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돈화문국악당에 스민 지리산 소년의 꿈
서울돈화문국악당 김정승 예술감독
writer 장혜선(객원기자) / photo 이도영(STUDIO D)
오는 9월 개관을 앞두고 있는 서울돈화문국악당의 김정승 예술감독을 만났다.
지리산 마을에 새벽이 오면 할아버지는 단소와 거문고를 꺼냈다. 노고단을 휘돌아 온 천년의 바람이 소년의 이마를 서늘하게 짚었다. 새벽 댓바람에 실린 할아버지의 유장한 거문고 선율은 이미 소년 앞에 운명처럼 음악의 길을 펼쳐놓았다.
구례중학교 교장을 지낸 할아버지 김무규(1908~1994)는 음악을 업으로 삼지 않은 ‘비개비(비가비·양반 출신의 광대)’였다. 고조부와 증조부를 거쳐 조부에 이르기까지 취미로만 풍류를 했다. 할아버지는 임권택 감독의 영화 <서편제>에 출연하기도 했다. 우당 김윤덕과 추산 전용선으로부터 거문고와 단소를 전수받은 할아버지는 비개비였지만, 구례향제줄풍류 예능보유자(인간문화재)가 됐다. 구례 옛집 사랑채는 말 그대로 풍류사랑방이었다. 명창·명인들의 무수한 발길에 문턱이 닳았다. 판소리 명창 만정 김소희 (1917~1995) 선생도 자주 ‘산 공부’를 하러 왔다. 명창 안숙선과 배우 오정해도 그때 만났다. 소년은 할아버지께 “음악을 하겠다”고 간청했지만, “취미로 해야 제대로 즐길 수 있다”며 할아버지는 반대했다. 그때 소년이 혼자 단소를 부는 모습을 눈여겨본 김소희 선생이 할아버지를 설득했다. 소년은 국립국악고와 서울대 국악과를 나와 대금 연주자로 활동하고 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에서 후학을 기르고 있기도 하다. 김정승(43) 서울돈화문국악당 초대 예술감독의 ‘소리 내력’이다.
그는 두 개의 날개로 난다. 태생적으로 체득한 전통 국악의 튼실한 바탕이 그 하나요, 전통 위에 촘촘히 엮어가는 컨템퍼러리 음악에 대한 관심이 다른 하나다. 국립국악원 정악단에 16년간 재직했고, 국내 최고의 원로들과 연주가들로 구성된 정악연주단체인 ‘정농악회’의 최연소 단원으로 활동한다. 그만큼 정악 분야에 깊이 있는 이해와 경험을 보유하고 있다는 뜻이다. 한편으로는 한국현대음악앙상블(Contemporary Music Ensemble Korea)의 창단 멤버로 현재까지 활동 중이다. 현대음악적 연주 기법들을 고안하고 직접 연주해 전통악기를 위한 현대음악의 지평을 넓히는 데 일조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지리산 소년의 꿈은 이제 서울돈화문국악당에서 알차게 영근다. 전통은 전통대로, 미래는 미래대로 엮겠다는 생각의 얼개는 다부지고 촘촘하다. 예술가의 삶을 음악극으로 만들겠다는 제작극장으로서의 계획도 탄탄하다.
“서울돈화문국악당의 두 열쇳말은 ‘품격’과 ‘친숙’입니다.”
김 감독은 음악적 방향을 세련된 품격과 대중성이라고 콕 찍어 강조했다. 144석 소극장이라 연주자의 숨결까지 느낄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반대로 관객과 함께 호흡하지 않으면 극장의 효용성이 퇴색할 수 있다는 점을 잘 알았다.
“애초 궁중예술 전용극장으로 쓰자는 제안도 있었지만, 기층부터 궁중까지 전통예술을 아우르는 음악, 미래 한국의 현대음악을 만들어가야 한다고 일찌감치 생각의 갈래를 다잡았습니다.”
