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적 집사의 눈으로 본 뮤지컬 〈캣츠〉
글. 조용신(뮤지컬 감독)
나는 고양이를 기른다. (X)
나와 고양이는 함께 산다. (△)
고양이는 나를 집사로 선택해서 살아준다. (O)
그러하다. 나는 고양이들과 함께 같은 공간에서 매일매일을 살아가는 억세게 운 좋은 인간이다. 게다가 한 마리가 아니라 세 마리이다. 깜이, 도리안, 지오. 이들은 각기 품종도 다른 남남이지만 비슷한 시기 에 우리 집에 와서 이제 10년이 넘는 시간을 동거동락했다. 수명이 15년 남짓이라는 고양이들의 전체 생의 대부분을 함께 하고 있기에, 비록 말은 통하지 않지만 그 습성과 버릇들로 유추해서 그들이 원하는 것을 파악하며 그렇게 집사로서 소임을 다하고 있는 중이다.
고양이를 모시고 살다보니 고양이가 인간과 잘살고 있는 나라는 왠지 선진국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나라도 과거에 비하면 고양이를 사랑하는 사람이 점점 늘어나고 있지만, 영국은 37년 전인 1981년 고양이 캐릭터들만 출연하는 뮤지컬 <캣츠>를 만들어 전 세계에서 공연 중인 놀랍도록 마법 같은 고양이 친화적인 나라다.
뮤지컬 <캣츠>를 처음 보았을 때 두 번 놀랐다. 먼저 고양이의 독립적인 정체성을 의인화하고 그 습성을 캐릭터화한 T.S.엘리엇의 원작 시(Old Possum’s Book of Practical Cats)가 존재한다는 것에 놀랐고, 그 식구들을 유려한 음악과 춤, 노래 등 무대언어로 합체해 화려한 쇼뮤지컬로 만들었다는 사실에 또 놀랐다. 뮤지컬 무대에 실제 고양이가 출연하는 것은 아니므로 이 작품은 고양이 집단을 통해 우화로서 인간의 이야기를 우회적으로 들려주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리고 실제 고양이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나에게 <캣츠>의 다양한 캐릭터들은 진짜 고양이들만큼이나 사랑스럽다.
<캣츠> 고양이들 Vs. 현실 고양이들
소년 마법사 미스토펠리스와 악당 고양이 매캐비티
뮤지컬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인 캐릭터라고 생각하는 미스터 미스토펠리스(Mr. Mistoffelees)부터 이야기해보자. 잘 알려졌다시피 작품 후반부에 위기에 빠진 고양이 세상 ‘젤리클’을 구해내는 미스토팰리스는 소년 마법사다. 파우스트에 등장하는 낭만적인 악마 메피스토펠레스(Mephistopheles)에서 이름을 따온 것은 애교라고 치자. 고양이의 놀라운 활강 실력과 균형 감각은 그가 무대에서 벌이는 엄청난 댄스 실력으로 발현된다. 사실 무대에 등장하는 모든 고양이의 움직임이 실제 고양이의 몸짓에 근거한 춤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미스토펠리스는 아크로바틱과 발레를 자유자재로 소화하며 이 작품 전체를 통틀어 가장 고난도 안무인 푸에테 턴을 24회 이상 해낸다. 원작 시에서 그는 올블랙 고양이지만 뮤지컬 제작진은 무대에서 보다 시각적으로 강렬한 효과를 주기 위해 흑백 조화를 이룬 턱시도 고양이로 설정했다. 신사의 나라 영국에서는 고양이의 가슴에 소복한 하얀 털이 내려앉은 모양을 마치 턱시도를 입은 듯(특히 절도 있고 멋진 남자의 상징처럼) 받아들여 턱시도 고양이라고 부른다. 우리 집의 첫째 깜이가 바로 턱시도 고양이라서 비교하며 보게 되는데, 사실 우리 깜이는 2008년 한국 <캣츠> 공연 당시 그리자벨라 역을 했던 가수 인순이와 투 샷으로 뮤지컬 잡지 표지 모델로 등장한 적도 있다는 자랑을 잠시 하고 가는 바이다.
