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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리 게르기예프 러시아 문화예술계의 차르가 불러일으킨 변화들

발레리 게르기예프
러시아 문화예술계의 차르가
불러일으킨 변화들

글. 장지영(<국민일보> 기자, 공연칼럼니스트)

“그를 수식하는 표현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러시아 음악계의 차르(황제)’다.
마린스키 극장의 예술감독이자 총감독인 그는 그동안 러시아 클래식 오페라 발레 등 문화예술계에 큰 변화를 일으켜 왔다.”

게르기예프

게르기예프

박원순 서울시장이 최근 러시아 방문 중 지휘자 발레리 게르기예프(64) 상트페테르부르크 마린스키 극장 총감독을 ‘서울 글로벌 대사’로 임명했다. 서울 글로벌 대사는 서울시가 최근 신설한 제도로, 게르기예프는 앞으로 문화예술 분야에 대한 자문 역할을 맡게 된다. 국내에서도 명성이 높은 게르기예프는 세계 클래식계에서 손꼽히는 거장 가운데 한 명이다. 1988년부터 러시아 문화예술의 자존심과 같은 상트페테르부르크 마린스키 극장을 이끌어 왔다. 일부에선 그를 과대평가된 지휘자로 꼽기도 하지만 적어도 러시아 레퍼토리에 대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해석력을 보여준다. 특히 전 세계에서 러시아 음악을 인기 있는 레퍼토리로 만든 것은 그의 가장 위대한 공적이다.
그를 수식하는 표현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러시아 음악계의 차르(황제)’다. 그가 러시아 출신 최고 클래식 스타이기도 하지만 러시아 절대 권력자인 블라디미르 푸틴(63) 대통령의 최측근으로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기 때문일 것이다. 마린스키 극장의 예술감독이자 총감독인 그는 그동안 러시아 클래식 오페라 발레 등 문화예술계에 큰 변화를 일으켜 왔다.

43세의 게르기예프, 전권을 가진 마린스키 극장 총감독이 되다

마린스키극장 제1관(본관)

마린스키극장 제1관(본관)

게르기예프는 1953년 러시아 수도인 모스크바에서 오세티아 출신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주류 슬라브인이 아니라 소수민족 중 하나인 오세티아인이다. 어린 시절 북오세티아 자치공화국의 본거지인 코카서스에서 유년기를 보낸 그는 레닌그라드(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서 공부했다. 23살 때인 1976년 소련 지휘 콩쿠르와 이듬해 카라얀 지휘 콩쿠르에서 우승한 뒤 1978년 키로프 오페라(현재 마린스키 오페라) 부지휘자로 커리어를 본격 시작했다. 능력을 인정받은 그는 1988년 35세의 나이에 키로프 오페라 및 오케스트라의 예술감독으로 뽑혔고, 1996년에는 러시아 정부로부터 마린스키 극장(1992년 제정 러시아 시대의 옛 이름으로 변경)의 전권을 휘두를 수 있는 총감독으로 임명됐다.
그는 1980~90년대 개방과 자유화 물결 그리고 구소련의 붕괴 등 혼란 속에서 마린스키 극장을 굳건히 지켰다. 무소르그스키, 차이코프스키, 림스키-코 르사코프, 쇼스타코비치, 프로코피예프 등 러시아 작곡가들의 오페라들이 이 시기에 마린스키 극장의 주요 레퍼토리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구미의 주요 오케스트라와 오페라에 초청된 그는 이런 러시아 작품들을 적극적으로 알렸다. 과감히 철의 장막을 거두고 해외 단체 및 예술가들과 적극적인 교류를 통해 극장의 명성을 새롭게 확립한 것도 그의 성과 가운데 하나다. 바그너의 〈파르지팔〉 등을 비롯해 적지 않은 작품이 러시아에서 초연됐다.