신진세력을 발굴하고 공연 기회를 주는 것도 김 감독의 중요한 목표다.
“개관 전 공연이 굉장히 좋은 호응을 얻었어요. 커피 한 잔 값이면 볼 수 있다는 가격도 이유겠지만, 138개 팀이 공모해 엄선한 공연이 아주 고품질이라는 평가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앞으로도 2만원 안팎으로 입장료를 정하되, 여러 할인 장치를 통해 더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서울돈화문국악당은 국립국악원 풍류사랑방과 함께 순수하게 자연 음향을 쓴다.
“개인적 생각으로는 우리 국악당이 음향적으로 풍류사랑방에 못지않다는 생각입니다. 개관 전까지 계속 개선해나갈 생각이고요.”
좋은 극장엔 좋은 프로그램이 뒷받침돼야 한다.
“개관 공연 때 모든 분을 모시지는 못하지만, 국립국악원 정악단, 안숙선 판소리 명인, 김덕수 사물놀이 명인, 한예종 대취타팀 등 장르별 최고 명인을 모십니다.”
김 감독은 10월엔 연주와 동시에 음식을 즐길 수 있는 <국악의 맛>을 준비 중이다. 공연 일수 8일에 걸쳐 진행할 예정으로, 전통음악과 그를 모티브로 한 창작곡과 함께 음악에서 영감을 얻은 음식과 다과를 들 수 있는 공연이다. 가야금 명인 황병기의 해설로 정악, 불세출, 이태원의 고물 등을 출연시킬 예정이다. 11월엔 ‘미래의 명곡 시리즈’를 올리는데, 4일씩 세 팀이 나온다. 김 감독이 속한 한국현대음악앙상블, 송정민 대표가 이끄는 ‘사계’, 최우정의 ‘음악극 시리즈’ 등을 올릴 계획이다. 하지만 김 감독의 머릿속엔 다른 야심 찬 계획이 들어 있다. 좀 더 구체화해야겠지만 큰 틀은 이미 구상을 끝냈다. 내년에 기획 제작 공연으로 박종기, 김계선 두 대금 명인의 예술과 삶을 다루는 음악극을 올릴 예정이다. 두 사람은 동시대를 산 인물이다. 박종기는 무당 집안 출신으로 대금 산조 창시자고, 김계선은 궁중 악사로 정악 대금의 태두다.
“기층과 궁중이라는 음악적으로는 전혀 다른 삶을 산 두 사람 을 통해 굿부터 궁중음악까지 전통음악의 세계를 한꺼번에 보여주려 합니다.”
김 감독은 “이미 우리는 로컬과 글로벌 속에서 끊임없이 고민해야 하는 시대입니다. 전통악기와 서양음악이 협업하는 것은 당위죠. 올 11월 ‘미래의 명곡 시리즈’는 계속 끌어갈 것이고, 한국 음악계의 의미 있는 팀으로 선정됐다는 공감을 얻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했다.
사실 창경궁과 국악로가 만나는 서울돈화문국악당은 그 위치만으로도 굉장한 의미를 지닌다.
“이곳은 전통음악의 메카였던 곳입니다. 조선 성악회와 국악사양성소가 있었고, 국악학원과 한복집들이 운집된 곳이지요. 그래서 초대 예술감독을 맡는 게 한편으론 부담도 컸습니다. 지금까지 외국인 관광객들은 이곳으로 (서울돈화문국악당 쪽) 건너오지 않고 경복궁 쪽으로 지나갔습니다. 관광 상품이나 볼거리, 즐길 거리가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게 없었지요. 이제 외국인들의 발길을 붙잡을 프로그램 개발에도 고민이 필요합니다.”
전통음악과 전통에 바탕을 둔 현대음악, 예술가의 삶을 다룬 음악극까지 김 예술감독의 구상에 기대가 실린다. 지리산 소년의 꿈은 이제 돈화문 발 국악의 새 바람을 예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