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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과 <시편 교향곡>

시편과 <시편 교향곡>

writer 김성현(<조선일보> 문화부 기자)

프랑스 작곡가 올리비에 메시앙은 스트라빈스키를 ‘1,001개의 스타일을 가진 남자이자 카멜레온 같은 음악인’이라 평가했다.
오늘날 그의 작품이 자주 연주되는 것도 현대적이고 독창적인 그의 음악관과 유연함 때문이 아닐까.

작곡가 이고리 스트라빈스키'

작곡가 이고리 스트라빈스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프랑스에서 <불새>와 <페트루슈카>, <봄의 제전>을 발표하며 일약 현대음악의 총아로 떠올랐던 작곡가 이고리 스트라빈스키(1882~1971)도 졸지에 떠돌이 망명객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는 건강상의 이유로 입대 면제 판정을 받았다. 하지만 전쟁으로 인해 고국 러시아로 들어가는 길은 사실상 봉쇄됐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자 작곡가는 귀국 의사를 포기했다. 1917년 2월 혁명 당시에는 스트라빈스키도 “우리가 사랑하는 자유 러시아를 뒤덮고 있는 행복의 나날들 속에서 언제나 가족들과 함께하고 싶을 뿐”이라고 편지에 적을 정도로 낙관적 기대에 부풀었다. 하지만 곧이어 레닌 주도로 10월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자 스트라빈스키는 마음을 돌렸다. 1918년 스트라빈스키가 쓰고 있던 ‘4곡의 러시아 민요’에는 작곡가의 심경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눈보라로 인해 왕국으로 돌아갈 길은 모두 막혀 버렸네. 아버지에게 가는 길도 막혔다네.” 스트라빈스키는 팔순이 된 1962년에야 소련 땅을 다시 밟을 수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파리 공연을 주관했던 러시아 발레단의 세르게이 디아길레프는 신작을 무대에 올릴 방법이 막막해졌다. 스트라빈스키의 수입원이었던 작품 로열티도 급감했다. 설상가상으로 서유럽에서 스트라빈스키의 작품을 관리했던 출판사는 적국 독일에 있었다. 당시 한 살 연상의 아내 예카트리나는 결핵을 앓고 있었다. 훗날 스트라빈스키는 아내의 지병을 ‘50년간의 투쟁’이라고 불렀다. 그만큼 호되고 지독한 질병이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스트라빈스키는 아내의 치료를 위해 요양원이 있는 스위스에서 6년간 머물렀다. 독실한 러시아 정교회 신자였던 아내를 돌보았던 스트라빈스키는 결국 종교에 귀의하기에 이르렀다.

스트라빈스키의 두 번째 아내 베라 드 보세트

스트라빈스키의 두 번째 아내 베라 드 보세트

1918년 종전 직후 스트라빈스키는 프랑스로 돌아왔다. 패션 디자이너 코코 샤넬(1883~1971)과의 스캔들을 일으킨 것도 이즈음이다. 그 뒤에는 무용수 베라 드 보세트(1888~1982)와 사랑에 빠졌다. 둘 다 배우자가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1939년 스트라빈스키의 아내가 세상을 떠난 이후, 결국 이들은 결혼했다. 베라는 작곡가의 두 번째 아내였고, 스트라빈스키는 그녀의 네 번째 남편이었다.
스트라빈스키의 음악 세계에도 변화가 불가피했다. 전시에 대편성 관현악이나 합창곡은 사실상 연주가 불가능했다. 자연스럽게 작곡가도 소규모 실내악 중심으로 작품을 써나갔다. 러시아 음악의 원시적 매력을 변화무쌍하고 화려한 관현악으로 표현했던 스트라빈스키는 어느새 바로크 음악을 재해석한 작품들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이 시기를 ‘신고전주의’라고 부른다.
스트라빈스키가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창단 50주년을 기념하는 신작을 위촉받은 건 이 무렵이었다. 당시 악단을 이끌고 있던 지휘자 세르게이 쿠세비츠키(1874~1951)는 새로운 작품을 의욕적으로 연주해서 ‘현대 음악의 챔피언’으로 불렸다. 아르튀르 오네게르, 조지 거슈윈,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 파울 힌데미트의 작품이 모두 그의 지휘봉에 의해 빛을 보았다. 말년에는 자신의 이름을 딴 음악 재단을 설립하고 벤저민 브리튼과 올리비에 메시앙 같은 작곡가들에게 신작을 위촉하는 일에도 발 벗고 나섰다.