그가 푸틴 대통령과 가까워진 것도 이때다. 러시아 정보기관 KGB 출신으로 독일에서 베를린 장벽 붕괴를 목격한 푸틴은 1990년 고향인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돌아왔다. 시장 자문역으로 출발한 푸틴은 상트페테르부르크 대외협력위원회 의장 등을 거쳐 1996년 모스크바의 중앙 정계로 진출했다. 당시 보리스 옐친 대통령에 의해 대통령 총무실 부실장에 임명된 푸틴은 1998년 연방정보국(FSB) 국장에 임명되면서 사실상 권력의 중심에 서기 시작했다. 1999년 총리가 된지 몇 달 만에 건강 문제로 물러난 옐친을 대신해 대통령 권한대행이 됐고, 이듬해 선거에서 대통령이 됐다.
과거와 비교해 상대적으로 정치적 안정과 경제 활성화를 이뤄낸 푸틴은 문화예술 지원에 적극 나섰다. 특히 고향인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마린스키 극장을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그리고 게르기예프는 푸틴에 대한 지지를 감추지 않았다. 2008년 남오세티아를 둘러싼 러시아와 그루지아의 전쟁 직후 마린스키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공연을 갔는데, 러시아의 그루지아 침공을 비판하는 서구에 맞서 푸틴의 입장을 대변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2012년 푸틴의 3번째 대선 출마 때는 TV에서 지지 연설을 했다.
지난 2013년 러시아가 반(反)동성애법을 제정한 직후 그가 지휘를 맡은 유럽과 미국의 공연장에는 동성애 단체와 인권 단체의 시위가 잇따랐다. 일반 대중 사이에 ‘푸틴=게르기예프’라는 인식이 퍼졌기 때문이다. 실제로 2014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남부 크림반도 침공 및 합병에 대해 그는 문화예술계 인사 19명과 함께 지지 성명을 발표하고 서방세계의 간섭을 비판하는 의견을 내기도 했다.

푸틴의 ‘강한 러시아’, 문화예술계를 이끌다

마린스키극장 제2관(신관)

마린스키극장 제2관(신관)

어쨌든 푸틴의 강력한 후원 아래 그는 러시아 문화예술계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기존의 마린스키 극장(본관) 내부를 개보수하는 것은 물론 지난 2006년 콘서트홀, 2013년 오페라와 발레에 맞는 제2관(신관)을 신축했다. 수천억 원이 투입된 마린스키 극장 개조 및 신축은 그와 푸틴과의 남다른 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분석이 많다.
그는 1993년 부활한 상트페테르부르크 백야 축제의 핵심 프로그램으로 전 세계 오페라·발레·클래식 스타들이 총출동하는 ‘백야의 별들’의 예술감독을 맡고 있다. ‘백야의 별들’ 5~7월 열리는 백야 축제 동안 마린스키 극장과 콘서트홀에서 거의 매일 공연이 열린다. 원래 상트페테르부르크 시장의 아이디어에서 시작됐지만 게르기예프가 참여함으로써 세계적인 축제가 될 수 있었다. 높은 인기를 자랑하는 ‘백야의 별들’은 매년 티켓 구하기 전쟁을 일으키고 있다.
게르기예프는 또한 2011년부터 ‘세계 3대 콩쿠르’인 차이콥스키 콩쿠르의 위원장을 역임하고 있다. 그의 참여 이후 차이콥스키 콩쿠르는 심사위원 구성과 투표 시스템을 개선하는 한편 우승자에 대한 지원을 늘리는 등 위상을 한층 강화했다.

나아가 그는 푸틴의 정책을 문화예술 차원에서 적극 구현하는데 앞장섰다. 2014년 푸틴은 소치동계올림픽 개·폐막식을 통해 러시아의 위대한 문화예술을 과시함으로써 ‘강한 러시아’의 이미지를 세계에 알리고 싶어 했다. 개·폐막식에는 클래식 오페라 발레 분야의 유명 단체와 스타 아티스트들이 총출동, 소치올림픽 주경기장을 거대한 공연장으로 바꿔놓았다. 소프라노 안나 네트렙코, 발레리나 스베틀라나 자하로바와 디아나 비쉬노바, 비올리스트 유리 바슈메트, 피아니스트 데니스 마추예프 등 세계적인 아티스트들의 중심에는 바로 그가 있었다.
그는 또 지난 2015년 러시아 극동의 거점 도시 블라디보스토크의 최신 공연장 ‘프리모르스키 스테이지(연해주 무대)’를 마린스키 극장이 관할하는 ‘마린스키 극장 프리모르스키 스테이지’로 바꾸는 것을 주도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마린스키 극장에서 공연되는 작품들 중 일부는 이곳 무대에 다시 오르고 있다. 그리고 지난해 7월 말부터 8월 중순 이곳에서 ‘극동 페스티벌’을 시작해 올해 2회가 열린다. 극동 페스티벌은 러시아 아티스트와 함께 한국 중국 일본 등 아시아 아티스트들을 대거 초청한 것이 특징이다. 이는 푸틴 대통령이 최근 전력을 기울이고 있는 극동 지역 개발 정책에 문화예술적으로 발맞추기 위해서다.

