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무용과 낯섦에 대한 신선한 결합
서울시무용단 <더 토핑> 김진원 · 전진희 · 최태선 · 정지현 인터뷰
글. 김호경(월간 <객석> 객원기자)
서울시무용단이 올해에는 어떤 예술 재료를 ‘토핑’할지 궁금하다. 2015년부터 매년 열리고 있는 <더 토핑>은
한국 무용과 타 장르의 컬래버레이션에 초점을 둔 단원 창작 프로젝트다. 단원들의 창작욕을 돋움으로써 무용단 내 활력을 불어넣는 한편,
관객들에게는 한국 무용을 기반으로 한 신선한 기획을 선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호응을 얻고 있다.
지난해 단원 박수정과 배우 한예리가 함께 선보인 <지나가는 여인에게>는 2017 스페인 빌바오 액트 페스티벌에 초청되는 쾌거를 이루기도 했다.
올해 세 번째 무대는 서울시무용단의 총무 김진원, 수석 전진희·최태선, 부수석 정지현 등 중견 무용수 4인이 꾸민다.
각각 드로잉아트, 농악의 부포놀이, 판소리, 뮤지컬과의 협업으로 흥미로운 이야기를 선보인다.
〈TAXI〉 김진원
김진원은 서울시무용단이 <더 토핑>을 통해 ‘고유성’을 확립하길 바란다. 여러 분야의 뛰어난 예술가와 함께 시류를 읽어가면서도 청중과 소통할 수 있는 <더 토핑>으로 서울시무용단만의 선명한 색을 발하려 한다. 그런 의미에서 선보일 이번 작품의 제목은 〈TAXI〉다. 택시기사 철수의 시선으로 바라본 현대 사회를 그린다. 1장-낚시터, 2장-주행, 3장-빈 차, 4장- 총알택시, 5장-사납금 스토리를 통해 현 사회 속 ‘울부짖음’을 표현한다.
“예술의 사회적 기능이 무엇일까 고민하다 보니, 시대를 비판하기도, 방향성을 제시하기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택시’는 현 사회의 단면을 보여줄 수 있는 소재라고 생각해요. 실직한 철수가 빈 낚싯대만 바라보며 흘려보내는 시간, 운전대를 잡은 채 보내는 빡빡한 일상, 오지 않는 기회를 기다리는 군중 속 고독감, 위험을 강요하는 불합리한 사회 구조를 통해 지금 이 시대의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원망과 한탄의 감정, 격한 표현이나 고독한 움직임으로, 다소 거칠지만 진실한 무대를 선보일 예정입니다.”
〈TAXI〉에는 서울시무용단 소속 무용수 9인과 중국 에서 민족 무용·현대 무용을 공부한 중국인 무용수 임가희가 출연한다. 기존 무용 장르의 틀을 깬, 다양한 움직임이 한데 어우러지는 가운데 첼로 라이브 연주가 펼쳐진다.
“늘씬한 몸매의 팔다리가 긴 무용수가 선보이는 아름다운 몸짓은 이 작품에서는 보실 수 없을 겁니다. 민얼굴과 일상복 차림으로 무대에 서거나, 격정적인 움직임, 차오르는 숨과 함께 대사나 노래를 뱉어내기도 할 거예요. 안타까운 현실을 직시하는 과정을 통해 희망의 메시지를 전할 수 있을 거로 생각합니다.”
책임감과 도전의식이 깃든 김진원의 새로운 이야기가 궁금하다.
〈계집, 女〉 전진희
전진희는 농악대의 움직임에 따라 부드럽게, 요염하게, 또 쓸쓸하게 움직이는 부포에서 ‘여성성’을 발견했다. 이러한 영감에서 탄생한 작품이 바로 <계집, 女>이다.
“얼마 전 서울남산국악당에서 우도 농악 부포놀이 공연을 봤어요. 부포를 쓴 한 여성이 실루엣만 드러나는 연출 아래 고독한 감정을 훌륭하게 표현해내더군요. 감명받았죠. 민속 문화를 살펴보면 남녀를 상징하는 여러 장치가 있는데, 그중 부포는 여성을 상징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털 부포가 섬세하게, 때로는 역동적으로 흔들리는 모습이 여성의 삶과 닮아 있다고 생각했죠.”
젊은 여성이 결혼해 아내가 되고, 엄마로 살아가는 동안 점차 자아를 잃고 고독해져가는 내면 깊숙한 곳을 춤으로 드러낸다. 1장-말 없는 이름, 2장-여자여, 여자 女의 구성으로, 변한 것과 변하지 않은 것, 그 가운데 느껴지는 수만 가지 감정을 은유적으로 표현할 예정이다.
