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방스의 ‘아를’에서 빈센트 반 고흐를 만나다
뮤지컬과 여행 이야기
writer 원종원(순천향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뮤지컬평론가)
고흐가 사랑한 도시, 아를(Arles). 이곳에서 고흐는 200여 점의 그림을 그렸다.
전형적인 남부 프랑스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도시로, 거리를 걷다 보면 고흐의 그림 속 풍경 같은 정취를 쉽게 만날 수 있다.
그림을 좋아하는 이들에겐 더욱 각별하게 다가올 것이다.
뮤지컬 <빈센트 반 고흐>
뮤지컬 <빈센트 반 고흐>
작열하는 태양이 정말 시간을 멈춰버릴 듯한 장소가 있다. 프랑스 남부의 프로방스 지방이다. 여행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머물며 살아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하는 곳이기도 하다. 주도인 엑상프로방스를 위시로 개성이 강한 아름다운 도시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발길을 유혹하는 곳이다. 예를 들자면, 종교와 왕권이 대립하던 유럽 역사와 관계된 장소도 대표적이다. 한때 군주가 종교를 넘어서는 세력을 얻어 두 명의 교황이 존재했던 시절이 있다. 그 시절 프로방스 지방에서는 왕이 임명한 ‘또 다른 교황’이 머물렀는데, ‘아비뇽 유수’로 잘 알려져 있는 도시 아비뇽(Avignon)이 그 주인공이다. 공연을 좋아하는 사람에겐 ‘아비뇽 연극제’로도 유명하다. 축제가 열릴 때면 아비뇽 교황청을 중심으로 오래된 시가지와 길거리에 가득한 인파 속에 휩싸여 실험적이고 도전적인 발상의 갖가지 재미난 연극들을 만끽할 수 있다. 아름다운 마르세유 항구에서 유명한 해산물 요리인 부야베스를 즐길 수도 있고, 님(Nimes)의 고대 원형 경기장에서 투우를 관람할 수도 있다. 한때 이곳을 점령했던 로마 문명을 따라 남부 프랑스를 여행해 보면 사치스럽지 않게 만날 수 있는 최고의 경험들이다. 그래도 프로방스에서 가장 잊지 못할 도시를 한 곳만 꼽으라면 아마도 아를(Arles)일 가능성이 가장 높을 것이다. 지중해를 향해 도도히 흐르는 론 강을 중심으로 전형적인 남부 프랑스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도시로 일 년 사시사철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유럽, 특히 프랑스 어느 곳이라도 방문객이 넘실대지 않는 곳은 없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아를은 그중에서도 특히 그림을 좋아하는 이들에겐 각별한 곳이다. 왜냐하면 바로 고흐가 말년을 지냈던 도시기 때문이다. 거리를 걷다 보면 고흐의 그림 속 풍경 같은 정취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쇠구슬 놀이인 페탕크를 하는 노인들, 작열하는 태양 아래 강렬함을 뿜어내는 해바라기 등을 넋 놓고 바라보면 정말 누구라도 예술적 영감을 자극받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은 감흥에 휩싸인다. ‘Starry, Starry Night’란 노랫말로 유명한 돈 맥클린의 노래 ‘빈센트’와 FM 라디오 프로그램 제목으로 쓰였던 ‘별이 빛나는 밤’의 진짜 배경인 좁다란 골목길 레스토랑이나 빨래하는 처자들이 있던 랑글루아 다리 등은 위대한 천재 화가의 흔적을 직접 만날 수 있는 감동을 체험할 수 있다. 굳이 고흐의 맹렬한 추종자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흥미롭고 이색적인 시간을 보낼 수 있는 프랑스 남부 여행의 명소들이다.
뮤지컬 <빈센트 반 고흐>
프로방스와 아를, 그리고 고흐를 만날 수 있는 뮤지컬도 있다. 우리나라 창작 뮤지컬인 <빈센트 반 고흐>다. 빈센트와 화상(畵商)이었던 동생 테오, 단 두 명의 배우가 100분가량의 이야기를 통해 고흐의 작품과 예술세계, 비참했던 생애와 눈물 자아내는 죽음을 절절히 펼쳐낸다. 실제로 테오와 빈센트는 700여 통이 넘는 편지를 주고받았을 정도로 형제애가 두터웠던 사이였는데, 뮤지컬에서는 이를 마치 2인칭 관찰자 시점처럼 상황을 구현하며 객석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형의 자살 이후 마치 시들어가는 꽃잎처럼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떠나는 테오의 모습에 객석 곳곳에서 흐느낌이 들리는 것은 이 작품이 그만큼 대중적 소구와 감성적 공유에 효과적인 완성도를 이뤄냈음을 미루어 짐작게한다.
