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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으로 영원한 아름다움을 노래하다

미로와 음악과의 상관성 ④

붓으로 영원한 아름다움을 노래하다

미로와 음악과의 상관성 ④

writer 호안 푸넷 미로(Joan Punyet Miró)

호안 미로의 손자인 호안 푸넷 미로(Joan Punyet Miró)는 ‘미로와 음악과의 상관성’에 대해 심도 있는 연구를 수행해왔습니다.
본지에서는 지난 6월호를 시작으로 그의 연구를 간략히 엮은 논문을 <마음속에 그려 넣은 하나의 단어, ‘음악Musique’>, <영감의 원천에서 샘솟는 소리 없는 음악>, <음악과 미술, 표현의 경계를 넘어서>란 부제로 연재하였습니다. ‘미로와 음악과의 상관성’ 그 마지막 이야기는 <붓으로 영원한 아름다움을 노래하다>이며, 미로의 내면까지 세세히 살피는 이야기를 통해, 독자들이 미로의 예술관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_편집자 주

미로는 자신이 예술을 통해 여러 사건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는 다른 작가들보다 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미로는 전 세계를 누비며 활동하는 예술가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뿌리를 잊지 않았다. 미로는 카탈루냐 출신의 스페인 사람이었다. 프랑코 독재 정권에 맞서는 고국의 작곡가나 음악가가 그에게 있어서는 항상 걱정거리였다. 발렌시아 출신의 작곡가 겸 가수 라이먼 또한 미로가 걱정하던 예술가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저는 살바도르 에스프리우의 <시간의 수레바퀴의 노래(Cançons de la Roda del Temps)>를 위한 음악을 작곡한 뒤, 이를 녹음하기로 결정했습니다. 1963년에 이 음악을 만들기 시작하여 1965년 마침내 이를 완성했을 때, 음반 제작사는 충분히 상업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음반의 발매를 거부했습니다. 저는 이 사실에 정말 분노했습니다. 미로에게 이러한 사정을 설명하자, 그는 즉시 이 음반의 표지를 위한 그림을 그려 주겠노라고 답했습니다.” (01)
미로는 자신이 한 약속은 꼭 지키는 사람이었고, 표지 그림을 그려주었다. 1975년 조르주 라이야르에게 그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라이먼의 노래 ‘아니라고 이야기하자(Diguem no)’는 이곳에서 금지곡으로 지정되었습니다. 그의 노래는 카탈루냐의 민중항쟁 운동을 대표합니다. 저는 라이먼이 지금처럼 널리 알려지기 전 파리에서 그를 처음으로 만났습니다. 라이먼은 저를 찾아왔고, 저는 몇 년 전 올림피아 극장에서 열린 그의 첫 독창회에 참석했습니다. 라이먼은 현재 프랑코 독재 정권을 반대하고 카탈루냐의 요구 사항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그가 노래를 부르면 카탈루냐 자치주의자들의 시위가 바로 촉발될까 봐 경찰은 경계를 강화하고는 했습니다.” 굉장히 힘든 시기였고, 특히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예술가에게는 더더욱 어려운 시기였다. 미로 또한 늘 대중에게 이러한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노력하였다.
1965년 미로는 피아니스트 로버트와 가비 카사드쉬로부터 아름다운 선물을 하나 받았다. 드뷔시, 샤브리에, 사티, 포레의 음악을 녹음한 음반의 뒷면 표지에 다음의 글귀가 적혀 있었다. ‘호안 미로와 부인 필라르 미로에게, 깊은 애정을 담아서. 1965년 6월. 파리.’ 이 글귀를 통해 우리는 그가 작곡가뿐 아니라 클래식 음악 피아니스트와도 친분이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같은 해 프랑스의 유명 작가 프루스트에 의해 널리 알려진 문답 놀이인 ‘프루스트의 질문(le Questionnaire Proust)’에서 미로는 가장 좋아하는 작곡가에 대한 질문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카탈루냐 고딕 양식 성당의 가운데에 서 있을 때면 저는 바흐를 떠올립니다. 흰색의 텅 빈 벽 앞에 서 있을 때, 텅 빈 공간, 장소와 장소 사이의 간격, 침묵, 고음의 노랫자락, 이런 것들을 떠올릴 때는 슈톡하우젠이 떠오릅니다. 들판을 걸으며 이곳저곳에 머물 때면 비발디가, 대도시를 거닐 때는 바레즈를 떠올립니다. 파리의 거리를 걸을 때는 존 케이지를 자주 생각합니다.” 누구라도 미로의 이러한 대답에 매료될 것이다. 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 서로 다른 세계를 품고 있을 수 있을까? 미로는 이러한 대답을 통해 우리에게 그의 영혼의 깊이와 자신을 둘러싼 주변 세계에 대한 놀라운 지각력을 보여준다. 미로는 매우 경이로운 방식으로 음악을 시각화한다.