스트라빈스키에게 <시편 교향곡>을 위촉했던 지휘자 세르게이 쿠세비츠키

스트라빈스키에게 <시편 교향곡>을 위촉했던 지휘자 세르게이 쿠세비츠키

쿠세비츠키에게 작품을 의뢰받은 스트라빈스키는 구약성서 시편에서 가사를 고른 뒤 합창이 있는 교향곡을 쓰기로 결심했다. 3악장에는 각각 시편 38~40장, 150장의 구절을 사용했고, 작품 표지에는 ‘신의 영광을 위해 작곡한 이 교향곡을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에 헌정한다’는 구절을 써넣었다. 스트라빈스키는 <시편 교향곡>에 대해 “시편을 가사로 한 교향곡이 아니다. 반대로 교향곡으로 만든 시편 노래”라고 말했다. 당초 “나는 음악은 본질적으로 어떤 것, 어떤 감정, 태도, 심리적 상태, 자연 현상을 표현할 수는 없다고 본다”고 주장했던 작곡가의 예술적 지론을 감안하면 상전벽해 같은 변화였다. 작곡가는 마지막 3악장의 알레그로 대목에 대해 “엘리야의 마차가 천국으로 올라가는 이미지”에서 영감을 받아서 쓴 것이라고 말했다. 마지막 찬가에 대해서는 “하늘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여겨야 한다”는 주문도 빼놓지 않았다. 혼성 4부 합창 외에도 작품의 악기 편성을 보면 플루트 5대와 오보에·트럼펫·호른 각각 4대 등 4관 편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두 대의 피아노가 추가된 반면, 바이올린과 비올라, 클라리넷이 빠진 점은 독특했다.

스트라빈스키는 여성이 부르는 소프라노와 알토 음역은 어린이 합창단이 불러도 좋다고 악보 표지에 적었다. 작품은 1930년 12월 13일 에르네스트 앙세르메의 지휘로 벨기에 브뤼셀에서 세계 초연됐다. 6일 뒤 미국에서도 쿠세비츠키의 보스턴 심포니가 이 곡을 선보였다. 음악 평론가 알렉스 로스는 ‘나머지는 소음이다’에서 “스트라빈스키의 작품 가운데 가슴을 녹일 수 있는 것이 하나라도 있다면 그것은 <시편 교향곡>”이라고 평했다. “이 위대한 비표현자, 오브제(Objet)의 제작자는 방어 자세를 풀고 자신의 공포감과 갈망을 흘깃 엿보게 해준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1913년 <봄의 제전>으로 프랑스 파리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스트라빈스키가 복고적 작품을 발표하는 모습에 음악계에서는 논란이 일어났다.
특히 그의 라이벌로 꼽혔던 작곡가 쇤베르크는 스트라빈스키의 이름을 빗대서 비천한 모데른스키(Modernsky)’가 낭만주의를 조롱하고 오로지 순수한 고전주의만을 숭배한다”고 비판했다.

현대주의자(Modernist)를 자처했던 스트라빈스키의 과거 회귀를 통렬하게 풍자한 표현이었다. 하지만 1935년 자서전에서 스트라빈스키는 자신의 음악적 행보에 대해 이렇게 해명했다.
“나는 과거에 살지도, 미래에 살지도 않는다. 나는 현재에 속할 뿐이다. 나는 오늘날 내가 생각하는 진실이 무엇인지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모두 스트라빈스키가 바로크와 고전주의에 투항했다고 여겼지만, 숙적 쇤베르크가 세상을 떠난 이후 스트라빈스키는 쇤베르크의 작법(作法)이었던 음렬주의를 수용한 작품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1,001개의 스타일을 가진 남자이자 카멜레온 같은 음악인’이라는 올리비에 메시앙의 평가처럼, 이 같은 스트라빈스키의 놀라운 변신은 무엇보다 유연성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작곡가 스트라빈스키와 패션 디자이너 코코 샤넬의 러브 스토리를 다룬 영화 <샤넬과 스트라빈스키>

작곡가 스트라빈스키와 패션 디자이너 코코 샤넬의 러브 스토리를 다룬 영화
<샤넬과 스트라빈스키>

파블로 피카소가 그린 스트라빈스키의 초상화

파블로 피카소가 그린 스트라빈스키의 초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