했다. 발레와 오페라의 전통적 애호층인 노년 관객이 아닌 청년 관객을 일단 오페라 하우스로 유인하기 위해 ‘식음료’를 도구로 쓴 것이다.
개편된 로열 오페라 홈페이지에서도 식음료(Eat & Drink) 섹션은 오페라, 발레 카테고리와 함께 초기 화면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로열 오페라 하우스 안에 위치한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 ‘폴 햄린 홀(Paul Hamlyn Hall)’의 경우, 당일 티켓 소지자의 사전 예약만 허락하며 로열 오페라 홈페이지를 통해 공연과 식당 예약을 함께 진행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로열 오페라 하우스 내의 레스토랑과 바는 관객들이 공연 중간 휴식 시간에 정해진 장소에서 준비된 식음료를 즐길 수 있도록 사전 예약제를 실시한다. 전반부 공연이 끝나면 로비에 자신 이름의 음식이 준비된다.

런던 로열 오페라 하우스의 최고급 레스토랑, 크러쉬 룸. ©Royal Opera House

로열 오페라가 레노베이션 단계에서 참조한 곳은 템즈강 남단의 사우스뱅크 센터다. 런던 필하모닉과 필하모니아의 본거지인 사우스뱅크 센터는 건물 상층부에 로열 페스티벌 홀을 두고 그 주변에 카페와 레스토랑을 운영한다. 동시에 길거리 음식을 파는 팝업 마켓을 주말 동안 광장에 운영하면서 런던 명소 가운데 관광객 유치 순위 7위에 올랐다(2017년 기준 330만명).
한편 런던 심포니는 상주 공연장인 바비컨 센터에서 알콜 음료를 공연장 안으로 반입할 수 있고, 휴대전화도 켤 수 있는 1시간 30분짜리 ‘노 인터벌’(no interval) 공연 <하프 식스 픽스(Half Six Fix)>를 시행한다. 덕분에 클래식 신에서 드물게 청년과 노년이 자연스럽게 섞이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주취 관객 소란 같은 불상사는 성숙한 시민 의식으로 방지할 수 있다는 합의가 형성됐다.

젊은이들이 주류를 즐기고 있는 사우스뱅크 센터의 퀸 엘리자베스홀 옥상 정원. ©Southbank Centre

다채로운 식음료 경험을 제공하는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

남반구 최고의 오페라 극장인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는 연간 2백만 명이 방문하는 호주의 대표 관광 명소다. 하지만 관광객이 구매한 공연 티켓 수입보다 식당과 기념품점에서 쓰고 간 지출이 훨씬 많다. 오페라 하우스를 처음 지을 때는 크게 기대하지 않던 수입이다. 오페라 하우스 건물을 비롯해 광장에 위치한 레스토랑과 바에서 파는 현지 와인과 다이닝은 호주에서도 최상급에 꼽힌다.
아예 체험 프로그램인 ‘테이스트 오브 오페라 하우스(Taste of the Opera House)’를 운영하기도 한다. 공연장을 방문한 관광객이 네 코스짜리 식사와 쿠킹 클래스를 접하는 체험 프로그램이다. 특히 오페라 하우스 1층에 위치한 레스토랑 ‘베넬롱(Bennelong)’은 도시를 대표하는 파인 다이닝으로 꼽힌다. 일찌감치 식음료에 눈 뜬 시드니 오페라는 클래식 시장에서 공연 수준이 세계 초일류를 지향하지 않아도 오페라 극장이 지역에서 자생할 수 있는 비즈니스 모델을 제시한다.
이렇듯 영연방에선 공연장이 더 이상 저녁 시간대에 노년 관객만 찾는 공간에 머물러선 미래가 없다는 결론에 이른지 오래다. 임대와 식음료 판매 수익을 공연장 운영에 재투자하는 선순환 구조를 이사회가 감지한다면, 세대가 교류하는 공연장을 ‘식음료의 전당’으로 비하할 시대는 지났다.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는 물론 시드니를 대표하는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 ‘베넬롱’. ©Bennelong

