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듯, 낯설지 않은 만남
연출가 헤닝 브록하우스 인터뷰
writer 장혜선(객원기자) / photo 한국오페라단 제공
연출가 헤닝 브록하우스가 내한한다면 <라 트라비아타>와 함께일 거라고 예상했다.
거대한 거울을 활용한 독특한 무대 구성으로 1992년 초연 당시 화제를 일으킨 작품이다.
예감은 적중했다. 오는 11월, 헤닝 브록하우스가 <라 트라비아타 ‘The New Way’>를 들고 첫 내한한다.
헤닝 브록하우스
헤닝 브록하우스
공연이 끝난 후, 단 한 명의 관객이라도 극 중 인물을 전보다 깊게 이해하게 된다면 나는 그걸로 만족한다. 예술이 사람을 바꿀 수 있다고 믿지는 않지만, 내면 깊은 곳에 숨겨져 있는 창의력과 감동을 끌어올린다고 생각한다.
컴컴한 무대, 빛이 흘러나오면 거대한 거울이 등장한다. 바닥에 깔아놓은 막은 거울에 반사되고, 배우들의 형체는 다각도로 비친다. 헤닝 브록하우스 연출의 <라 트라비아타 ‘The New Way’>는 1992년 이탈리아 마체라타 스페리스테리오 야외극장의 의뢰를 받고 탄생했다. 연출가 헤닝 브록하우스는 당시 공연을 아직도 생생히 회고한다.
“그때를 떠올리면, 정말 행복한 기억만 가득해요! 젊은 성악가들로 구성된 완벽한 캐스팅이었어요. 비올레타 역을 맡은 주인공은 이탈리아 출신의 소프라노 주비 데비누였지요. 이후 지금까지 공연이 어어 오는 것을 보면 당시 공연도 매우 성공적이었다는 것을 예상할 수 있겠죠?”
그의 말투에서 자신감이 묻어나왔다. 자신의 작품에 대해 이토록 굳건한 신뢰를 가진 연출가가 얼마나 있을까. 이번 공연이 더욱 기대되는 이유다.
헤닝 브록하우스는 독일의 플레텐베르크에서 태어났다. 클라리넷을 전공했지만, 1975년 연출가 조르조 스트렐러와 인연을 맺고 연출가의 길을 걷는다. 스트렐러와 밀라노 피콜로 극장에서 다수의 연극을 함께 만들었고, 이후 라 스칼라 극장에서 오페라 <로엔그린>, <후궁탈출>, <시몬 보카네그라>, <돈 조반니>, <피가로의 결혼>을 협력 연출했다. 프랑스 파리 오데옹 극장에서 극작가로 활동한 경력도 있다. 1999년에는 이탈리아 벤티디오 바소 극장의 예술감독으로 부임하여 <맥베스>, <토스카> 등의 작품을 올렸다. 이번 <라 트라비아타>는 헤닝 브록하우스의 첫 내한 작품이다. 그는 첫 내한에 대한 기대감을 잔뜩 내비치며, 인터뷰를 통해 독자적인 예술관을 여실히 쏟아냈다.
헤닝 브록하우스 연출의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 ‘The New Way’>
스페리스테리오 야외극장의 의뢰를 받아 <라 트라비아타>를 연출했다. 야외극장은 무대를 활용하기 힘든 구조인데, 거울을 설치한 이유도 복잡한 무대 장치를 간소화하기 위해서인가?
스페리스테리오 야외극장은 무대가 거대해서 활용하기가 쉽지 않다. 거울은 무대디자이너 요셉 스보보다와 수많은 토론을 거쳐 나온 결과물이다. 극은 두 가지 시선으로 진행된다. 무대 위에 수평으로 펼쳐지는 모습과 거울 속에 수직으로 반사되는 모습이 관객에게 보여진다. 이 두 이야기는 변증법적으로 서로 얽혀 있다.
거울을 통해 관객은 무대를 세세히 관찰하게 된다. 작은 소품들부터 배우들의 동선까지, 거울을 의식한 섬세한 짜임이 돋보인다. 특히 3막에서는 거울이 관객을 비추는데, 무엇을 염두에 둔 설정인가?