“젊은 여성 관객은 작품의 스토리를 통해 감흥을 느낄 것이고, 저처럼 삶의 다양한 경험을 거쳐 온 여성 관객이라면 그 속에서 여러 가지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남녀노소 어떤 관객이라도 무대 위 펼쳐지는 아름다운 선과 그것의 떨림을 통해 각기 다른 감동을 느끼실 수 있을 테니, 모두 와서 즐겨 주세요.”
〈여민도기〉 최태선
최태선의 신작 <여민도기>의 첫 장면은 최태선의 막내아들 최지호 군의 몸짓으로 펼쳐진다. 어린 세종 역의 지호 군은 백성을 비추는 따뜻한 빛 아래 서서 순수한 미소를 보여주는 것으로 이번 작품의 문을 연다.
<여민도기>는 최태선이 세종대왕의 ‘여민락’에서 모티브를 얻어 창작한 작품. 평생 백성의 안위를 살펴온 세종의 정신을 본받아 우주 만물에 고하는 제의(祭儀) 형식으로 펼친다. 1장-천의(天耳)는 사람의 눈빛을 포함하는 세상의 모든 빛을 상징하며, 2장-지희(地希)는 세상의 모든 소리, 3장- 인미(人微)는 진심 어린 마음을 드러낸다.
“아이가 태어난 지 50일쯤 되었을 때 뇌수막염 증상이 있어 수일 간 입원을 한 적이 있어요. 당시 저는 공연을 하기 위해 진도에 내려가야 했는데, 무심코 걷다 뽕할머니 당집을 발견하고는 그대로 엎드려 울다시피 기도를 올렸죠. 종교가 있던 것도 아니고, 뽕할머니가 누군지도 잘 모르지만, 하늘에 닿을 만큼 간절했던 것 같아요. 이후 평온한 삶의 감사함을 배웠고, 무언가 바라는 마음보다 늘 고마움의 마음을 가지고 살아왔죠. 관객들이 전통 예술의 아름다움과 함께 평안한 마음을 느끼시길 바라는 생각으로 이번 무대를 준비했습니다.”
이 작품은 지난 6월 4일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선보인 <여민무>의 확장판으로,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심청가> 이수자인 오단해, 버꾸춤 창시자이자 전 정동극장 예술감독을 역임한 천안 시립풍물단장 서한우 등이 참여한다.
“열네 살에 처음 무용을 시작해 38년간 쉼 없이 춤을 추어왔지만, 하면 할수록 더 어려운 것 같습니다. 잘 해내겠다는 욕심은 잠시 내려놓고, 제 이야기를 들어줄 관객이 있을 때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자는 생각이 들었어요. 서로를 존중하며 모두 한마음으로 잘 살기를 바라는, 거창하지만 진심 어린 제 마음을 무대를 통해 보여드릴 겁니다.”
〈다섯 가지 사랑 이야기〉 정지현
“사랑은 교통사고와도 같은 거래요. 슬쩍 스쳐 지나가면 훌훌 털어버릴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치명상을 당할 수도 있고, 누군가는 여러 번 겪지만, 다른 누군가는 살면서 한 번도 만나지 않을 수도 있죠. 운명처럼 찾아오고 떠나가는 다섯 가지 사랑 이야기를 통해 감정의 풍요로움을 느끼길 바라요.”
정지현의 <다섯 가지 사랑 이야기>는 2004년 오프브로드웨이에서 초연된 뮤지컬 <파이브 코스 러브>를 각색한 작품이다. 원작은 하나의 진실한 사랑을 다섯 가지 코스 요리에 비유한 옴니버스 형식으로, 국내에서는 2008년에 초연했다. 당시 한국 공연을 기획한 투헤븐엔터테인먼트의 대표이자 음악감독인 김동은이 이번 무대의 음악을 맡고, 두 명의 뮤지컬 배우가 출연해 무용수들과 호흡을 맞춘다. 미국, 이탈리아, 독일, 멕시코 등 각기 다른 배경에서 펼쳐지는 2시간가량의 원작을 한국의 상황에 맞게 압축·각색해 펼친다.
“뮤지컬과 무용은 종합 예술 장르라는 점에서 닮은 점이 많죠. 뮤지컬의 속도감, 대중성이라는 장점과 한국 무용 특유의 감수성을 더했어요. 이미 장르를 구분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시대이니, 경쾌한 이야기, 흥미로운 연출, 마음속에 일어나는 감정을 그대로 느끼면 될 것 같아요.”
정지현은 10여 년 전 서울시무용단 내 존재하던 단원 창작 시스템이 부활한 것을 고무적이라 평하며 <더 토핑>이 꾸준히 이어지기를 바란다. 날 선 감각을 지닌 예술 단체는 늘 생기가 넘치기 때문이다. 이들의 의미 있는 도전을 함께 지켜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