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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서와 <나부코>

예레미야서와 <나부코>

writer 김성현(<조선일보> 문화부 기자)

자식과 아내를 모두 잃고 작곡을 그만둘 생각까지 한 베르디. 그에게 재기의 발판이 된 오페라 <나부코>.
과연 이 오페라를 통해 어떻게 재기할 수 있었던 걸까?

작곡가 주세페 베르디'

작곡가 주세페 베르디

이탈리아의 오페라 작곡가 주세페 베르디(1813~1901)에게 인생은 ‘삼세판’이었다. 고향 부세토에서 종교 음악과 기악곡을 작곡하던 베르디가 밀라노 음악원 입학시험을 치른 것은 19세 때인 1832년이었다. 청운의 꿈을 품고 피아노 연주와 작곡시험을 보았지만, 결과는 보기 좋게 낙방이었다. 당시 음악원 입학 연령보다 네 살이나 나이가 많은 데다 피아노를 연주할 때 테크닉과 자세가 불안정하다는 지적 때문이었다. 그나마 베르디가 제출한 작품에 대해서 “천부적으로 카프리치오에 뛰어난 것 같으며 작곡가로서 전도유망하다”는 호평을 받은 것이 위안거리였다. 음악적으로든 인간적으로든 자수성가(自手成家)에 대한 자부심으로 가득했던 베르디는 이 낙방 소식을 평생 잊지 않았다. 훗날 밀라노 음악원이 베르디의 이름을 학교 명칭에 넣기 위해 요청했을 때, 베르디는 “젊은 나를 원하지 않았으니, 늙은 나를 가질 수 없다”는 말로 거절했다고 한다.
고향 부세토의 음악 학교 교사이자 지역 오케스트라 지휘자로 돌아온 그는 틈틈이 오페라를 써나갔다. 데뷔작인 <오베르토 백작>은 1839년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에서 15차례 공연됐다. 대성공은 아니었지만 상처받은 자존심을 달래기엔 충분했다.
하지만 이듬해 같은 극장에서 초연된 두 번째 오페라 <하루만의 임금님>은 참담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제목처럼 단 1차례 공연으로 끝난 것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베르디는 1838년 딸과 1839년 아들에 이어서 1840년 <하루만의 임금님> 초연 직전 아내마저 여의고 말았다. 세상에 홀로 남겨진 처지가 된 베르디는 작곡을 그만둘 생각마저 했다.

베르디의 연인이자 두 번째 부인인 주세피나 스트레포니

베르디의 연인이자 두 번째 부인인 주세피나 스트레포니

막다른 골목에 내몰렸던 베르디에게 재기의 발판이 된 세 번째 오페라가 <나부코>였다. 나부코는 기원전 6세기 유대 왕국의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히브리인들을 포로로 끌고 갔던 바빌론의 왕 네부카드네자르 2세(기원전 634~562)를 뜻한다. 구약 성서에서는 ‘느부갓네살’로 표기한다. 이탈리아 식으로는 ‘나부코도노소르 (Nabucodonosor)’가 되며, 이를 줄인 말이 ‘나부코’다.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40여 년간 바빌론 왕국을 통치하면서 고대 7대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바빌론의 공중 정원’을 세우고 주변 정복에 나섰던 패권주의적 군주로 평가받는다.
이 공중 정원은 오페라 <나부코>의 배경이기도 하다. 연이은 오페라의 실패에 낙담했던 베르디는 <나부코>의 대본을 건네받고서도 내심 시큰둥한 반응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히브리인 포로들이 바빌론의 유프라테스 강가에서 고향의 하늘을 바라보며 부르는 ‘가라 꿈이여, 금빛 날개를 타고’라는 구절이 그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꿈이여, 황금빛 날개를 타고 언덕 위로 날아가라. 훈훈하고 다정하던 바람과 향기롭던 나의 고향, 요단 강의 푸른 언덕과 시온 성이 우리를 반겨주네. 오 빼앗긴 위대한 내 조국, 가슴 속에 사무치네.”

