햄릿, 고유명사와 일반명사
writer 조만수(연극평론가)
‘죽은 연극’이냐 ‘살아 있는 연극’이냐, 이것이 문제로다.
‘햄릿’은 고유명사로 한 작품의 이름이면서 등장인물의 이름이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연극’ 혹은 ‘배우’와 동의어인 일반명사라고 말할 수 있다. 연극 하는 모든 이들은 햄릿이라는 인물을 연기하기를 원하고, <햄릿>이라는 작품을 만들기를 원한다. 하지만 그것은 <햄릿>이 연극 중의 연극, 최고의 연극, 대명사로서의 연극이어서가 아니다. <햄릿>은 삶이 삶답지 않은 것을 거부하는, 연극이 연극답지 않은 것을 거부하는 연극이다. 그러므로 차라리 <햄릿>은 최고의 연극이 아니라, 최소한의 연극이다. 이것 없이는 삶이 삶답지 못하고, 연극이 연극답지 못한 최소한의 본질을 확보하는 연극이다.
2011 세종문화회관 <햄릿>
‘To Be or Not to Be’가 복수와 관련된 결심과 그 망설임으로서의 의미를 가질 때, 그리하여 클라우디우스왕을 성공적으로 제거할 것인가 아니면 실패하여 죽임을 당할 것인가 사이에서 망설일 때 ‘햄릿’은 고유명사다. 그는 덴마크의 왕자다. 이 고유명사에 그것을 연기한 대배우의 아우라가 더해지면 ‘누구누구의 햄릿’이라는 이중의 고유명사가 만들어진다. 그러나 ‘존재할 것인가 존재하지 않을 것인가’, ‘삶다울 것인가 삶답지 못할 것인가’가 문제시될 때 햄릿은 일반명사가 된다. 그리고 이처럼 햄릿이 일반명사일 때, 햄릿을 맡는 배우가 여자이건 남자이건, 덴마크 사람이건 한국 사람이건 중요한 것이 아니다. 햄릿은 단지 이러저러한 이야기 속의 한 인물이 아니라, 삶과 죽음 사이에 있는 한 존재며, 존재의 이야기가 발화되는 ‘자리’다. 존재의 이야기가 발화되는 그 자리에서, 비로소 연극이 펼쳐진다. 존재의 이야기 그 자체가 가치로운 것은 아니다. 피터 브룩이 말했듯이, 셰익스피어는 죽은 연극이 자리하기 가장 좋은 이름이다. 셰익스피어를 그저 하나의 명예로운 권위로 받아들일 때 죽은 연극이 만들어진다. 죽은 연극은 셰익스피어의 그늘로 숨어든다. <햄릿>은 이미 너무도 잘 알려진, 안전한 이름이다. 그들에게 햄릿은 숭배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마케팅을 위한 최상의 상품이다. 그리고 이러한 연극은 과거를 향한다. <햄릿>이라는 과거의 원형에 가까이 가는 것, 그것이 스스로를 영광스럽게 할 수 있는 가장 안전한 방식이며, 그들이 숭배하는 <햄릿>을 명예롭게 하는 방식이다. 그리하여 이와 같은 연극은 과거로부터 쌓인 모든 권위를 자신의 것으로 하려 한다. 그들은 햄릿의 자리에 서지 않는다. 그들은 항상 햄릿과 ‘함께’ 한다. 그들은 햄릿이라는 고유명사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햄릿>의 명예에 합당한 권위 있는 대배우들의 이름과 최고 권위를 지닌 극장, 그리고 이와 같은 고유명사들의 추종자로서의 언론이 가세할 때 전대미문의 성공적인 연극, ‘죽은 연극’이 만들어진다. 관객은 고유명사의 이 장엄한 죽음 앞에서 찬사를 보낸다. 죽은 연극은 고유명사로서의 ‘햄릿’을 만들어내며 <햄릿>의 역사를 채울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일반명사로서의 ‘햄릿’에 관심이 없으며, 그리하여 ‘연극’의 역사를 만들지 못한다. ‘살아 있는 연극’을 만들고자 하는 모든 이들은 <햄릿>을 다시 읽는다. 그들은 햄릿 속에 자기 이름을 새겨넣으려 하는 것이 아니라, 햄릿을 통해서 무대 위에서 다시 한 번 연극이 살아나기를 원한다. 그리하여 무대 위에서 단지 죽은 ‘말, 말, 말’에 불과한 16세기의 영국인의 희곡이 살아나고, 어스름한 빛 속에서 유령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유령은 죽음의 세계와 삶의 세계의 경계에 있다. 죽음을 건너온 말이 삶 속에서 울림을 지닐 때, 이 소리를 듣는 모든 이들은 그 말은 햄릿 왕자의 아버지인 선왕 햄릿, 그러므로 끝없이 반복되는 햄릿이라는 이름, 단 하나의 이름이 아니라 증식되는 이름, 일반명사로서의 햄릿의 말임을 알게 된다. 선왕 햄릿의 유령이 아들 햄릿 왕자에게 한 당부는 단지 자신의 억울한 죽음을 복수해달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을 기억하라는 것이었다. 햄릿 왕자는 유령의 말을 받아 반복하며 맹세한다.
