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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길목에 서다

아트로드-한국을 담다

겨울, 길목에 서다

아트로드-한국을 담다

writer 김물길(<아트로드> 저자, 여행 작가)

한국을 여행하며 그림을 그리겠다고 결정한 후 처음 맞이한 겨울.
그 시작은 바람이 사는 곳, 바람의 연주를 들을 수 있는 곳, 바로 순천이다.

갈대의 얼굴

여름 여행 중에 겨울이 되면 꼭 한 번 다시 오리라 다짐했던 곳이 있다. 바람이 사는 곳 바로 순천이다. 순천역 앞에서 버스를 타고 순천만 자연생태공원으로 향했다. 멀리서부터 겨울 공기에 노랗게 잘 익은 갈대밭의 풍경이 보였다. 마침 숙소에서 아침으로 먹고 나온 노릇한 누룽지가 생각나는 색이었다. 생각해 보니 작년 여름 갈대밭은 가녀린 초록 잎사귀가 가득했다. 하지만 변함없는 것은 이곳에 오면 바람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이다. 바람이 만드는 갈대들의 소리는 여름에나 겨울에나 여전히 듣기 좋았다. 갈대밭 사이로 바람이 숨을 쉬고 있었다. 나에겐 차디찬 겨울의 숨결인데,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가느다란 갈대들은 절대 추위에 떨거나 꺾이지 않았다. 그저 흐릿하게 눈을 뜨고 바람을 느끼며 더 아름다운 자태로 머릿결을 뽐낼 뿐이었다. 자연과 자연의 만남은 이렇듯 경이로워서 바람 하나에도 온 세상이 아름다워지게 만드는구나, 다시 한 번 깨닫는 순간이었다.

갈대의 얼굴

갈대의 자연스러운 몸짓에
잠시라도 갈대가 되어 바람을 느껴보고 싶어진다.
갈대가 사락이며 나에게 말하는 것 같다.
‘너에겐 차가운 겨울바람이지만, 이 바람이야말로
우리에겐 최고의 스타일리스트야.’

스님의 대금소리

나는 불교 신자가 아니다. 하지만 사찰에서 느껴지는 한국적인 고즈넉함과 불교에서 느껴지는 인자함을 좋아한다. 그래서 선암사에 방문해 보기로 했다. 선암사에 도착해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는데 어디선가 귀를 사로잡는 소리가 들려왔다. 피리 소리보다는 무게감 있는 전통 관악기의 연주 소리 같았다. 그 소리를 따라가 보니 검고 긴 눈썹의 스님이 대금을 불고 계셨다. 그 앞에 서서 연주가 끝날 때까지 조용히 소리를 들었다. 스님의 대금 연주가 끝났을 때 나도 모르게 박수를 쳤다. 스님께서는 당신의 법명이 ‘혜봉’이라며 인사를 건넸고, 연이어 몇 곡을 선사해주셨다. 대금의 끝자락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는 그동안 인공의 소리로 꽁꽁 얼어있던 내 귀를 녹여주는 것만 같았다. 사찰의 모습만 가볍게 구경하고 나오려 했던 선암사 방문이었는데 기대하지 않았던 따뜻한 만남과 선물을 얻었다. 기분 좋게 절을 나서며 조만간 이곳을 다시 찾게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스님의 대금소리

혜봉 스님의 호흡이
대금의 대나무 관대 속 빈 공간을 타고
음악이 되어가고 있었다.
자연과 하나가 되던 아름다운 소리의 선물.
감사합니다, 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