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하와 <엘리야>
writer 김성현(<조선일보> 문화부 기자)
독일 음악계 최고의 ‘금수저’였던 멘델스존. 그의 화려한 배경과 재능을 사람들은 부러워했다.
그 뒤에 숨겨진 음악에 대한 열정과 노력은 간과하고서 말이다.
조반니 란프란코의 <까마귀가 가져온 빵을 받는 엘리>
“나는 얼마 전부터 완벽하게 쉬어야만 한다고 느끼고 있어. 여행도, 지휘도, 연주도 없는 철저한 휴식 말이야. 상황이 워낙 절박하기 때문에 그렇게 해야만 해. 내 삶을 완전히 정리하고 1년간 푹 쉬기만 했으면 좋겠어.”
1845년 작곡가 펠릭스 멘델스존(1809~1847)이 여동생 레베카에게 이렇게 푸념하는 편지를 보냈다. 흔히 음악인들에게는 천재나 만능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지만, 19세기 초반 독일에서 작곡가이자 지휘자, 연주자와 교육자로 맹활약했던 멘델스존만큼 그 수식어가 어울리는 음악가는 없었다. 그는 1835년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를 맡은 뒤 ‘역사적 연주회(Historical Concerts)’ 시리즈를 도입해서 바흐와 헨델, 하이든과 모차르트, 베토벤의 독일 음악 전통을 의욕적으로 재조명했다. 동료 작곡가 로베르트 슈만의 교향곡 1·2번을 초연한 건 물론이고, 슈베르트의 교향곡 9번 <그레이트>를 작곡가 사후 11년 만에 처음으로 지휘한 것도 멘델스존이었다. 1843년 독일 최초의 음악 전문 교육기관인 라이프치히 음악원이 건립될 당시에도 멘델스존은 설립자이자 피아노와 작곡 담당 교수를 맡았다. 당시 인연으로 이 음악원은 지금도 ‘라이프치히 펠릭스 멘델스존 음악 연극원’으로 불린다. 이렇게 바쁜 와중에도 그는 시간적 여유가 생기면 영국으로 연주 여행을 떠나거나 라이프치히 성 토마스 교회에서 바흐의 오르간 작품을 연주했다.
이집트 시나이산 성 카타리나 수도원의 <엘리야> 성화
‘문화계의 로스차일드 가문’이라는 미국 평론가 허버트 쿠퍼버그의 비유처럼, 멘델스존은 독일 음악계 최고의 ‘금수저’였다. 할아버지인 모제스 멘델스존은 ‘모세 5경’을 독일어로 번역한 유럽 계몽주의 사상가였고, 아버지 아브라함은 형 요제프와 함께 독일의 대표적인 개인 은행을 설립한 은행가였다. 멘델스존의 조부 모제스는 유대교 전통을 고수했지만, 아버지 아브라함은 1816년 펠릭스 멘델스존을 기독교로 개종시켰고 1822년에는 자신도 루터교에 입교했다. 멘델스존 가문은 경제적으로든 문화적으로든 독일 상류 사회에 안착한 유대인의 표본과도 같았다. 멘델스존의 전기를 집필한 영국의 음악 비평가 닐 웬본은 “멘델스존 가족의 집을 방문한 손님들의 명단은 그 자체로 19세기 초반 유럽의 대표적 작가, 사상가, 음악가의 명단이라고 해도 좋았다”고 적었다. 소년 시절부터 멘델스존은 철학자 헤겔,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 소설가 E.T.A. 호프만, 빌헬름과 알렉산더 훔볼트 형제를 집에서 일상적으로 만났던 것이다. 일흔에 접어든 괴테가 12세의 소년 멘델스존을 만난 뒤 그의 스승 칼 프리드리히 첼터에게 이렇게 말했던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자네 제자가 이룬 성취를 당시의 모차르트와 비교하자면 다 자란 어른의 교양 있는 대화를 어린아이의 혀짤배기소리에 비교하는 것과 같네.”