뮤지컬 <빈센트 반 고흐>에는 두 명의 배우만 등장한다. 하지만 무대에 등장하는 것은 이들 배우만이 아니다. 물론 테오가 선보이는 일인다역의 멀티 캐릭터도 인상적이어서 다양한 캐릭터들이 나오는 듯한 재미도 만날 수 있지만, 그보다 큰 비중의 제3의 주인공이 있다. 바로 고흐의 작품들이다.
고흐 ‘아를의 포룸 광장의 카페 테라스’의 배경인 아를 골목
처음 공연장에 들어서면 무대에는 하얀 세트만이 덩그러니 존재한다. 밋밋해 보이기까지 한 무대는 그러나 극이 시작되면 다양한 색감과 이미지들로 치장되어지며 화려하게 변신한다. 바로 3D 매핑 기술을 활용해 황량해 보이던 무대 세트에 수십 점에 이르는 고흐의 작품을 쉬지 않고 투사하기 때문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돌출되는 간단한 세트를 활용해 단순히 이미지의 투영만이 아니라 입체적인 공간 감각을 구현해내기도 한다. 예를 들어, 유명한 그림 ‘아를의 침실’에 그려진 바로 그 침대가 무대에서 실존하는 듯한 이미지로 재현돼 객석의 탄성을 자아내기도 한다. 정말 아를에 있는 그의 방에 들어선 것 같은 착각이 든다. 그림 속 이미지의 간단한 변화나 재배치의 묘미를 통해 작품과 작가 간의 교류를 형상화하는 장난스러운 표현이 등장하는 것도 흥미롭다. 비주얼적인 완성도만 보자면 가히 뮤지컬을 통한 미술 관람이라는 색다른 즐거움으로도 인정할 만하다. 물론 극 전개에 따라 작품의 탄생이나 뒷이야기 등도 함께 이해할 수 있어 흥미롭다. 뮤지컬의 도입부에서 그림을 활용해 이미지를 완성해내는 비주얼적인 볼거리가 관심을 끈다면, 중반부 이후부터는 묵직한 스토리의 힘이 감동을 자아낸다. 예술에 대한 열정이 대중으로부터 외면받자 점차 정신적 방황을 겪게 되는 과정이라든지 높은 도수로 ‘악마의 술’이라 불렸던 압상트(Absinth)에 얽힌 일화들, 고갱과의 만남과 좌절, 스스로 귀를 잘라버린 유명한 사건 등이 무게감 있게 객석으로 전달된다. 장면 장면마다 시대를 잘못 태어난 천재 화가의 심리적 갈등과 방황이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극적 상상력이 이야기의 재미를 높여주기도 한다. 극의 후반부에서 환각에 싸여 잘못된 삶의 선택을 하는 과정에 대한 묘사가 대표적이다. 광기에 싸여 세상을 노래하던 그가 무대 뒤편으로 사라지면 너른 벌판 위로 날아오르는 까마귀 무리가 하얀 세트를 가득 메운다. 흡사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 <꿈>에서 고흐의 작품들 속으로 들어가 그와 만나는 일본 화가의 마음까지도 연상케 한다.
프랑스 남부 도시 ‘아를’
뮤지컬 <빈센트 반 고흐>는 이웃 일본에 진출하는 좋은 성과도 이뤄냈다. 아무래도 고흐에 대한 추종과 흠모가 남다른 일본 대중에게 어필한 것이 해외 진출의 좋은 밑바탕이 된 것으로 보인다. 남의 것을 가져와 무대용 콘텐츠로 꾸며 다시 바다 건너로까지 영역을 넓힌 제작진의 흥미로운 아이디어와 추진력에 새삼 박수를 보내게 된다. 아를에 가면 정말 고흐의 그림과 똑같이 꾸며놓은 장소도 만날 수 있다. 화려한 색감과 강렬한 이미지를 그림 속 풍경 그대로 고스란히 재연해놓은 생폴 정신병원의 정원이다. 고흐 그림의 강렬한 색채가 정원의 화초들에 똑같이 채색돼 있어 방문객들의 눈길을 유혹한다. 고흐가 바라봤던 세상의 빛깔이 정말 그림 속 이미지와 엇비슷했을 것이라는 후대의 추론도 있다.
정신병의 영향이라거나 압상트로 인한 알코올 중독이 빚어낸 환각이라는 추측들이다. 하지만 이런 주장의 진위를 따지는 것보다 쓸데없는 호기심도 세상엔 없을지 모른다. 그저 그가 머물고 생활하며 그림을 그렸던 그 벌판과 거리, 장소를 거닐며 뮤지컬을 통해 만났던 장면들과 선율을 떠올려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동은 넘쳐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인생에 단 한 번만이라도 꼭 방문하라고 추천하고픈 최고의 장소다.
프랑스 남부 도시 ‘아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