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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을 보면서 나이 들기

공연을 보면서 나이 들기

글. 최기숙(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교수, 문학박사)

공연을 본다는 것은 최초의 실마리가 된 하나의 아이디어가 어떻게 사람과 시간, 공간과 물질을 만나 한 편의 드라마가 되는지의 과정 전체를 경험하는 것이다.
공연을 보면서 나이 들기란 그런 경험으로 충만하게 자신을 채우고 또 비우는 연습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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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는 한, 서울에서 한국의 전통과 현대가 가장 조화롭게 어우러진 곳은 광화문이다. 그곳은 한국의 일상을 지탱하는 일터가 집중된 노동의 현장이며, 지적이고 예술적인 실험이 공유되는 문화예술의 공간이기도 하다. 현대사의 격변을 몸으로 통과한 역사의 상징이자, 집단 감성이 꿈틀거리는 정치적 장소이기도 하다. 많은 사람이 어디론가 가기 위해 지나가고, 목적 없이 머무 르는 시간의 교차로이기도 한 그곳에는 어릴 적부터 좋아한 서점이 있고, 항상 적정 체격을 유지해 볼 때마다 감탄을 자아내는 이순신장군 동상도 있다. 예쁜 조명으로 장식된 광화문 밤거리를 지날 때면, 고요히 활기가 생기고 문득 위로받기도 한다. 세종문화회관이 거기에 있다. 익숙하고 만만한 것은 그곳에 오르는 계단이다 (서울의 대규모 공연장들은 대개 ‘올라가는 곳’에 있거나 높은 데 있는 것 같다. 지형적인 이유만은 아닐 것이다. 모든 공간에는 문화적인 이유가 매개되기 때문이다). 계단은 상승을 겨냥한다. 상승의 이미지는 정치나 경제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이나 영혼의 정화와 고양을 추구할 때 비로소 공감할 만하다고 여기는 것은 순전히 개인적 성향일 것이다. 높은 곳에 있으면서도 겸손하게 자신의 가장 좋은 것을 공유하려 하면 좋지 않나, 생각하고 있다.
공연장에 갈 때마다 로비에서 서성이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일부러 손보지 않았지만 저절로 아름다운 자연주의 화단처럼 화사하다. 사람들은 예술을 즐기기에 격이 맞는 사람이 되려고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그것은 겉멋이나 허세가 아니라, 스스로에게 좋은 시간을 선물하려는 예의 바른 처신이다.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고, 책을 펴기 전 메모할 펜을 찾는 것과 유사하다. 사람의 어떤 행위가 문화 창조의 출발점이라면, 공연을 보면서 나이 든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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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하는 책의 장르 중에 ‘산티아고 순례기’가 있다. 멀고 낯선 길을 굳이 배낭을 메고 걸어간 사람들은 그 길의 끝에서 인생이 완전히 달라지는 기적을 만난 적은 없다고 했다. 그러나 그 과정은 충분히 기적적이었다고, 언젠가는 다시 그 길을 떠날 거라고 적었다.
그들이 고생중독자여서가 아니다. 그곳에는 기적이 아니어도 좋은 무엇이 있고, 그건 오랜 시간과 비용을 들여 걸어간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다. 그 느낌을 언어로 표현하기 어렵다고 했지만, 책을 읽은 사람은 처음부터 여정에 동참했기 때문에 어렴풋이나마 그게 무언지 알아차릴 수 있다. 그건 낯선 세계와 처음부터 새로 관계를 맺으려는 자의 첫 발걸음 떼기를 닮았다. 익숙한 일상의 관성에서 벗어나 아무 이해관계 없이 사람을 대하고, 경계 없는 대화를 나누는 시간. 대가 없이 도움을 주고받고, 잠시나마 선한 마음의 주인이 되는 경험. 자기를 놓아버렸을 때 자기가 생성되는 역설적 게임의 주인이 되는 것. 이 먼 길을 왜 걸어왔는지에 대한 답을 몸으로 맞닥뜨리는 느낌. 그것은 서로 다른 이유로 그곳을 걸어간 사람들이 공유하는 세계다. 순례자들은 그 문화의 수혜자인 동시에 창 조자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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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경험이 공연을 보는 사람과 만들고 기획하며 실제로 하는 사람들이 교감하는 과정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공연을 본다는 것은 최초의 실마리가 된 하나의 아이디어가 어떻게 사람과 시간, 공간과 물질을 만나 한 편의 드라마가 되는지의 과정 전체를 경험하는 것이다. 그것은 잘 짜인 콘티에 맞춘 반복 재생이 아니라, 파도처럼 움직이며 흘러가는 생명의 어울림이자 충돌이며 놀이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순간, 관객은 자유자재하게 객석과 무대와 그 뒤까지의 시간까지도 즐길 수 있다. 공연을 관람하는 것은 단지 눈앞에 현재하는 순간의 탐닉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장면에 응축된 과정의 시간성을 알아차리고 공감하는, 몸으로의 체험이기 때문이다.

공연을 보면서 나이 들기란 그런 경험으로 충만하게 자신을 채우고 또 비우는 연습이 아닐까. 그래서 공연장 로비에 꽃처럼 피어 있던 그 사람은 공연을 매개로 자신이 찾고 싶은 마음과 감정, 생각과 아이디어에 접속하면서, 자신이 언제까지나 아름다운 인간이 되려 하고, 또 가치를 찾는데 성의를 바칠 것을 주저하지 않는 사람임을 확인하는 것으로, 자기 앞의 시간을 다시 걸어갈 힘을 얻는 것이다. 공연을 보고 난 뒤 감동과 설렘으로 한껏 부푼, 사람 정원에 핀 한 송이 꽃이 된 자신과 만나기 위해, 그 계단을 올라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