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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관기’와 오페라 <삼손과 델릴라>

김성현(<조선일보> 문화부 기자)

‘판관기’와 오페라 <삼손과 델릴라>

writer 김성현(<조선일보> 문화부 기자)

<동물의 사육제>로 유명한 프랑스 작곡가 카미유 생상스가 작곡한 오페라 <삼손과 델릴라>.
사실 이 작품은 오페라가 아니라 오라토리오로 작곡하려고 했다는데 운명이 바뀐 이 곡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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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벤스 <삼손과 델릴라>

  • 프랑스 우체국장을 역임한 예술 애호가 알베르 리봉(Albert Libon)이 1877년 5월 세상을 떠났다. 그는 작곡가 카미유 생상스(1835~1921)의 아파트에서 열렸던 저녁 음악회의 고정 관객이었다. 평소 생상스의 음악적 재능을 누구보다 아꼈던 리봉은 죽음을 앞두고 10만 프랑의 유산을 생상스에게 남겼다. “마들렌 성당 오르가니스트직에서 그를 놓아주고, 작곡에 전념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라는 것이 유언장에 명기된 취지였다. 당시 파리 가르니에 극장과 오페라 코미크의 한 해 국가 보조금이 80만 프랑과 30만 프랑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 유산이 얼마나 거액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 유산에 붙은 조건은 딱 하나, 자신의 서거 1주기 때 연주할 레퀴엠을 작곡해달라는 것뿐이었다. 리봉은 유언장을 고쳐 쓸 때 이 조건마저 지웠다.
    하지만 생상스는 고인과의 약속을 지켰다. 이듬해 4월 리봉의 서거 1주기가 다가오자 생상스는 스위스 베른의 호텔에 머물면서 8일 만에 레퀴엠을 완성했다. 생상스의 레퀴엠은 1878년 5월 22일 파리의 생 쉴피스 성당에서 작곡가 자신의 지휘로 초연됐다.
    하지만 행운 직후에 예상치 못했던 불행이 잇따랐다. 레퀴엠을 초연하고 불과 6일 뒤인 28일, 작곡가의 장남 앙드레가 아파트 창밖으로 떨어져 숨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당시 앙드레는 두 살 반이었다. 6주 뒤에는 생후 6개월 된 차남 장 프랑수아마저 폐렴으로 숨을 거뒀다. 작곡가의 결혼 생활은 파경을 피하기 어려웠다. 훗날 작곡가는 “종교적 믿음을 잃었다”고 고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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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비스 코린트 <눈 먼 삼손>

  • 생상스는 23세 때부터 20년 가까이 봉직했던 마들렌 성당의 오르가니스트직을 사임했다. 마들렌은 나폴레옹 3세의 프랑스 제2제정 당시 황실 성당으로 명성이 높았다. 하지만 오르가니스트가 짊어져야 하는 부담도 막중했다. 재직 당시 생상스는 바흐의 작품을 즐겨 연주하며 음악적으로든 종교적으로든 경건한 분위기를 지키고자 애썼다. ‘생상스가 푸가만 연주한다’는 소문이 나돌 정도였다. 결혼을 앞둔 예비 신부는 그에게 ‘결혼식 당일에는 푸가를 연주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성당 신부는 오페라를 즐기는 부유한 교인들의 취향을 감안해 오르간 즉흥 연주를 할 때 유명 아리아의 선율을 넣어달라고 은근슬쩍 압력을 넣었다. 이렇듯 종교적 엄숙함과 세속적 열망 사이에서 타협은 불가피했다. 어쩌면 그런 타협에 넌더리가 난 것인지도 몰랐다.
    성당 오르가니스트라는 책무에서 벗어난 그가 애정을 기울였던 분야는 오페라였다. 오페라는 19세기 후반 프랑스 음악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장르였다. 생상스는 피아니스트이자 오르가니스트, 관현악과 실내악 작곡가로 명망이 높았지만, 유독 오페라에서는 약세를 면치 못했다. 당시 프랑스 음악계에서 최고의 라이벌로 꼽혔던 작곡가 쥘 마스네(Jules Massenet, 1842~1912) 때문이었다. 마스네가 프랑스의 오페라 극장에서 승승장구하는 동안, 생상스는 단막 오페라 <동양의 공주>와 장편 오페라 <은종>을 발표한 정도가 전부였다. 1878년 프랑스 예술원 회원 선출 때도 생상스는 마스네에게 밀려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음악평론가 로널드 크라이튼은 “다른 음악 양식에서 마스네는 도무지 생상스의 상대가 될 수 없었지만, 생상스는 마스네가 지니고 있던 극장에 대한 동물적인 감각이 부족했다”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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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렘브란트 <눈이 멀게 된 삼손>

