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넘게 연출가와 극단 대표로 연극 현장에 몸담아온 서울시극단 문삼화 신임 단장. 오랜 시간 고민해 온 연극에 대한 철학을 서울시극단에 녹여내기 위해 새로운 시도를 꿈꾼다. 서울에서 서울시극단은 무엇을 해야 할까? 연극은 무엇을 말해야 할까?
서울시극단을 이끌게 된 소감이 어떤가?
연극 생활 처음으로 월급을 받는다. 돈값을 해야 하지 않을까?(웃음) ‘공공단체’라는 막중한 책임이 느껴진다. 서울시에 맞는 색깔을 입혀야 하기에 남다른 각오가 생긴다. 서울시의 색을 먼저 정립하고 나의 색을 스며들게 하려고 한다. 콘셉트는 ‘컨템퍼러리(Contemporary)’다. 국립국장에서 정통 연극을 하고 있다면 우리는 같은 고전을 해도 ‘현대적인 과감한 해석’을 해보려 한다.
지금까지 극단 유에 몸담고, 공상집단 뚱딴지를 이끌면서 연극이라는‘예술’에 천착해왔다. 방금 얘기한대로 이제 서울시극단을 이끌려면 ‘예술’과 함께 ‘공공성’도 생각해야 한다. 이 두 가지 가치를 어떻게 조화시킬 예정인가?
예술과 공공성이 굉장히 어울리지 않는 단어 같을 수도 있다. 예술은 자유로워야만 할 것 같고. 하지만 예술인에게도 내면에 깔린 ‘공공성에 대한 사명감’이 있다. 공공성이라는 것 자체가 다수를 위한다는 것인데, 모든 예술은 관객 없이 존재할 수 없고, 함께함으로써 완성된다. 관객과 소통해야 하는 예술은 그 자체로 관객을 고려하는 공공성을 지니고 있다. 물론 모든 예술의 출발은 자신이 하고 싶은 얘기에서 출발하지만 거기서 끝나면 안된다. ‘어떻게 얘기하느냐’도 중요하지만 ‘무엇을 얘기하느냐’가 중요하다. 독백하거나 일기장을 쓰는 것이 아닌 이상 무엇을 얘기하느냐 하는 사명감이 있어야 한다.
문삼화 단장은 ‘동시대를 사는 이들의 고민과 아픔을 이해해야 예술을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고령화가족>, <일곱집매>, <바람직한 청소년> 등 우리 사회에 묵직한 화두를 던지는 작품을 선보였다. 초기에는 ‘어려운’ 작품을 많이 연출하다 나중에는 생활이 느껴지는 작품을 많이 공연했다. 앞으로 서울시극단을 통해서도 이런 흐름을 이어갈 예정인가?
대부분의 고전 작품들이 존재론적인 질문과 관계에 대해 고민한다. 그런 보편적인 작품들이 시대의 제약을 받지 않고 오래가지만, 나는 현재의 ‘동시대적인’ 주제로 변주할 수 있다고 본다. 사실 요 근래의 정치적 현안들을 겪으면서 굉장히 심란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가지고 있는 계급과 계층 문제가 심각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연극을 통해 존재론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잃지 않으면서도 지금 당장 벌어지고 있는 현안들을 다루는 서울시극단이 됐으면 좋겠다. 동시대적인 것들이란 대한민국이 지금 겪고 있는 성장통을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거다. 한국과 서울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표현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 아닐까. 그러려면 현안들을 예민하게 흡수하고 빠르게 받아들여야 한다. 속도감 있게 움직여야 할 것 같다.
동시대적인 작품을 다루게 된 전환점이 있었나?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가 예술 인생의 엄청난 전환점이 됐다. 2009년 당시 나는 굉장히 정치에 무관심했고 예술과 정치는 무관하다고 생각했다. 예술지상주의였던 거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노제를 보며 대통령직에 대한 정치적 평가를 떠나서 인권변호사로 살았던 한 사람의 인생이 가슴에 와 닿으면서 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그 이후로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되고, 지금은 역으로 당대와 동시대 정치에 무관심하면 절대 예술이 될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게 됐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아픔, 갈증, 고민을 모르고 어떻게 예술을 얘기할 수 있을까.
예술은 광장 한가운데 있어야 한다. 그게 살아있는 예술이다. 물론 정치적인 목적극이 돼서는 안 된다. 내가 예전의 시각으로 남아있었다면 서울시극단은 연극의 정통성을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겠지만, 지금은 예술이 수많은 질문을 던지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문 단장은 광화문이라는 상징적 공간에 자리한 세종문화회관에서 연극을 통해 ‘광장’을 담아내고자 한다.