① <시간의 수레바퀴의 노래(Cançons de la Roda del Temps)> 음반 표지, 1966년 Archivo Successió Miró”></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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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시간의 수레바퀴의 노래(Cançons de la Roda del Temps)> 음반 표지, 1966년
Archivo Successió Miró

파리에 머물던 초기에 미로는 화가들보다 시인들에게 더 이끌렸다. 1960년대 말에 이르러서는 점점 더 음악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음악가들과 작곡가들과도 어울리기 시작하였다. 1966년에 촬영한 작은 보석과도 같은 영상인 <미로를 위한 블루스(Blues for Miró)>에서는 매그재단(Fondation Maeght)의 정원에서 자신이 작곡한 음악을 연주하는 듀크 엘링턴이 등장한다. 그 뒤편에는 자신의 작품 옆에 서 있는 미로가 보인다. 또한, 이 시기에 역시 매그재단에서 촬영한 사진에서는 존 케이지와 머스 커닝햄과 어울리는 그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미로와 케이지는 서로를 존경하였으며, 미로가 직접 수기로 남긴 메모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그가 작업을 위해 적어놓은 메모에서는 ‘존 케이지의 작품을 참고할 것’이라는 문구가 자주 등장한다. 존 케이지 역시 미로와 진행 중인 공동 작업을 위한 두 장의 귀중한 악보와 함께 많은 메모를 남겼다.
누가 누구에게 영향을 미쳤는지 증명하려는 시도는 무의미하다. 그저 그들이 동일한 파장의 선상에 있었고 같은 미스터리의 핵심에 다가가고자 했으며, 창작이라는 어려운 임무 안에서 비슷한 문제에 직면했다고 말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그러나 미로의 경우 나이가 들어가면서 영감의 원천이 더욱 확장되었다고 말하는 편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디에고 마송의 말을 인용하자면 “많은 작곡가들이 미로에게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존 케이지가 그렇죠. 케이지의 곡 중 ‘황도의 지도(Atlas Eclipticalis)’라는 곡이 있는데, 제가 연주하고 지휘를 했습니다. 또한, 존 케이지 본인의 지휘에 따라 연주한 적도 있는데, 그럴 때면 미로의 <성좌(Constellation)>가 떠오르고는 했습니다. 악보가 미로의 그림과 비슷했죠. 우리가 ‘그림’이라고 즐겨 부르는 악보들이 있는데, 다른 어떤 화가보다 특히 미로의 그림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습니다. 사실 제가 미로의 <성좌>를 바라볼 때는 소리, 정말이지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미로가 1968년에 그린 <침묵(Silence)>을 바라보면, 케이지의 음악과 멀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02). 우리는 종교의식을 치르듯 심혈을 기울여 작업하는 미로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는 작업을 하지 않고 있을 때조차 작업을 하고 있었다. 새벽이 오기 전 꿈속에서도, 추후 자신의 작품을 통해 영원히 남을 자연의 모습을 찾고자 긴 산책을 할 때도 작업을 하고 있었다. 미로의 삶은 끊임없는 영감과도 같았다.
