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올레타, 한국인이 사랑한 여인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 한국 수용사
writer 이승희(음악 칼럼니스트)
수많은 오페라 작품 중 베르디 <라 트라비아타>가 유독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오페라로 굳건히 자리를 지키는 이유는 무엇일까?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 원작 소설 <동백꽃여인>의 실존 인물
마리 뒤플레시의 초상화 Édouard Viéno, Marie Duplessis
“우리는 그동안 동 가극을 스크린을 통하여 보았고 음악을 레코드를 통하여 또한 가극을 겨우 들을 수는 있었다. 그러나 아직 실제로 국내에 있었던 우리들에게는 동 가극뿐만 아니라 다른 가극도 전혀 볼 영광을 입지 못하여서 약 100년 전에 구라파에서 열광적인 환영을 받은 가극이 이제야 조선오페라협회의 이인선 씨 외 기타 동지 몇 분들의 수고한 덕택으로 하여 우리나라 대사로서의 동 가극을 지난 1월 16일 서울시공관에서 볼 수가 있었다. 시기적으로 매우 늦었기는 했으나 처음 볼 수 있었던 우리들의 기쁜 말이야말로 표현키가 곤란하였다. 그런고로 이날부터 장안의 전 극장팬, 음악팬 할 것 없이 전 시민이 동원된 듯이 한동안 한산하던 동관 앞에는 인산인해의 수라장으로 화하야 동 가극에 대한 인기는 실로 절정에 달하였다.”
1948년 1월, 한 신문기사는 한국에서 최초로 공연되는 오페라 <춘희>의 대흥행을 감격스러운 어조로 전하고 있다. 전국 각지에서 그동안 말로만 들어본 오페라를 감상하고자 모여들었고, 일찌감치 매진 사례를 겪은 매표소 앞은 어떻게든 들어가 보겠다고 하는 사람들의 아우성으로 북새통이었다. 이 오페라가 얼마나 장안의 화제였는지, <춘희>의 첫 공연을 성사시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성악가 이인선(1907~1960)은 공연 관련 스캔들 기사를 낸 사람과 주먹다짐하여 경찰서 신세까지 지게 됐다. 그런데 이상하다. 당시는 해방된 지 겨우 3년이 되는 해였다. 서양 고전음악을 공연할 공연장도 따로 없던 시기였다. 일제강점기, 한국 땅에서 이뤄졌던 두 번 정도의 오페라는 일본인들을 위한 것이기에 사실상 한국인 중 오페라를 본 사람은 없다고 해야 할 상황이었다.
1948년 1월 조선오페라협회 <춘희> 서울시공관 공연 – 이인선, 김자경
그런데 어떻게 <춘희>가 첫 공연부터 큰 인기를 끌게 되었을까? 여기에 대한 답은 간단하다. 한국인은 일제강점기에 신문이나 라디오를 비롯한 대중매체를 통해 오페라를 이미 심심치 않게 접해왔다. 특히 <라 트라비아타>는 이미 <춘희>라는 제목의 영화와 연극으로 제작되었던 작품이다. 오페라를 한 번도 본 적은 없었지만, <라 트라비아타>가 완전히 낯선 내용은 아니었던 것이다. 게다가 오페라는 근대화된 서구가 가진 뛰어난 문화로, 한국 사람들에게는 동경의 대상이자 언젠가는 넘어서고 싶은 벽이었다. 그래서 <춘희>의 한국 초연에 대한 비평은 ‘우리도 드디어…!’라는 벅찬 감정과 함께 ‘역시 서구에 비해서는 어설프다’는 아쉬움이 교차한다.
한국 초연 이후 오늘날까지, 수많은 오페라 작품 중 <라 트라비아타>가 유독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오페라로 굳건히 자리를 지키는 이유는 무엇일까?
1957년 6월 서울오페라단 <춘희> 서울시공관 공연 – 장혜경, 이우근, 안형일
한국인은 단순한 구성의 찬송가로부터 최초의 서양음악을 받아들였다. 한국인이 편하게 즐길 수 있는 친숙한 음악적 구조는 굳이 <라 트라비아타>가 아니라도 많은 오페라들이 공유하고 있다. 한 번만 들어도 귀에 꽂히는 달콤한 아리아 역시 <라 트라비아타>만의 독보적인 특징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결정적인 이유는 플롯에 있었다.
이 작품은 한국인이 좋아할 만한 서사구조가 갖추어져 있다. 당시 한국은 질병이나 가난의 이유로 ‘소박한 사랑의 결실’이라는 염원마저도 거부된 여주인공의 이야기가 흥행했다. 연극을 필두로 방송극·악극·소설 등 다양한 문예물이 범람했다. 그러므로 국제오페라사를 설립하여 한국 첫 오페라로 <춘희>를 선택한 성악가 이인선의 감각은 뛰어나다. 물론 상업성을 기준으로 움직이는 전문 오페라 기획자는 아니었기에, ‘남는 장사’를 하진 못했지만 말이다. 당시에는 입장권 체계가 잘 짜여 있지 않아 수입이 이리저리 새 나간 탓에, 그는 집과 피아노 한 대를 날려야만 했다.
좌 : 1948년 1월 조선오페라협회 <춘희> 팸플릿
우 : 1973년 10월 부산오페라단 <춘희> 팸플릿
한국인의 마음을 울리는 비올레타의 슬픈 정서
<라 트라비아타>는 한국에서의 흥행과 달리, 19세기와 20세기 전반의 서구 국가에서는 큰 인기를 끌지 못했다. 그들은 자신의 결단에 책임지며 마지막까지 인간으로서의 위엄을 잃지 않는 고급 매춘부 비올레타의 의연함을 낯설어했다. 고급 매춘부 비올레타의 맥박과 숨결에 동참할 것을 요청하는 오페라에 쉽게 공감할 수 없었다. 그녀의 슬픈 운명은 스스로의 ‘죗값’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독실한 가톨릭 국가였던 이탈리아에서는 동시대적 설정으로 접근하기를 바랐던 베르디의 바람을 물리치고, 100년 전 과거로 배경을 바꿔야만 했다. 적어도 ‘지금 이 세상’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독실한 기독교 국가였던 미국에서도 비올레타 대사에 도덕적 내용을 추가로 삽입하거나, 여주인공의 직업을 고급 매춘부가 아닌 요부(妖婦)로 바꾼다. 그녀가 한순간의 선택으로 고난에 이르게 되었다는 점을 강조하여 관객의 눈물을 이끌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