이처럼 멘델스존은 남부러울 것이 없는 배경과 재능을 타고났지만, 평생 자신을 다그치는 습관을 버리지 못했다. 그의 완벽주의적 성향은 유년 시절의 가정 교육과도 연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멘델스존의 일과표를 보면, 수학과 역사, 지리학과 고전어, 그림과 체육 등 평일에는 거의 잠시도 자유 시간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1818년부터 멘델스존은 누나 파니와 함께 당시 베를린 성악 아카데미(Berliner Singakademie)를 이끌던 첼터에게 작곡을 배웠다. 이들 남매는 1820년 베를린 성악 아카데미에 입단해서 일찍부터 바흐와 헨델의 성악곡을 접했다. 멘델스존이 초기 걸작으로 손꼽히는 ‘8중주’를 16세 때 작곡했다거나, 1829년 약관 스무 살에 베를린에서 바흐의 <마태 수난곡>을 지휘했다는 전설 같은 일화들은 모두 르네상스적인 ‘홈스쿨링’의 결과물인 것이다.
‘작곡을 위한 조용함과 여유로움’을 언제나 갈망했던 멘델스존이 말년에 매달렸던 작품은 오라토리오 <엘리야>였다.
작곡가 멘델스존의 할아버지 모제스
엘리야는 구약성서 열왕기 상하에 나오는 예언자다. 기원전 9세기쯤 이스라엘의 아합 왕이 시돈 왕국의 공주와 결혼하고 바알 신을 숭배하자, 엘리야는 우상 숭배를 비판하며 수년간 가뭄이 계속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이 오라토리오는 엘리야가 가뭄의 저주가 내릴 것이라고 예언하는 대목에서 시작한다. 통상적으로 오라토리오가 서곡으로 시작하는 것과는 달리, 멘델스존은 먼저 엘리야의 예언을 장중한 레치타티보로 담아낸 이후에 서곡으로 들어가는 극적인 구조를 택했다.
오라토리오는 엘리야가 과부의 아들을 살린 기적과 바알 숭배자들과의 대결, 불의 전차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마지막 장면까지 구약성서의 내용을 충실하게 따른다. 특히 엘리야의 승천 직후에는 합창곡 ‘한 사람이 해 뜨는 곳에서 한 밤중에 일어나리로다(Aber Einer Erwacht von Mitternacht)’를 통해 그리스도의 재림을 암시했다. 멘델스존에게 <엘리야>는 개신교도라는 정체성을 드러내는 작품이기도 했다.
1846년 영국 버밍엄 음악 축제로부터 작품을 위촉 받은 멘델스존은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 연주회와 니더라인 음악 축제 같은 빠듯한 일정 속에서도 작곡에 매달렸다. 결국 <엘리야>는 버밍엄 음악 축제 개막 보름 전에 완성됐다. 그해 8월 26일 버밍엄 타운홀(Town Hall)에서 관객 2천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세계 초연된 <엘리야>는 ‘제2의 메시아’라는 찬사를 받았다.
작곡가는 동생 파울에게 “내 작품 가운데 초연 때 이만큼 훌륭하게 연주된 곡은 없었다. 또 연주자와 관객들에게 이처럼 열정적 반응을 받은 곡도 없었다”고 전할 만큼 기뻐했다. 하지만 강박에 가까울 만큼 꼼꼼하게 작품을 고치는 습관은 <엘리야>도 예외가 아니었다. 작품 초연 당일 오후부터 멘델스존은 곧바로 <엘리야>의 개작에 들어갔고, 그해 12월까지 수정 작업을 거듭했다. 이듬해인 1847년 4월 멘델스존은 영국 런던과 맨체스터, 버밍엄에서 <엘리야>를 6번 이상 지휘했다. 빅토리아 여왕과 남편 앨버트 공도 두 번째 공연에 참석했다. 앨버트 공은 멘델스존에게 “거짓 예술이라는 바알 신 숭배자에 둘러싸인 고귀한 예술가에게, 제2의 엘리야처럼 천재성과 노력을 통해 진정한 예술을 진심으로 섬기는 이에게”라는 찬사를 보냈다. 이미 호평을 받은 작품들도 끊임없이 개작하는 멘델스존의 습관에 대해 때로는 주변 지인들도 이해하기 힘들다는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작곡가는 시인이자 외교관인 친구 칼 클린게만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할 수 있는 한 좋은 작품이 될 때까지 그냥 내버려 둘 수 없어. 설령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문제에 대해 알지 못하고 상관도 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다른 사람의 배경이나 재능을 부러워하느라, 정작 그들이 내면에 지니고 있는 열정이나 헌신은 간과하고 만다. 멘델스존의 경우도 마찬가지가 아니었을까.
펠릭스 멘델스존의 12세 무렵
작곡가 펠릭스 멘델스존
작곡가 멘델스존의 아버지 아브라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