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의 전설, 피아니스트 ‘알프레드 코르토’의 쇼팽과 리스트 녹음
writer 이상민(음반칼럼니스트)
‘기교’나 ‘테크닉’만으로는 다다를 수 없는 ‘프렌치 에스프리’의 자유로운 경지와 쉽게 범접할 수 없는 ‘고결한 아름다움’을 알프레드 코르토의 피아니즘에서 만나보세요. 그의 음악과 함께라면 다가오는 ‘봄’이 훨씬 더 찬란해질 겁니다.
우리에게는 ‘삼일절’로 각인된 3월 1일은, ‘피아노의 시인’으로 불리는 ‘프레데릭 쇼팽’의 생일이기도 합니다(그의 생일이 2월 22일이라는 설도 있기는 합니다만). 그는 1810년에 태어난 음악가이지만, 107년이 지난 아직도 그를 기리는 피아노 콩쿠르가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고 있고, 바르샤바의 공항도 2001년 그의 이름을 따서 새롭게 ‘바르샤바 쇼팽 국제공항’이라고 이름 붙여졌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임동민·임동혁 형제가 최초로 쇼팽 콩쿠르에서 상위 입상한 이후, 조성진이라는 걸출한 신동이 나타나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우승함으로써, 왠지 ‘쇼팽’은 우리와 더욱더 가까워진 느낌입니다.
쇼팽은 폴란드에서 태어났지만, 20세 무렵 조국을 떠난 후 39세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평생을 프랑스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그의 이름도 폴란드식으로 읽으면 ‘호핀’에 가깝지만, 그의 아버지가 폴란드에 이민 왔던 프랑스인이었다는 것까지 감안한다면 프랑스식 이름인 ‘쇼팽’도 전혀 어색하지 않죠.
그는 평생 조국의 흙을 지니고 다녔고, 그의 유언대로 심장은 폴란드에 묻힐 정도로 조국을 사랑했지만, 그를 키운 건 프랑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거의 모든 주요한 작품은 프랑스에서 작곡되었기 때문이죠. 그는 평생 고국을 그리워하며 폴란드의 리듬과 선율로 수많은 명곡을 작곡했는데, 그의 작품과 스타일은 이후 프랑스 음악 발전에 특별한 자양분이 됩니다. 쇼팽 이후 나타나는 프랑스 작곡가들의 딱히 설명하기 힘든 독특한 ‘에스프리’는 다른 나라 작곡가에게서 찾아보기 힘든 개성적인 스타일이 되었죠.
연주 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빌헬름 박하우스’나 ‘빌헬름 켐프’ 같은 독일의 명피아니스트들이 완벽하고 균형 잡힌 튼튼한 건축물 같은 연주를 들려준다면, 프랑스의 피아니스트들은 세련되고 개성 넘치며 틀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연주를 들려줍니다. 이런 프랑스 피아니즘의 계보에서 최고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피아니스트라면 단연 ‘알프레드 코르토(1877~1962)’를 꼽을 수 있습니다(올해는 그의 탄생 14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는 쇼팽 작품의 명연주자로 오랫동안 명성을 떨치며, 1926년 ‘역사상 최초’로 쇼팽의 <전주곡 전곡(24곡)>을 녹음해서 이 곡을 새롭게 조명 받게 만들었고, 그가 연주한 모든 연주들이 이후 쇼팽 연주의 규범처럼 여겨질 정도로, 그는 20세기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피아니스트 중 한 명으로 손꼽힙니다. 우리에게는 쇼팽 스페셜리스트로 알려져 있지만, 그는 사실 음악계 전반에서 엄청난 활동을 한 다재다능한 음악가였습니다.
코르토가 당대 최고의 스타 피아니스트였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지만, 그는 1902년 5월 파리에서 바그너의 오페라 <신들의 황혼>을 지휘해서, 최초로 바그너를 프랑스에 소개한 지휘자이기도 했고, 뛰어난 피아노 선생으로서 파리 음악원에서 ‘클라라 하스킬’, ‘디누 리파티’, ‘상송 프랑수아’ 같은 명피아니스트를 길러낸 교수이기도 했습니다. 파리에 ‘에꼴 노르말 드 무지크’라는 최고의 사립 음악학교를 설립하기도 한 교육자이기도 했죠.