가리발디 장군과 만나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가리발디 장군과 만나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오늘날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으로 불리는 그 곡이다. 삼세판의 마지막이었던 이 오페라는 1842년 3월 9일 초연 이후 그해 가을에만 57차례 공연됐다. 당시 라 스칼라 극장 최고 흥행 기록이었다. <나부코>의 성공 비결은 애국심이었다. 19세기 중반까지도 통일 국가를 이루지 못했던 이탈리아의 국민은 바빌론으로 끌려간 히브리인들에게 고스란히 자신들의 처지를 투영했다. 이탈리아인들이 히브리 노예라면, 당시 이탈리아 북부를 점령하고 있던 오스트리아는 바빌론 왕국이었던 셈이다. 초연 당일부터 관객들이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에 열광하는 바람에, 오스트리아 당국의 금지 조치에도 앙코르로 이 합창을 다시 연주했다고 한다. ‘베르디 만세(Viva Verdi)’라는 구호도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이탈리아 국왕(Vittorio Emanuele Re D’Italia) 만세’의 약자(略字)로 해석되기에 이르렀다. 베르디는 이탈리아 통일 운동을 의미하는 ‘리소르지멘토(Risorgimento)’의 음악적 상징이 된 것이다.

지금도 이탈리아에서 <나부코>를 공연하면 이 합창은 앙코르를 포함해 두 번씩 연주하는 것이 관례로 정착했다. <베르디 오페라, 이탈리아를 노래하다>(책세상)의 저자인 전수연 연세대 사학과 교수는 “<나부코> 이후 오페라에서 합창곡은 공동체의 집단 심리와 집단행동을 표현하는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고 평했다.
<나부코>의 성공 이면에는 작품 초연 당시 아비가일레 역을 맡았던 소프라노 주세피나 스트레포니(1815~1897)와 작곡가 베르디의 애틋한 사랑이 숨어 있었다. 스트레포니는 벨리니와 도니체티, 로시니의 오페라에서 여주인공을 도맡았던 당대의 소프라노였다. 스트레포니가 베르디와 연인이 된 건 1842년 <나부코> 초연 무렵으로 추정된다. 스트레포니는 1846년 무대에서 은퇴하고 파리에서 후배 가수들을 가르치는 성악 교사가 된다. 베르디와 동거 생활을 시작한 것도 이즈음이다. 지금도 연예계에 루머가 끊이지 않는 것처럼, 당시 오페라 여가수들에게도 추문(醜聞)은 다반사였다.
작곡가 도니체티가 스트레포니의 연인이었다는 소문도 있었고, 스트레포니가 아버지를 모르는 아이들을 낳은 뒤 남몰래 고아원에 맡겼다는 이야기도 나돌았다. 베르디와 스트레포니의 공개 연애가 스캔들로 비화한 건 어쩌면 불가피했다. 하지만 고되고 험난한 사랑마저 베르디에게는 또 다른 창작의 자양분이 됐다.

1852년 파리에서 알렉상드르 뒤마 필스의 연극 <동백꽃 아가씨>를 관람한 베르디는 이듬해 이 작품을 원작으로 하는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를 발표했다. 파리 사교계의 여인 비올레타와 그를 연모하는 청년 알프레도는 스트레포니와 베르디 자신의 러브 스토리이기도 했던 것이다. 결국 베르디는 고향 부세토 주민들과 장인의 극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1859년 스트레포니와 결혼했다.
1897년 스트레포니가 먼저 세상을 떠날 때까지 둘은 40년 가까이 부부로 살았다. 베르디의 비극 오페라와 달리, 그의 삶은 평온한 해피엔딩에 가까웠다. 생전에 베르디는 빈곤한 처지에 놓인 고령의 전직 음악인들을 돕기 위해 밀라노에 요양원(Casa di Riposo per Musicisti)을 건립했다. 지금도 이 건물은 ‘베르디의 집’이라는 의미의 ‘카사 베르디(Casa Verdi)’로 불린다. 1901년 베르디가 세상을 떠난 뒤 이들 부부의 시신도 ‘카사 베르디’로 이장했다. 베르디 자신의 휴식처가 된 셈이었다. 이 예식에는 밀라노 시민 30만 명이 운집했다. 명지휘자 아르투로 토스카니니의 지휘에 맞춰 800여 명의 합창단이 불렀던 노래는 물론 ‘가라 꿈이여, 금빛 날개를 타고’였다.

‘베르디 만세(Viva Verdi)’라고 벽에 적는 19세기 이탈리아 국민들

‘베르디 만세(Viva Verdi)’라고 벽에 적는 19세기 이탈리아 국민들

베르디가 은퇴한 전직 음악인들을 위해 건립했던 요양원 베르디의 이름을 따서 '카사 베르디'로 불린다

베르디가 은퇴한 전직 음악인들을 위해 건립했던 요양원
베르디의 이름을 따서 ‘카사 베르디’로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