미스터 미스토펠리스가 영웅이라면 그 반대편의 악역은 젤리클 볼, 즉 젤리클 파티에 갑자기 난입한 악당 고양이 매캐비티(Macavity)다. 그의 외관을 묘사한 모습을 볼 것 같으면 마치 흥부전에서 놀부를 소개하는 것 같다. 오렌지 계열의 원색 털 무늬가 주변을 혼란스럽게 하고, 푹 들어간 눈은 전형적인 악역 캐릭터의 모습이어서 보는 이를 긴장하게 만든다. 뱀처럼 좌우로 흔들어대는 머리는 약에 취해 사는 것 같은 말썽쟁이의 전형을 보여준다. 마치 거칠고 넓은 영역을 커버하는 동네 일진 길고양이의 모습이다. 이렇게 다양한 색이 섞인 고양이를 카오스 고양이라고 하는데, 사실 카오스의 매력에 한 번 빠지면 헤어 나올 길이 없다고 할 정도로 매력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지만, 엘리엇의 시에서도 악당으로 묘사될 만큼 인간 사회에서는 검은 고양이보다도 더 인기가 없어 안타까운 옷을 입은 고양이라고 하겠다.
나이든 암고양이 그리자벨라
<캣츠>에서 가장 유명한 캐릭터이자 대표곡 ‘메모리’를 부르는 여주인공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을 것 같다. 바로 나이든 암고양이 그리자벨라(Grizabella)다. 그녀의 이름은 영어의 잿빛(grizzle)과 불어의 아름다운 여인(Belle)을 의도적으로 합성함으로써, 한때는 화려했지만 현재는 남루하고 덧없는 인생을 살지만 여전히 새로운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삶의 아름다움을 일깨워준다. 늙고 지친 잿빛의 무대 의상은 그리자벨라가 길을 떠돌며 육체적으로는 노쇠하고 정신적으로는 지나온 시절에 대한 회한을 가지고 있는 무거운 캐릭터임을 보여준다. 아마도 원래의 털 색깔은 흰색 또는 밝은 계열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스스로 선택한 떠돌이 생활로 안해 잿빛으로 변해버린 상황임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사실 주변에서 이렇듯 인간을 경계하며 윤기 없는 털을 가지고 하루하루 힘겹게 살고 있는 길고양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하지만 그들도 한때는 어미의 그루밍을 받고 젖을 물고 재롱을 피우던 귀여운 아기 고양이였으리라. 그리자벨라는 많은 사람들에게 특유의 사랑스러움으로 큰 기쁨을 준 예술가였을 수도 있기에 작품 말미에 새로운 묘생을 찾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게 된다. 그리고 사실 고양이는 갓 태어난 고양이는 물론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여전한 호기심과 놀라운 사랑스러움을 간직한 존재이기에 다시 태어나는 그리자벨라를 더욱 더 응원하게 된다.
사회자 고양이 멍커스트랩과 뚱냥이들
고양이 중에 가장 흔한 종류 중의 하나는 마치 발라놓은 고등어 뼈처럼 줄이 그어진 고등어태비다. 작품에서는 젤리클 리더이자 사회자 고양이인 멍커스트랩(Munkustrap)이 있다. 아마도 실제로 주변에서 가장 일반적이고 친숙한 종류가 고양이를 대표함으로서 고양이 사회 젤리클의 통합 메시지를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캣츠>가 고양이 세계를 너무도 리얼하게 다룬 부분이 또 있는데 바로 ‘비만 고양이(뚱냥이)’가 꽤 많이 나온다는 것이다. 현실에서 뚱냥이는 집에서 과식을 많이 했거나 혹은 길고양이로 살면서 나트륨 과다 섭취로 붓기가 빠지지 않는 경우 등이 있다. 후자에 못지않게 전자도 안타깝지만, 잘 먹어서 비만이 되었다니 왠지 웃음이 난다. 뚱냥이 집사들에게는 ‘고양이 확대범’이라는 애칭(?)이 있을 정도로, 타고난 식탐 때문에 사료와 간식을 쉬이 먹다보면 비만에 금세 도달하는 고양이가 많다. 하지만 간식 앞에서 동그란 눈을 더욱 동그랗게 뜨고 한껏 기뻐하는 모습은 어마무시한 중독성을 가진다. <캣츠>에서는 뚱냥이 세 마리가 나온다. 푸짐한 몸매의 중년 여성을 연상시키면서 탭댄스를 잘 추는 제니 애니 도츠(Jenny Annie Dots), 선지자 고양이 올드 듀터로노미(Old Deuteronomy), 그리고 미식가 출신이라 살찌는 것이 당연한 듯 보이는 버스토퍼 존스(Bustopher Jones)다. 물론 세 캐릭터 모두 중년이라서 전반적으로 나잇살을 뚱냥이로 표현한 것 같지만 배우 출신의 극장 고양이 거스(Gus)가 노년의 모습에도 마른 몸매인걸 보면 예외는 있다. 사실 우리집 둘째 도리안도 한때는 절세미남이었지만 지금은 자의반 타의반 많이 확대가 되어 있기에 남의 일 같지가 않다.