그뿐만 아니라 바이올리니스트인 ‘자크 티보’, 첼리스트 ‘파블로 카잘스’와 함께 초기 리코딩 시대에 활동한 ‘가장 중요한 트리오’의 멤버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각종 피아노 작품의 편곡반 에디션을 남긴 뛰어난 음악학자이기도 했고, 평론가이자 문필가로 이름을 날리기도 했습니다.
그는 쇼팽의 <전주곡(24 Preludes)>을 사랑해서, 세계 최초 리코딩을 포함해 모두 네 차례나 전곡 리코딩을 남겨놓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1925년 리코딩 역사상 최초로 ‘전기 녹음’을 통해 음반을 녹음한 역사적인 아티스트이기도 합니다. 또한 쇼팽의 업적에 가려져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1929년에는 리스트의 유일한 피아노 소나타인 ‘B단조 소나타’를 역시 ‘세계 최초로 녹음’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리스트는 기교에만 몰두한 이류 작곡가라는 푸대접을 받고 있었는데, 그는 리스트의 소나타에서 진지한 아름다움을 찾아낸 최초의 피아니스트였던 셈입니다. 그의 리코딩이 아니었더라면 우리는 아직도 리스트 소나타의 뛰어남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르죠.
1857년 리스트의 나이 46세쯤 ‘한스 폰 뷜로’의 피아노 연주로 초연된 이 소나타는 피아니스트가 연주하기 까다로운 곡으로 유명합니다. 일단 연주 시간이 30분 가까이 된다는 점에서 체력적으로 매우 어렵습니다. 그리고 악장이 구별이 없어서 곡이 끝날 때까지 약 30분간을 쉬지 않고 연주해야 합니다. 게다가 이 긴 시간 동안 고도로 집중하지 않으면 연주의 균형이 무너지기 때문에 고도의 집중력은 필수입니다. 게다가 연주자의 진이 다 빠질 무렵인 끝부분에 가서, 모든 힘을 끌어올려야 하는 최고 강도의 양손 옥타브가 다시 등장합니다. 하지만 마지막엔 관객의 환호도 기대할 수 없게 왼손 최저음인 B음을 짧게 누르고 끝나버리죠. 한마디로 말해서, 모든 고생은 다 시키고 관객의 환호도 제대로 못 받게 하는, 연주자들에게는 매우 힘들면서도 매정한 곡입니다.
코르토는 ‘음색의 화가’라고 불릴 만큼 아름다운 음색을 가지고 있었고, 꿈결 같은 ‘루바토’도 유명했지만, 그 무엇보다 유명했던 건 그의 ‘미스터치’였습니다. 그는 뛰어난 테크닉을 가진 피아니스트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리코딩을 들어보면 틀린 음들이 무수히 쏟아집니다. 당시에는 리코딩의 편집 기술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그의 제자였던 프랑스 피아니스트 대모 이본느 르페브르는 “그가 잘못 연주한 음표들도 신의 선물이다”라고 할 정도로, 그의 연주에는 테크닉을 뛰어넘는 다른 피아니스트들과 차별되는 특별한 개성이 담겨 있습니다.
코르토는 초창기 리코딩 시대를 살다간 아티스트였기 때문에 그가 남긴 녹음의 음질마저 그다지 좋지 않지만, 그 열악함 속에는 찬란하게 빛나는 ‘피아노의 맑은 영혼’이 숨어 있습니다. ‘기교’나 ‘테크닉’만으로는 다다를 수 없는 ‘프렌치 에스프리’의 자유로운 경지와 쉽게 범접할 수 없는 ‘고결한 아름다움’을 알프레드 코르토의 피아니즘에서 만나보세요. 그의 음악과 함께라면 다가오는 봄이 훨씬 더 찬란해질 겁니다.
알프레도 코르토-40CD 리마스터링 전집
아티스트 : 알프레드 코르토
레이블 : EMI Classics
앨범 종류 : 컴필레이션
발매일 : 2012.11.23
장르 : 클래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