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사랑을 기억하는 법
뮤지컬 <번지점프를 하다>
글. 이유진 (영화칼럼니스트)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당신을 사랑합니다.”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는 마음 깊숙한 곳에 남겨둔 사랑을 기억하는 영화다.
뮤지컬 <번지점프를 하다>는 그 기억을 무대 위에 아련히 새겨 넣는다.
마음 깊숙이 남겨둔 사랑
결코 잊을 수 없는 사랑이 있다. 그 사랑의 기억은 한 사람의 삶에 온전히 스며들어 몸과 마음을 지배한다.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는 이토록 절대적인 사랑을 마주한 남자의 이야기다. 비 내리는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의 우산 속으로 한 여자가 뛰어든 순간부터 남자의 심장은 오로지 여자를 향해 뛰기 시작한다. 거창하거나 특별한 고백은 없다. 그저 여자의 운동화 끈을 메어주고 새끼 손가락에 마법을 걸었다며 싱거운 말을 던지고 도망가는 게 전부일 뿐, 남자의 사랑은 그렇게 낭만과 순정으로 가득하다. 서툴고 수줍은 남자의 사랑은 여자의 마음을 움직이고 둘은 노을이 내려 앉은 해변가에서 왈츠를 추는 아름다운 풍경을 완성한다. 하지만 영원할 것만 같던 연인은 예상치 못한 이별을 맞이한다. 보통의 멜로드라마에선 그렇게 이야기가 끝나기 마련이다. 하지만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는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예상치 못한 인연을 새로이 끄집어 낸다. 세월이 흘러 교사가 된 남자 앞에 기적처럼 옛 연인이 등장하도록, 그것도 17살 앳된 얼굴을 한 자신의 제자로 말이다.
‘운명이 갈라놓은 연인’의 서사는 익숙하다.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는 그 익숙한 문법에 낯선 상상력과 애틋한 향수를 더한다. 다른 얼굴을 한 옛 연인의 등장, 쉽사리 믿을 수 없는 운명적 재회에 남자는 연인의 손을 쉽게 부여잡을 수도 그렇다고 놓아버릴 수도 없다. 그 안타깝고 서글픈 운명의 장난은 납득하기 힘든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관객의 마음을 움직였다. “나는 한 사람만 사랑해.”라는 절실한 고백과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절대적 믿음은 개봉한지 20여 년이 지난 지금에까지 이 영화를 기억하게 하는 힘이다. 그래서 뮤지컬 <번지점프를 하다>의 제작 소식이 전해졌을 때 기대보다 우려가 더 컸던 건 예견된 순서였다. 그러나 뮤지컬 <번지점프를 하다>는 마음 깊숙이 남겨둔 사랑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는데 성공한다. 극장에 슬픈 왈츠가 울려 퍼지는 순간부터 이 영화를 마음에 오래 품어온 이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무대로 이어진 인연의 끈
뮤지컬 <번지점프를 하다>는 무대를 통해 작품이 품은 ‘인연’을 이야기한다. 때때로 무대를 길게 가로지르거나 어긋나게 배치된 분필 선의 등장은 영화를 대표하는 장면을 효과적으로 무대에 풀어 놓는다. 특히 영화에서 남자가 칠판에 분필로 선 하나를 그어 넣으며 “지구상 어느 한 곳에 바늘 하나를 꽂고 저 하늘 꼭대기에서 밀씨를 하나 떨어뜨려 그 밀씨가 나풀나풀 떨어져 그 바늘 위에 딱 꽂힐 확률, 그 계산도 안 되는 기가 막힐 확률로 만난 인연”을 말하던 장면은 이러한 무대 연출과 어우러져 영화가 전했던 인연을 상기시킨다. 과거와 현재가 교차되는 순간의 선의 활용과 좌우 상하 파티션을 활용해 공간을 분할하는 연출은 마치 카메라의 줌-아웃처럼 느껴져 자연스레 영화를 연상하게 한다.
영화와 달리 시공간을 교차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해가지만, 거미줄처럼 엉켜버린 과거와 현재를 이질감 없이 무대 위에 녹여낸다. 비 내리는 버스 정류장, 낭만이 넘치는 캠퍼스, 이별을 마주한 기차역의 등장은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의 정서를 환기시키기에 충분하다. 여기에 여자의 얼굴을 새겨 넣은 라이터, 끈이 풀린 운동화, 왈츠 벨소리의 핸드폰, 이인삼각의 끈처럼 영화가 관객의 마음에 아로새긴 물건들을 무대로 옮긴 것 또한 뮤지컬 <번지점프를 하다>의 영리한 선택이다. 설레고, 기쁘고, 불안하고, 슬픈 인물의 감정을 쫓는 조명의 쓰임 또한 탄탄하게 극을 받쳐준다. 무대 위에 ‘빛’과 ‘선’의 문법으로 영화의 정서를 번역한 것이다.
사랑을 기억하는 멜로디
뮤지컬 <번지점프를 하다>는 영화가 전한 정서를 무대 위에 영리하게 설계한 작품이다. 그리고 그 설계의 단단한 축이 되는 건 단연 음악이다.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를 상징하는 장면 중 하나인 해변가 왈츠 신은 쇼스타코비치 재즈 모음곡 2번(Jazz Suite No.2)을 사용해 깊은 감정의 울림을 전한바 있다. 그런데 뮤지컬 <번지점프를 하다>의 작곡가 윌 애런슨은 그 울림을 넘어선 새로운 왈츠를 작곡해낸다. 이 한 곡으로 대변되는 찰나의 감정은 이루어질 수 없는 첫사랑의 아련함 그 자체다. 윌 애런슨의 작곡 뿐만 아니라 작사가 박천휴가 쓴 가사의 힘도 인물의 정서에 설득력을 더한다. 여자가 남자에게 “내가 세상에 오기 전부터 여길 맴돌던 바람의 노래”를 들은 적 있냐 물으며 “수없이 많은 낮과 밤”을 노래하는 ‘혹시 들은 적 있니’를 비롯해서 “만약에 추운 바람이 우리를 괴롭혀도 서로를 꼭 안아줄 이유일 뿐이야.”라며 연인의 영원한 사랑을 노래하는 ‘그게 나의 전부인 걸’은 영화의 대사로 미처 다 전하지 못한 간절하고 솔직한 마음을 가사로 전한다.
박천휴와 윌 애런슨 콤비는 작품이 품은 서정을 멜로디에 배치한 것은 물론 품위 있는 언어로 가사를 완성해낸다. 이 둘이 완성한 음악은 <번지점프를 하다>를 영화가 아닌 뮤지컬로서 기억하게 만든다. 한국 창작 뮤지컬에서 작품으로부터 독립되어 오직 ‘뮤지컬 넘버’로 승부를 띄울 수 있는 음악을 만났다는 건 큰 수확이자 기쁨이다. 이토록 아름다운 음악이 오케스트라 연주와 함께 ‘빛’과 ‘선’이 새겨진 무대에 젖어 드는 풍경은 결코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을 진심으로 응원하게 만든다. <번지점프를 하다>가 많은 이들의 마음에 담겨 있는 건 누구에게나 절실한 사랑을 향한 통증의 흉터가 남아있는 탓이다. 뮤지컬 <번지점프를 하다>는 그 사랑을 기억하는 새로운 방법을 제시한다. 영원하고 완전한 사랑을 향해 마지막 선택을 하는 연인의 뒷모습은 그래서 슬프지만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