세종문화회관이 광화문 광장 바로 옆에 있다는 것이 매우 상징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럼 이 ‘광장’의 이미지와 서울시 극단이 어떻게 만나질지 궁금하다.
세종문화회관이 위치한 광화문은 변화와 역동의 의미를 가진 굉장히 매력적인 장소다. 광화문은 서울의 심장이자 상징적인 공간이라고 생각한다. 광장의 역동성이 곧 내가 시극단의 콘셉으로 잡은 컨템포러리이다. 내용면으로나 형식적으로나 “지금, 여기”에 충실한 작품을 올려 보고자 한다.
서울시극단의 창작플랫폼은 어떻게 운영할 계획인가?
창작 플랫폼의 의의와 목적은 시극단의 정체성에 부합하는 작품을 장기적으로 개발하는 것이며 동시에 연극인들의 기회를 순환/제공한다는 데에 있다. 보통 창작 플랫폼이라고 하면 신진 예술가 개발이라는 이미지가 강한데, 플랫폼은 말 그대로 여러 사람이 스쳐 지나갈 수 있는 발판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그래서 시극단에서는 기존에 신진 개발에 집중되었던 것을 ‘중견’과 ‘디퍼런트(Different)’ 섹션까지 확장하고자 한다. 특히 디퍼런트 섹션은 내용이나 형식이 그야말로 ‘다른‘ 다양한 시각의 공연들이 될 것이다.
중학교 때 세종문화회관 별관에서 공연을 봤다고 들었다. 그때 나중에 세종문화회관에서 일하게 될 줄 예상했나?
물론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앞으로 어떻게 살지조차 가늠할 수 없던 시기였다. 내가 다닌 창덕여중은 덕수궁으로 아침 청소를 나갈 정도로 광화문과 가까웠다. 당시 교장 선생님께서 합창, 무용, 뮤지컬, 연극 등 장르 불문하고 세종문화회관 단체 관람을 그렇게 많이 보내주셨다. 공연 관람에 한 번도 빠진 적이 없었다. 그 기억이 아직도 강렬하게 남아있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연극을 봤다. 그때 말로 표현하기 힘든 감정으로 공연 예술에 이끌린 것처럼 지금 이 자리에 있게 된 것도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운명이지 않을까. 그 기억이 강렬하게 남아있다. 결국 그 문화 체험이 연극인 한 명을 배출한 거다.
그때의 경험 덕분일까? 청소년 관객을 만날 계획도 세우고 있다.
미래 관객을 개발하는 것이 오랜 숙제였다. 내년 상반기에 청소년 관객을 만날 프로젝트가 진행될 거다. 그중에서 연극인이 한두 명이라도 나오지 않을까. 그게 어떻게 보면 미래 인력 개발, 신진 발굴일 수도 있겠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연극과 공연에 눈뜨게 되는 계기는 될 수 있지 않을까? 나도 단체 관람을 통해 공연을 좋아하게 된 경우니까. 지금 청소년들은 짧은 영상과 유튜브 같은 매체에 익숙해져 있다. 연극을 보러 가는 것이 고리타분한 경험이 되지 않도록 연극이 변모해야 한다. 그게 바로 ‘탈(脫)극장’과 관객과 직접 소통하는 ‘이머시브(Immersive) 연극’이다. 관객과 배우를 분리했던 ‘제4의 벽’을 깨고 청소년의 감각에 맞게 바꾸려고 한다. 광장을 쏘다니면서 예정되어있지 않은 관객을 만나는 연습을 할 거다. 움직이는 명화 등 다양한 아이템을 생각 중이다.
코로나19 사태로 공연과 연극계가 많이 위축됐다. 연극을 지키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코로나 시대에는 그에 대한 대응과 변화가 필요하다. 지금 공연 영상화가 진행되고 있는데, 그게 유일한 대안은 아니다. 영상은 감독이 보여주기로 결정한 장면만 보여준다. 관객이 선택하는 게 아니라 감독이 선택한 장면만 보도록 강요받는다. 배우를 안 보고 조명을 보든 세트를 보든, 연극은 관객이 무엇을 보든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게 연극의 매력이다. 관객의 시각을 강요할 수 없다는 것. 연극은 많은 부분이 관객과 배우의 몫으로 남아있어야 한다. 다양한 대안을 고민해야 하는 단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