1975년 프랑코가 사망하면서 스페인의 근대사에 중요한 변화의 시기가 도래했고, 미로와 고국과의 관계 역시 개선되는 흐름을 보였다. 망명을 택한 피카소와 달리 미로는 스페인에 남았다. 그는 눈에 띄지 않게 작업하면서도 결코 자신의 원칙을 거스르지 않았다. 미로는 전 세계에서 자신의 작품을 전시하였지만, 반(反)민주적 국가에서 작품을 전시하는 것에는 대부분 거부하는 입장을 보였다. 그러나 그를 둘러싼 상황이 변하자, 미로는 바르셀로나에 미로 재단을 설립하는 것에 집중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그의 작품이 소수의 소장인의 손에 들어가는 대신 모든 이들이 감상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함이었다. 미로는 비록 지속적으로 여행을 다니긴 했지만, 주거지였던 마요르카에서 긴 시간을 보내고는 했다. 그는 이곳저곳을 누비고 다니면서도 친한 지인들과는 계속 연락을 주고받았다. 미로와 계속 연락을 주고받았던 친구 중 한 사람은 피에르 불레즈였다. 불레즈는 그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친구들에게 편지 쓰는 것을 하루 이틀 계속 미루고 있다네. 개인적인 마음을 담아 답신하기 위해 필요한 충분한 시간, 평화, 마음의 평온을 갖게 되기를 기다리고 있어. 자네의 편지를 받게 되어 무척 기뻤다네. 하지만 쫓기는 것처럼 서둘러서 답장을 보내고 싶지는 않았어. 그렇게 수개월이 지났고, 나는 지난 1월 알랭 플레인(Alain Planès)을 통해 건네받은 자네의 뜻밖의 편지가 나에게 얼마나 큰 즐거움을 주었는지 아직도 쓰지 못했다네. 알랭은 가장 충실한 사신이지. 펜을 들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린 건 바로 나라네!” 진심이 담긴 솔직한 말은 둘의 진실되고 깊은 우정을 보여준다. 피아니스트 알랭 플레인은 미로의 손자 다비드와 에밀리오의 절친한 친구로 종종 파리에서 이들을 보러 오곤 했다. 가끔 미로가 알랭을 통해 불레즈에게 편지를 전달해 달라는 부탁을 할 때면 그는 기꺼이 편지를 전달했다. 알랭은 미로를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어느 날 자네 할아버지(미로)는 자신에게 가장 깊은 인상을 준 두 명을 나에게 말해줬지. 바로 앙토냉 아르토와 에릭 사티였어. 사실 사티는 다다이스트의 영혼을 지닌 사람이었는데, 미로와 사티의 관계를 다시 짚어보는 것이 흥미로울 것이라네.” 이는 발레에 대한 미로의 특별한 관심에 근거를 둔 발언이었다. 미로는 이미 1917년 바르셀로나에서 사티의 발레 <퍼레이드(Parade)> 초연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았는데, 이 작품의 무대 미술은 피카소가, 안무는 디아길레프가 맡았다. 1924년 미로는 사티의 작품 <메르쿠리우스(Mercure)>를 보러 갔는데, 역시 피카소가 무대 미술을 맡았다. 이듬해 사티는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그가 미로와 만난 시기는 이즈음으로 추정된다.

'서울에서 꿈꾸다' 공연 무대 2 - 붉은 상의의 한복을 입은 여인이 노래를 하는 사진

② <침묵(Silence)>, 1968년 5월 17일 캔버스에 유채, 전사한 도안 174 x 244 cm
Centre Pompidou. Musée national d’art moderne/Centre de création industrielle

