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GE

여자, 나를 찾다

플래시온 창작플랫폼 「포트폴리오」와 「여전사의 섬」은 젠더와 관련해 급변하는 사회를 사는 여성들에게 큰 울림을 남겼다.

「포트폴리오」, 태도에 관하여

극과 극은 통한다. 작품 속 대학입시를 앞둔 고등학생 예진(김민혜)과 시나리오 작가 지인(이지연)이 그렇다. 둘은 예진의 입시 포트폴리오 영상 제작을 위해 만났다. 고용인과 피고용인으로 시작된 관계. 이 일로 돈을 벌어야 하는 가난한 지인은 당연히 예진에게 적극적이고,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움직여야만 하는 예진은 소극적이다.

서로 다른 두 사람에게 공통점이 있다면, 현재 둘 다 자아가 없다는 점이다. 경제적 어려움이 있고 아직 세상의 인정을 받지 못한 지인은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 엄마(최나라)가 원하는 ‘여성 리더’로 자라야 하는 예진은 그저 끌려 다니며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른다. 다른 듯 같은 두 사람이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대상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김지원)다.

 

 

필요에 의해 만난 이들이 서로의 상처를 들여다보고 변화한다는 이야기는 많다. 그런데 작가 장정아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포트폴리오」는 이 변화의 중심에 ‘태도’를 놓는다. 예진의 엄마 오경은 예진과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의 만남을 ‘소녀와 소녀 콘셉트’라는 말로 정리한다. 과거의 끔찍했던 경험이 현재의 삶에까지 영향을 끼침에도, 제3자는 ‘어차피 사연 다 비슷비슷하잖아’라고 쉽게 말한다. 예진도 할머니를 직접 만나기 전까지는 진심인지 모를 내레이션을 영혼 없이 읽어내려 갈 뿐이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소재로 한 시나리오를 준비했던 지인 역시 현실 앞에서 ‘꼭 필요한 이야기’라며 증언을 종용하기도 한다. 연극은 타인의 고통에도 자신이 원하는 바를 얻으려는 인간의 무례함으로 극을 가득 메우며 관객을 향해 질문한다. 이 과정 속에서 당신의 모순은 발견되지 않는지, 우리는 어떤 태도로 고통받는 이들을 만나야 하는지.

 

 

정답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가 아닌 귀녀 할머니, 시나리오 작가가 아닌 지인, 학생이 아닌 예진 그 자체에 있다. 변화는 자기 자신으로서 움직일 때 시작된다. 예진은 귀녀 할머니의 상처가 아닌 그가 내민 꽃에 마음을 연다. 지인은 귀녀 할머니가 그동안 자신을 어떻게 속였고 다시 찾아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시나리오 작업을 멈춘다. 제3자였던 지인의 선배 명성(유원준) 역시 귀녀 할머니를 만난 후 정서를 담아내는 방식의 편집을 택한다.

이 연극에서 유일하게 귀녀 할머니를 만나지 않은 오경만이 변화하지 않는다는 것이 중요하다. 세상에는 사람 수만큼의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단어 너머에 각기 다른 독립적인 인간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종종 잊는다. 연극은 자아를 찾아가는 인물들을 통해 편의대로 사람을 분류하고 그 분류법에 따라 정의하는 태도를 지적하는 셈이다. 눈을 맞추고, 살아있는 이야기를 듣고, 손을 만지며, 있는 그대로의 상대를 받아들여야 한다. 모든 것에는 자신만의 이름이 있는 법이니 말이다.

 

「여전사의 섬」, 싸우는 존재의 힘

 

작품은 자신을 소개하는 한 여성의 목소리로부터 시작한다. 면접장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호기롭게 시작된 목소리는 점점 들리지 않는다. 주변의 목소리가 커지기 때문이고, 이것은 다수인 남성의 목소리다. ‘여전사의 섬’이라는 제목부터 연극의 오프닝까지, 연극은 이를 통해 여성이 처한 현실을 고스란히 담아내겠다 선언한다.

사회 경제적으로 가장 취약한 존재인 여성 취업준비생 지니(허진)는 모든 곳에서 환영받지 못한다. 면접장에서는 물론이고, 쌍둥이 언니 하나(김유민)의 상견례 자리에서도 그렇다. 지니는 생계를 위해 시작한 아르바이트 현장에서 노동의 질을 변화하려는 의지 대신 끊임없이 타인으로 대체하는 사장(윤성원)의 태도와 성희롱만을 마주할 뿐이다. ‘성공’의 범주에 들어선 스튜어디스 하나의 삶도 크게 다르지 않다. 매뉴얼에 따른 완벽한 일처리에도 침묵을 강요당하고, 자기 방어의 행위는 하나를 ‘폭력적인 인간’으로 비난하는 도구가 된다. 예비 시어머니(김시영)는 ‘딸처럼’이라는 단어 뒤에서 은연중에 하나를 통제하려 들고, 남자친구(장석환)는 자신의 마음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자 하나를 폭행한다.

 

 

연극은 두 여성이 경험하는 불합리의 원인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엄마(김원정)를 발견한다. 시작은 결핍으로 인한 불만이었다. 다른 응시자가 면접장에서 존경하는 인물로 엄마를 꼽는 모습을 보았을 때, ‘엄마 없는 자식’이라는 소리를 듣기 싫어 모든 것에 완벽해야 했던 과거를 고백하며. 그러나 이들이 발견한 엄마는, 타인에 의해 구해지기보다는 스스로를 지키고 자신이 원하는 삶을 위해 비난마저도 감수한 전사였다. 지니와 하나는 엄마를 엄마로서 바라보는 대신, 자신과 비슷한 시간을 거쳐 온 한 여성이 어떻게 변화했는지에 주목한다.

“내가 나를 지키지 않으면 아무 것도 못 지켜.” 엄마가 높은 곳에 있는 유리창을 과감히 깨부수는 것처럼, 연신 낮은 곳에서 움직이던 지니와 하나는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가 자신들을 얽매고 있던 것들을 아래로 내던진다. 싸우는 존재가 되기를 스스로 선택하고 다른 방향을 향해 걷는 두 사람의 모습은 젠더와 관련해 급변하는 사회를 살아가는 여성 관객에게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이번 플래시온 창작플랫폼의 두 작품 「포트폴리오」와 「여전사의 섬」은 모두 여성이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에 집중한다. 다양한 롤을 수행해야만 하는 플레이어가 아닌,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인간으로서의 자각. 이를 통해 우리 사회는 얼마나 여성을 다양한 방식으로 억압해왔는가를 묻는다. 이 질문으로부터 자유로울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러나 언제나 변화는 제 삶을 직시하고 뼈아픈 반성으로부터 시작되는 법이다.

글 | 장경진(객원 기자, 공연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