  • 바이마르 극장

    바이마르 극장

    • 생상스가 절치부심 끝에 고른 주제가 ‘삼손과 델릴라’였다. ‘삼손과 델릴라’는 구약성서의 판관기(判官記)에 등장한다. 판관기는 예전에는 사사기(士師記)로 더욱 친숙했다. 여호수아가 세상을 떠난 뒤 이스라엘 민족이 통일 국가를 이루지 못한 채 여러 지파(支派)로 분열되어 있던 시기의 판관이 삼손이다.
      당초 <삼손과 델릴라>에 착수할 때 생상스가 구상했던 장르는 오페라가 아니라 오라토리오였다. 생상스는 시인 페르디낭 르메르(Ferdinand Lemaire, 1832~1879)에게 대본을 의뢰했다. 하지만 르메르는 “오라토리오가 아니라 오페라여야 한다”는 단서를 붙였다. 결국 오페라를 쓰기로 합의한 이들은 2막부터 작업에 들어갔다. 하지만 소식이 퍼지자, 정작 프랑스 대중은 종교적인 주제로 세속적인 오페라를 쓴다는 사실에 반감을 드러냈다. 아무리 예술이라고 해도 가톨릭의 본산을 자처했던 프랑스에서 세속과 종교의 영역을 넘나드는 행위는 불경으로 비칠 법했다. 실의에 빠진 생상스는 2년간 작곡을 중단하고 말았다. 이번에도 오페라는 생상스와 인연이 아닌 것만 같았다.
      난관에서 작곡가를 구한 건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지휘자인 프란츠 리스트였다. 1872년 생상스는 리스트가 바그너의 <라인의 황금>을 지휘한다는 소식에 독일 바이마르 오페라 극장으로 찾아갔다. 바이마르에서 생상스를 만난 리스트는 <삼손과 델릴라>의 작곡 소식을 듣고 반드시 오페라를 완성해야 한다고 독려했다. 리스트는 심지어 오페라 초연 장소로 바이마르 극장을 추천하기도 했다. 리스트의 격려에 용기를 얻은 생상스는 작곡을 재개했고, 결국 1876년 오페라를 완성했다.

    • 리스트의 도움으로 이 오페라는 이듬해인 1877년 12월 바이마르 오페라 극장에서 초연됐다. 독일어로 가사를 번역한 뒤 무대에 올리는 ‘우회상장’을 택한 것이었다. <삼손과 델릴라>는 독일에서 초연되고 13년이 지난 뒤인 1890년에야 프랑스로 ‘역수입’됐다.
      오페라에서 생상스는 삼손을 초인적인 영웅보다는 낭만적인 청년에 가깝게 묘사했다. 19세기 프랑스 낭만주의 오페라의 열풍 속에서 생상스 역시 양보와 타협은 불가피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덕분에 메조소프라노 역사상 가장 낭만적이고 운치 있는 아리아가 탄생했다. 오페라 2막에서 델릴라가 부르는 아리아 ‘당신 목소리에 내 마음 열려요’였다.
      이 아리아는 당시 유럽 궁정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생상스가 궁정에서 피아노나 오르간 음악회를 열면, 왕녀들이 앞다퉈 연주해달라고 요청했을 정도였다. 기나긴 경배의 대열에는 영국의 3인조 록 그룹 뮤즈(Muse)가 있었다. 라흐마니노프의 낭만주의를 록 음악에 가미한 듯한 매력을 지닌 뮤즈는 2009년 다섯 번째 스튜디오 음반 ‘레지스탕스(Resistance)’에 ‘나는 당신의 것(I Belong to You)’을 실었다. 이 노래의 절정에서는 생상스의 아리아가 흘러나온다. 진성과 가성을 넘나들며 구슬픈 멜로디를 토하는 보컬 매튜 벨라미가 영국식 억양이 강한 불어 발음으로 이 아리아를 부르는 순간, 생상스의 오페라는 130여 년의 간극을 뛰어넘어 강한 매력을 발산한다. 어쩌면 오라토리오보다는 오페라가 어울린다는 작사가 르메르의 눈썰미는 처음부터 정확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 작곡가 생상스

      작곡가 생상스

    • 생상스에게 오페라 <삼손과 델릴라>를 완성하라고 격려한 프란츠 리스트”/></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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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상스에게 오페라 <삼손과 델릴라>를 완성하라고 격려한 프란츠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