그러나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미로 역시 한편으로 다다이스트의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의 손자 중 가장 나이가 많은 다비드는 이야기하였다. “할아버지가 85세가 되던 해 우리에게 보여준 현대적인 모습은 우리를 무척 놀라게 했습니다. 랭보의 글인 <반드시 현대적이어야 한다(Il faut être absolument modern)>를 떠올리게 하는 순간이었죠. 어느 날 저녁 동생과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을 때, 텔레비전에서 지미 헨드릭스의 죽음을 추모하는 프로그램이 방영되고 있었습니다. 지미 헨드릭스와 그의 기타는 저와 제 동생에게 있어 신성함 그 자체였죠. 우리는 할아버지에게 옆에 앉아 이 방송을 함께 보자고 청했습니다. 그리고 할아버지에게 지미 헨드릭스가 누구인지와 더불어 그가 요절했다는 사실, 그리고 블루스와 록이 혼합된 그의 음악적 성향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할아버지는 주의 깊게 시청한 뒤, 프로그램이 끝나자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청년은 대단히 인상 깊구나. 분명히 나와 같은 것을 하고 있어.’ ” 아마 1967년 캘리포니아의 몬터레이 팝 페스티벌(Monterey Pop Festival)에서 지미 헨드릭스가 기타를 불태우는 장면이 방영되고 있었을 것이다.

미로는 1973년 12월 이듬해 파리의 그랑팔레(Grand Palais)에서 열릴 자신의 회고전을 준비하면서 다섯 점의 그림을 불태웠다. 다시 한 번 우리는 기존의 규칙을 위반하고 이를 넘어서며, 무엇보다 보는 이에게 충격을 주고자 하는 그의 식을 줄 모르는 열정을 엿볼 수 있다. 미로는 사람들의 반향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한, 다른 이들의 반응이 어떠한들 크게 개의치 않았다.
미로는 진정한 모험가이자, 진실을 탐구함에 있어 강인한 의지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태양처럼 빛나고 달처럼 고요하며, 자신이 창조한 우주 속 성좌를 꿈꾸며 여행하는 자유로운 사람이었다. 미로는 천체가 자아내는 음악을 듣는다. 그의 그림은 교향곡과 같이 때로는 정적이며, 때로는 우렁차다. 미로의 작품에 나타난 색채는 드뷔시의 음악처럼 매우 정교하다. 미로가 당대의 유명 작곡가 및 음악가들과 나눈 우정과 협업은 그가 음악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지를 우리에게 시사한다. 또한, 음악에 대한 미로의 다양한 관심을 통해 그가 깊고 넓은 음악적 지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시와 음악은 미로가 모든 사물에 영혼이 깃들어 있다는 물활론(物活論)을 깊게 탐구하기 위하여 사용한 수단이었다.
미로는 시대를 앞서가는 예술가이자, 늘 한계를 뛰어넘는 사람이었다. 그는 바르셀로나에 머물지도, 파리에 정착하지도 않은 채, 마침내 본토에서 떨어진 마요르카의 밝고 부드러운 빛 안에 영원히 잠들었다. 미로는 지속적으로 후세에 영향을 미치며 영원히 우리 곁에 살아 있다. 미로는 과일이 익어가듯 내면에서 바깥세상을 향해 일했으며, 그의 작품은 우리의 감각을 뒤흔들어놓았다. 미로는 다른 세계, 다른 소리를 일깨우기 위해 더 색다르고 친밀하며, 감각적인 언어의 콜로라투라(Coloratura)가 귓가에 속삭이는 상상의 여행으로 우리를 데려갈 필요가 있었다. 모든 위대한 예술가는 태어날 때부터 고통과 번뇌를 갖고 있다. 그러나 그의 창조적인 천재성이 우리가 사는 세계를 완전히 바꿔놓을 수 있으며, 영원한 아름다움을 남길 수 있다. 바로 이것이 미로가 한 일이었다.

꿈을그린화가 호안 미로 특별전

꿈을그린화가 호안 미로 특별전

기간 : 2016.06.26 (일) ~ 2016.09.24 (토)

장소 : 세종 미술관1관, 세종 미술관2관

시간 : 오전 10시 30분 ~ 오후 8시 (입장마감 60분전)

티켓 : 성인 1만5천원, 청소년 1만원, 어린이 8천원

문의 : 02-399-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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