무대 위의 거울은 객석에서 보이지 않는, 봐서는 안 되는 모습까지 보여주며 관객을 마치 법정에 선 증인으로 만든다. 공연의 마지막은 거울이 들어 올려지며, 관객이 거울에 비친 자신을 마주한다. 그때 극 분위기는 ‘오라토리오’처럼 변한다. 관객은 비올레타 죽음에서 밀려오는 감동에만 몰입하지 않고, 거울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며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 다시 생각해볼 수 있다. 공연이 끝난 후, 단 한 명의 관객이라도 극 중 인물을 전보다 깊게 이해하게 된다면 나는 그걸로 만족한다. 예술이 사람을 바꿀 수 있다고 믿지는 않지만, 내면 깊은 곳에 숨겨져 있는 창의력과 감동을 끌어올린다고 생각한다.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는 실존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알렉상드르 뒤마 필스의 소설 <동백꽃 여인>을소재로 한다. 원작에서 드러나는 정서 가운데 무엇을 주목했나?
통상적으로 비올레타는 접대를 하는 부르주아 집안의 주인처럼 소개된다. 매춘부라는 사실을 잊어버릴 정도다. 원작에서 그려지는 비올레타에 집중하고 싶었다. 뒤마 필스의 소설을 충실히 따랐고, 작가가 명백하게 명시하지 않은 내용을 덧붙였다.
2막의 하얀 들꽃, 3막의 공허한 무대 바닥은 비올레타의 심리를 묘사한 것 같다. 당신이 해석한 비올레타는 어떠한 여성인가?
2막의 하얀 데이지는 제르몽이 비올레타에게 얽혀들게 되는 영적 세계의 상징이다. 제르몽의 관점으로 보자면 교활하지만, 비올레타에게는 자신의 깊은 내면을 바라보는 여행이다. 3막에서는 모든 환상이 끝났기에, 어떠한 이미지도 무대 위에 남아 있지 않다. 비올레타에게는 죽음의 그림자가 다가온다. 내가 해석한 비올레타는 분명 매춘부다. 2막의 내용을 각색하고 싶었지만, 만약 비올레타가 알프레도를 사랑한다고 말하더라도 당시의 사회 분위기는 그들의 관계를 인정해주지 않았을 것이다.
당신이 연출한 <라 트라비아타>는 24년 동안 다양한 극장에서 재연됐다. 야외무대 공연을 실내로 옮겨오면서 처음 연출 의도와 부딪히는 지점은 없었나?
1993년 로마 오페라극장과 스페리스테리오 야외극장의 협정으로, 작품을 실내 버전으로 다시 작업하게 됐다. 실내극장은 야외극장보다 규모가 작지만, 배우들의 동작은 더 섬세하고 구체적이다. 연출·의상·안무는 아주 세세한 부분만 변경됐고, 기본적인 골자는 1992년 공연 작품과 동일하게 남아 있다.
무대디자이너 요셉 스보보다(1920~2002)를 어떤 사람으로 기억하나?
정말 아름다운 기억밖에 없다. 그와 16개 작품을 함께할 수 있었던 건 행운이다. 우리는 작품에 대한 아이디어와 연극적 언어에 대한 부분이 완벽한 조화를 이뤘다. 그만큼 나와 생각이 일치한 사람을 여태껏 찾지 못했다. 활발하고 긍정적이었던 스보보다는 항상 청년 같았고, 새로운 공연을 맞이할 때는 늘 아이처럼 즐거워했다.
한국을 비롯하여 전 세계적으로 많은 연출가들이 <라 트라비아타>에 도전한다. 고전 작품을 동시대에 새롭게 연출할 때, 무엇을 중심에 두면 좋을까?
베르디 <라 트라비아타>는 엄청나게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개인적으로 고전을 그대로 읽기보다는 현대적인 판독을 선호한다. 물론 현대적으로 다소 과장되게 재해석한 작품도 있다. 연출은 한 공연에서 음악과 작곡가의 의도를 조화시켜야 한다. 오페라 한 편을 무대에 올리기까지 가장 어려운 작업은 음악 제스처를 극의 의미에 도달하게 만드는 것이다. 음악에 대한 연구는 고고학자처럼 기원의 실제 흔적에 달해야 한다. 그러면 현대적 언어를 사용하더라도 작곡가의 의도와 반대로 가진 않는다. 작곡가 의도와 동떨어진 연출은 오페라의 연극적·음악적 의도가 부재된 것이다.
연출가 헤닝 브록하우스와 무대디자이너 요셉 스보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