섹시한 고양이 럼텀터거와 카산드라,
좀도둑 몽고제리와 럼플티저
평소 날렵하여 쥐 사냥도 잘하고 이성에게 유혹도 많이 받을 것 같은, 몸매부터 말투까지 섹시한 고양이도 많다. 수컷 중에서는 럼텀터거(Rum Tum Tugger)가 대표적이다. 목 주변의 커다란 갈기가 트레이드 마크인데,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사자 같은 고양이 룩을 보여준다. 사실 럼텀터거는 멍커스트랩과 형제로서 올드 듀터로노미의 아들이라는 사실. 단일 품종은 아닌 모양이다. (어머님이 누구니?) 암컷 중에서는 카산드라(Cassandra)가 날렵한 몸매의 샴 고양이로, 의상도 유일하게 털이 없어 무대에서 배우의 몸매가 도드라진다. 그 외에도 활기찬 걸그룹 멤버 같은 이미지의 봄벨루리나(Bombelurina)와 그녀의 단짝 드미터(Demeter)의 매력은 얼굴도 예쁘고 몸은 스트레칭을 하면 한없이 늘어나 10등신 이상은 기본으로 가는 고양이를 닮았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부부 좀도둑단 몽고제리와 럼플티저(Mungojerrie & Rumpelteazer)가 있다. 몽고제리는 수컷이며 럼플티저는 암컷이다. 둘 다 무늬는 흔한 세 가지 색인데, 고양이에게 삼색은 흰색, 검은색, 갈색을 말한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현실에서의 삼색태비(세 가지 색의 얼룩무늬 고양이)는 99.9%가 암컷이라는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몽고제리가 과연 수컷이 맞는지 의심해볼 합리적인 이유가 있다. (혹시 게이가 아닌지. 만약 진짜 수컷이라면 행운의 네잎클로버 같은 존재!) 우리집에 함께 사는 셋째 지오가 같은 삼색태비로서 ‘시베리아 암컷 호랑이’라는 별명을 가질 정도인데, 인간의 식탁에서 음식을 강탈하려 애쓰고 집안의 도자기류를 자주 밀쳐 깨트리는 등 만성적인 말썽을 피우고 있다는 점이 럼플티저와 꼭 닮았다.
전지적 고양이 무대 언어의 완성
<캣츠>는 마치 오페라처럼 대사가 노래인 성스루(Sung-through) 뮤지컬이다. 그래서 무대에서 음악이 거의 끊이지 않는데, 음악과 함께 행동하고 움직이는 고양이의 습성을 표현하는 것은 바로 1981년 런던 초연부터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는 질리안 린의 빼어난 안무다. 원작 시에 등장하는 각 고양이의 특징은 질리안 린이 만들어낸 각각의 동작에 담겼다. 또한 무대 역시 ‘걸리버 여행기’의 대인국을 연상시키는 듯, 고양이의 시선에서 세상을 볼 수 있게 해준다. 인간의 커다란 쓰레기 집하장의 폐타이어가 젤리클 길고양이에게 삶의 터전이 되어주고, 배우들은 이 장애물 사이를 날렵하게 이동하면서도 바닥에서는 네 발로 살금살금 걷기도 하면서 고양이다운 발걸음을 표현한다. 오케스트라 피트와 객석 사이의 분리벽을 없앤 자리에는 램프 경사면이 있어서 고양이들이 쉽게 객석에서 관객을 만날 수 있다. 공연 시작 전과 인터미션 때 2층과 3층까지도 올라가 어둠 속에 불을 번득이며 살금살금 다가가 관객을 놀라게 하는 앙상블 고양이의 귀여운 행동은 마치 현실에서 유유히 걷는 귀여운 길고양이를 조우하며 심장 폭행을 당하는 애묘인에게 주는 선물과도 같다. 독일에서는 고양이 집사를 ‘캔따개’라고 한다는데, 서울의 이 캔따개도 열심히 캔사냥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