핸드폰 알람에 잠을 깨고, 지도 앱으로 동선을 확인합니다. ‘카카오톡’과 메시지로 이야기를 나누고, 각종 음식을 핸드폰으로 주문합니다. 수시로 SNS에서 ‘좋아요’를 받기도 합니다. 어느새 핸드폰은 개인의 생활 전반을 지배하는 물건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블랙박스와도 같은 핸드폰의 모든 정보를 타인과 공유하게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5월 18일부터 공연되는 연극 <완벽한 타인>은 이런 상상으로부터 시작되는 작품입니다.
에바 역의 유연과 장희진, 로코 역의 양경원과 박은석(왼쪽부터).
화제의 영화 <완벽한 타인>
이야기가 익숙한 분들도 있겠습니다. 이 이야기는 2018년에 조진웅, 이서진, 유해진, 염정아 등이 출연한 영화 <완벽한 타인>으로 먼저 소개되었습니다. 영화와 연극은 2016년 이탈리아에서 제작된 영화 <퍼펙트 스트레인저>(원제: Perfetti Sconosciuti)를 원작으로 합니다. 영화는 로코와 에바의 집에서 시작됩니다. 이들은 오래된 친구들을 저녁 식사에 초대했습니다. 코즈모와 비앙카 부부, 렐레와 까를로타 부부, 페페가 그들입니다. 일곱 남녀는 최근 핸드폰 문자로 외도가 발각되어 이혼한 친구 부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저녁시간 동안 오는 전화와 메시지를 모두와 공유하는 게임을 시작합니다.
게임을 빌미로 그동안 쌓였던 불만들이 조금씩 새어 나오고, 장난스럽게 시작된 게임은 서로의 삶을 향해 돌진하며 비밀을 드러냅니다. 이들은 상대를 속인 채 가슴 확대 수술을 준비하거나 요양원을 알아보고, 이전 배우자와도 연락을 이어왔습니다. 은밀한 사생활을 주고받거나, 배우자를 두고 외도를 저지른 이도 있습니다. 밝혀진 비밀 앞에서 서로의 감정은 격해지고, 새로운 진실은 편견을 드러내며 그동안의 신뢰를 깨부수고 또 다른 상처를 만듭니다.
<퍼펙트 스트레인저>는 핸드폰을 통해 관계의 이면을 발견하며 인간의 위선을 꼬집습니다. 어디에나 있을 법한 이야기와 핸드폰이라는 보편적인 소재는 이탈리아를 넘어 전 세계로 확장되었습니다. 스페인과 프랑스, 중국과 베트남, 멕시코와 러시아 등에서 제작되며 ‘가장 많이 리메이크된 영화’로 기네스북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까를로타 역의 유지연과 정연, 렐레 역의 김재범과 박정복(왼쪽부터).
같은 작품 속 다른 이야기
리메이크된 영화들은 동일한 설정을 각국의 정서에 맞게 변주하며 새로운 관점을 제시합니다. 한국의 <완벽한 타인> 속 친구들은 골프를 치며 사회적 위치를 재확인하고, 무리를 해서라도 부동산에 투자합니다. 근사해 보이는 집을 꾸미고 화목한 가정을 연기하며 살아갑니다. 렐레와 까를로타 부부의 이야기는 한국 영화에서 가부장적인 남편과 자아를 잃은 부인이라는 설정으로 무게감을 더했습니다. 일곱 인물들은 수시로 서로를 비교하고 평가하고 알게 모르게 눈치를 봅니다. 한국의 <완벽한 타인>은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한국 사회를 그려냅니다.
프랑스의 <완벽한 만찬>에는 좀 더 노골적인 핀잔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유일하게 혼자 등장한 벤(원작의 페페)의 삶에 수시로 참견하고 그의 의견을 묵살합니다. 자유와 평등, 박애로 대표되는 프랑스에서도 명백하게 존재하는 서열이 뒷맛을 씁쓸하게 합니다. 중국의 <완벽한 타인: 킬 모바일>은 가장 큰 비밀을 간직한 소소(원작의 페페)를 여성으로 설정해 불법촬영과 같은 사회문제를 지적합니다.
비앙카 역의 박소진, 임세미와 코지모 역의 이시언, 성두섭(왼쪽부터).
위험한 게임으로 포착되는 치열한 감정선
나라마다 무엇에 방점을 찍느냐에 따라 작품의 결은 달라졌지만,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완벽한 타인>의 매력은 일곱 명이 보여주는 심리 묘사에 있습니다. 누군가는 끝까지 비밀을 사수하려 전전긍긍하고, 진실을 알게 된 이는 분노합니다. 이미 드러나 버린 문제에 도리어 체념하는 모습도 보이죠. 영화가 클로즈업으로 이들의 표정 변화에 주목한다면, 연극은 실시간으로 쏟아지는 말의 홍수 속에서 감정을 섬세하게 포착합니다.
연극의 연출을 맡은 민준호 연출가는 그동안 일상적인 감정에 집중한 작품을 선보였습니다. 특히 여덟 명의 인물이 창조론과 진화론으로 팽팽하게 다툰 연극 <신인류의 백분토론>은 특별한 움직임이나 효과 없이 배우들의 말맛을 살린 연기로 화제를 모았습니다. 성격이 분명한 캐릭터들이 주고받는 말의 호흡은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극에 리듬감을 부여했습니다. <완벽한 타인> 역시 비슷한 구조로 진행되는 만큼, 민준호 연출가와 배우들의 연기 앙상블을 기대해볼 만합니다.
페페 역의 김설진, 임철수와 소피아 역의 김채윤(왼쪽부터).
정신과 의사로 ‘핸드폰 잠금해제 게임’을 제안하는 에바 역은 유연과 장희진이, 그의 남편이자 성형외과 의사 로코 역은 양경원과 박은석이 맡습니다. 보수적인 변호사 렐레 역에는 김재범과 박정복이 캐스팅되었고, 일탈을 꿈꾸는 렐레의 부인 까를로타 역에는 정연과 유지연이 활약합니다. 신혼부부인 비앙카와 코지모 부부는 박소진·임세미, 이시언·성두섭이 연기합니다. 예상치 못한 충격을 선사하는 페페는 김설진과 임철수가, 에바와 로코의 딸 소피아는 김채윤이 함께합니다.
인간은 생각보다 이기적이라서 나만큼 상대에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잘 안다는 착각에 쉽게 빠집니다. 때문에 상대의 의견을 구하거나 상태를 유심히 살피는 경우가 드물죠. 어쩌면 소통하지 않았던 시간들이, 무신경하고 솔직하지 않았던 태도들이 <완벽한 타인>의 비밀을 만들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과연 비밀로부터 자유로울까요? 우리가 쓰고 있는 가면은 어떤 모습일까요? 허영과 위선, 배신과 절망으로 뒤섞인 <완벽한 타인>이 지금의 나를 돌아보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