마린스키 발레단의 부활, 파문을 일으키다

게르기예프

게르기예프

한편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는 오페라와 클래식 분야 이상으로 발레에 큰 변화를 초래했다. 이와 관련해 미국 월스트리트저널은 2011년 마린스키 발레단에 대해 ‘지휘자의 발레단’이라는 기사를 썼을 정도다. 다만 호평이 주류인 오페라와 클래식에서와 달리 발레에서는 논란이 있다. 그동안 일부 무용 전문가들 사이에는 게르기예프가 위대한 마린스키 발레의 전통을 부순다는 말이 나왔을 정도다.
러시아 작곡가들의 오페라를 다시 부활시킨 것처럼 그는 발레에서도 러시아 안무가들의 발레를 복원 또는 재안무해서 다시 무대에 올리도록 했다. 구소련이 발레를 인민계몽의 수단이자 서방에 대한 선전도구로서 활용한 만큼 적극 지원한 덕분에 많은 작품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이들 중에는 제작비와 사상성 등 여러 이유로 한두 번 공연된 후 무대에 사라진 경우가 적지 않았다. 게르기예프 덕분에 〈스파르타쿠스〉, 〈이반과 곱사등이 망아지〉 등 적지 않은 작품들이 새로운 생명력을 얻었다. 게르기예프는 이들 작품이 새로 공연될 때 작곡가의 입장에서 작품 해석에 관여하는 한편 초연 공연 지휘를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스파르타쿠스(Spartacus)

스파르타쿠스(Spartacus)

예를 들어 〈스파르타쿠스〉는 우리나라에선 유리 그리가로비치가 1967년 안무한 볼쇼이 발레단 버전으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아람 하차투리안의 음악을 가지고 처음으로 〈스파르타쿠스〉를 안무한 사람은 1956년 레오니드 야콥슨이었다. 당대 최고 안무가였던 야콥슨이 키로프 발레단에서 선보인 〈스파르타쿠스〉는 로마의 건축물과 조각상을 재현한 초호화판 무대를 만드는 등 엄청난 제작비를 들인 것으로 유명하다. 초연 당시 관객의 환호를 이끌어냈지만 이후 재공연 되지 못했다. 그 후 유리 그리가로비치의 버전이 세계적 명성을 얻으면서 잊혀졌던 야콥슨의 〈스파르타쿠스〉는 2010년 복원돼 마린스키 발레단의 인기 레퍼토리가 됐다.
또 〈이반과 곱사등이 망아지〉는 1960년 로디온 쉐드린이 작곡한 음악을 가지고 알렉산드르 라둔스키가 볼쇼이 발레단에서 안무했다. 초연 당시 음악은 호평을 받았지만 안무는 그다지 좋은 반응을 얻지 못했다. 이 작품은 2009년 마린스키 발레단에서 알렉세이 라트만스키가 쉐드린의 음악으로 재안무 하면서 부활됐다.
이렇게 다시 만든 작품이 모두 성공적이진 않았지만 마린스키 발레단의 레퍼토리를 어느 때보다 풍성하게 만든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2000년대 중반 발레 전문가들은 게르기예프가 발레단을 ‘캐시 카우’로 생각한 탓에 몸이 생명인 무용수들을 혹사한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실제로 2000년대 중반 적지 않은 무용수들이 마린스키 발레단을 떠나 유럽 발레단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반과 곱사등이 망아지(The Little Humpbacked Horse)

이반과 곱사등이 망아지(The Little Humpbacked Horse)

한편 게르기예프는 마린스키 발레단 부설 발레 학교인 바가노바 발레 아카데미(이하 바가노바)도 강력하게 관할하기 시작했다. 2013년 그가 바가노바 교장으로 볼쇼이 발레단 수석무용수 출신인 니콜라이 치스카리제를 임명한 것은 큰 파문을 일으켰다. 최근 은퇴를 선언한 마린스키 발레단 수석무용수 울리아나 로파트키나를 예술감독으로 동시에 임명했다곤 하지만 바가노바 메소드를 배운 적 없는 치스카리제의 등장은 유구한 전통의 붕괴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바가노바 관계자들은 지난해 또다시 충격을 받았다. 게르기예프가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 바가노바 분교를 연다고 발표했기 때문이다. 분교는 연해주는 물론 한국 중국 일본 등 아시아 학생들의 입학을 기대한다. 오는 8월 오디션을 치러 10~12세의 학생들을 우선 선발할 예정인데, 이들 학생들은 블라디보스토크 분교에 다니기 전에 1년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다닐 예정이다. 내년부터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바가노바의 스태프들이 일부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할 예정이다. 분교 설립 발표 당시 바가노바 내의 반대도 만만치 않았지만 게르기예프의 뜻은 꺾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