2012 남산예술센터 <햄릿 6>
“자, 이번에는 내가 언약의 말을 한다. 그것은 ‘잘있거라, 잘있거라. 나를 기억하라’이다.”
햄릿에 다가가는 모든 이들은 이 언약의 말을 반복해서, 자신의 말로 만들어야 한다. 그들이 잊지 않아야 하는 것은 그들이 햄릿의 자리에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잊지 않고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일반명사로서의 ‘햄릿’의 의미는 무엇일까? 두 초상화를 비교하면서 햄릿 왕자가 설명하듯이, ‘햄릿’은 ‘클라우디우스’와 비교되는 고귀한 존재다.
“여기 이 그림과 이 그림, 두 형제의 초상화를 보십시오. 이분의 이마 위에 어떠한 미덕이 서려 있나 보시라고요. (…) 모든 신들이 각자의 인장을 찍어 세상 사람들에게 참사람을 증명해주려고 만든 듯한 진정한 융합체를.”
클라우디우스는 그가 지배하는 세계 그 자체다. 마셀러스가 말하듯 “덴마크는 무엇인가가 썩었다.” 클라우디우스가 썩은 세상을, 그리하여 죽어버린 세상의 동의어라면, 그리하여 ‘Not to Be’ 하는 것이라면, 햄릿은 썩지 않은 세상, 삶이 삶다운 세상, ‘To Be’의 동의어다. 그러므로 ‘지금 세상이 전혀 그것을 인정하고 있지 않지만 삶이 삶다운 세상이 분명 존재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는 것이다. 클라우디우스는 단지 형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악인이 아니다. 클라우디우스의 다른 이름은 길든스턴이며 로젠크란츠이며, 레어티즈이자 폴로니어스다. 그들은 이 세상을 지배하면서, 햄릿의 맹세를 믿지 않는다. 그러므로 클라우디우스, 폴로니어스는 ‘햄릿’을 믿지 않으며, ‘햄릿’의 말인 ‘연극’을 믿지 않는다. 폴로니어스가 딸에게 당부한다.
“한마디로 오필리어, 그의 맹세를 믿지 마라. 그 맹세란 놈은 겉옷과는 색깔이 다른 중매쟁이일뿐만 아니라 불경한 청탁을 애원하는 자이며, 더 잘 속이기 위하여 성스럽고 경건한 뚜쟁이처럼 속삭이기 때문이다. 분명히 말하는데 (…) 햄릿 왕자에게 글을 주거나 말을 하면 안 된다. 명심해라. 명령이다.”
2015 백성희장민호극장 <조치원 해문이>
그러나 오늘도 수없이 공연되는 <햄릿>은 삶다운 삶이 존재한다는 것을 잊지 않기 위한 맹세들이다. 햄릿이 그러하듯, 그들은 항상 상복을 입고 있다. 햄릿 아버지의 죽음, 결국 햄릿이라는 일반명사의 죽음, 햄릿이 반복해서 맹세해야 하는 말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서 그들은 상복을 입는다. 때론 ‘함익’이라는 이름으로, 또 때로는 ‘해문이’라는 이름으로 혹은 언젠가엔 ‘하멸’이라는 이름으로 그들은 더 이상 세상에서는 가능하지 않은 맹세를 제문처럼 반복해서 읊는다. 기국서가 그랬듯이 일반명사로서의 햄릿은 햄릿 1, 햄릿 2, 햄릿 3으로 증식한다. 한 명의 햄릿이 죽으면 하나의 연극이 소멸한다. 그리고 “남는 것은 침묵뿐이다.” 그러나 이 침묵의 너머에서 유령처럼 또 다른 햄릿의 웅얼거림이 다시 들려온다. 썩은 세상에서는 시간마저 어긋나버린다. 세상은 거꾸로 흐르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부숴버렸다고 믿었던 썩은 세상의 시간이 다시 세상을 차지해버렸다. 하지만 연극의 시간, 유령처럼 햄릿의 맹세가 반복되는 시간은 어긋난 시간의 톱니바퀴를 다시 맞추고 제시간을 울린다. 그 시간을 울리는 종소리처럼, 포틴브라스는 햄릿을 위해 조포를 쏜다. 포틴브라스는 세상의 정복자다. 그는 클라우디우스와 달리 햄릿의 말의 힘을 믿는다. 그 말이 세상을 정복하지는 않더라도, 그 말의 가치를 믿지 않는다면, 세상도 없다는 것을 믿는다.
“햄릿을 무사답게 단상으로 운반하라. 왜냐하면 그가 만일 보위에 올랐더라면, 참다운 왕이 되었을 테니까. 그리고 그의 서거를 기리는 군악과 군례를 소리 높여 울리도록.”
막이 오르면, 햄릿의 자리에서, 또 다른 햄릿의 맹세가 들린다. “잘있거라, 잘있거라. 나를 잊지 말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