가까운 일본의 공연장 식음료 풍경

도시락 문화가 발달한 일본은 전통 공연에서 클래식, 무용에 이르기까지 식도락이 공연장 문화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도쿄와 오사카를 비롯한 가부키 상설 극장에는 막간에 마쿠노우치(幕の內) 도시락을 판다. 원래는 제작 스탭이 공연 사이에 끼니를 해결하는 용도였지만, 관객의 공연 문화로 자리 잡기 시작해 국립극장이나 국립연예장 등 전통 공연장에서도 관람객을 모으기 위한 계절 특선 도시락을 선보이고 있다. 클래식 전용 극장인 도쿄오페라시티는 돈가츠 샌드위치, 발레와 오페라를 선보이는 도쿄문화회관의 히비키 카페는 팬케익으로 유명하다.
도쿄에서는 공연 전이나 휴식시간에 생맥주와 와인을 든 관객들도 많다. 도쿄 산토리홀은 공연장 로비를 아예 고급 위스키 바처럼 운영하기도 한다. 주류업에서 사업을 일으킨 산토리는 홀 곳곳에 사업의 자취를 새겼다. 계단 난간의 문양은 맥주와 위스키의 원료인 보리를 형상화했다. ‘인터메초’(간주곡)라는 이름의 바에는 바텐더가 상주하면서 와인, 맥주, 위스키를 제공한다. 산토리홀이 로비에서 주류를 다루는 방식은 오사카 이즈미홀, 삿포로 기타라홀, 나고야 시라카와홀 등 일본 대도시 실내악 공연장으로 퍼졌다.

맥주의 원료인 보리를 형상화한 산토리홀 계단 난간 문양. ©Suntory

국내 공연장의 주류 판매, 어디까지 허용될 수 있을까?

국내에선 2016년 개관한 롯데콘서트홀이 개관 초기 중간 휴식을 30분으로 늘리고 맥주, 스파클링 와인을 판매했다. 세종문화회관은 한 걸음 더 나가 지난해 12월, ‘블랙박스’ 컨셉트의 S씨어터에서 열린 <인디학 개론> 공연에서 객석 내부로 주류 반입을 허용했다. 크래프트 맥주를 주로 다루는 제주맥주와 협업했고 1인당 2캔까지 구매를 허용했다.
하지만 그동안 국내 공연장은 대내외의 각종 규제로 공연장 안은 물론, 로비에서의 주류 판매에 소극적이었다. 국제 기준에선 세계보건기구(WHO)가 ‘알콜 없는 환경’을 정책 목표로 공공장소에서의 음주 규제, 특히 박물관이나 공연장에서 주류 구입을 가급적 제한하는 조치를 권고했다. 각국은 자국의 문화적 배경에 맞춰 ‘자발적 규제’(영국), ‘완전 금지’(뉴욕), ‘부분 금지’(뉴질랜드)로 해석을 달리했다. 국내에선 ‘공연장은 금주 공간’이라는 불문율이 암묵적으로 유지됐고, 오랫동안 작은 병 크기의 먹는 샘물 반입도 금지됐다.

산토리홀 로비의 ‘인터메초’ 바에서는 바텐더가 주류와 음료를 제공한다. ©Suntory

그러다 2007년 태양의 서커스 <퀴담>의 텐트 극장 공연에서 주류를 제공한 좌석이 등장하면서 공연 관계자의 인식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세종문화회관은 2019년 관계 법령을 확인하고 적법 절차에 따라 <인디학 개론>에서 객석 내 주류 반입을 시행했지만, 이런 흐름이 전국으로 번지기에는 장애물이 있다. 연장 소재지 공무원의 판단에 따라 공연장 내 주류 반입이 위법으로 판정될 개연성이 있다. 가령 공연장 대관 규정에는 주류 반입을 금지하면서 리셉션에 주류가 등장하면 지역 언론과 시의회가 공연장에 성실 의무 위반의 책임을 묻는 사례가 실재했다.

_한정호(에투알클래식 & 컨설팅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