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하와 아르튀르 오네게르의 <다윗 왕>
writer 김성현(<조선일보> 문화부 기자)
오라토리오 <다윗 왕>으로 하룻밤 사이에 유명 인사가 된 오네게르.
하지만 이 작품은 넉 달 안에 27곡을 써야하는 작곡 기간과 악기의 제약이 있었다.
과연 오네게르는 어떻게 악조건을 기회로 만들었을까?
“구름, 파도, 수족관, 인어, 그리고 밤의 향기는 충분하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지상의 음악, 일상을 위한 음악이다. 해먹과 화환, 곤돌라도 이제 충분하다. 누군가 집처럼 그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음악을 작곡해주기를 원한다.”
제1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1918년 7월. 프랑스 극작가이자 시인 장 콕토가 대담하고 도발적인 선언문을 발표했다. <수탉과 어릿광대(Le Coq et L’Arlequin)>라는 소책자였다. 수탉이 프랑스의 상징이라면, 어릿광대는 바그너와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을 겨냥한 말이었다. 콕토의 눈에 비친 바그너의 오페라는 ‘늙은 주술사가 신도를 마비시키기 위해 유용한 약물로 권태를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서 ‘한없이 길게 늘인 작품’에 불과했다. 드뷔시의 인상주의 역시 ‘독일의 덫에서 벗어나려다가 러시아의 함정에 빠지고 말았던 경우’에 지나지 않았다. 콕토는 바그너의 대형 오페라에 맞서기 위해서는 명징하게 선율이 살아 있는 프랑스의 ‘소품들’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니콜라 푸생의 <다윗의 승리>
얀 마시스의 <다윗의 전령과 바세바>
다윗은 왼쪽 지붕에서 바세바를 바라보고 있다.
제1·2차 세계대전 사이에 짧지만 평화로웠던 시기를 전간기(戰間期)라고 부른다. 우디 앨런의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가 낭만적으로 묘사했듯이, 전간기의 파리는 화가 파블로 피카소와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 극작가 콕토 같은 예술가들의 피난처이자 집합소였다. 그 속에서 파리음악원 중심의 젊은 작곡가들이 질풍노도 같은 기세로 프랑스 음악계에 등장했다. 여성 작곡가 제르멘 타유페르(1892~1983)와 남성 작곡가 다리우스 미요(1892~1974), 아르튀르 오네게르(1892~1955), 루이 뒤레(1888~1979), 조르주 오리크(1899~1983), 프랑시스 풀랑크(1899~1963) 등 6명이었다.
‘드뷔시 이후’를 학수고대하던 프랑스 음악계는 신성(新星)들의 출현에 환호하면서 이들을 ‘프랑스 6인조’라고 불렀다. ‘프랑스 6인조’는 작곡가이자 음악 비평가 앙리 콜레가 1920년 신문 기사를 통해서 붙여준 이름이다. 그는 이 기사에서 ‘프랑스 6인조’를 19세기 슬라브 음악에 불을 지폈던 림스키코르사코프와 무소륵스키 등 ‘러시아 5인조’에 비유했다. 작곡가 에릭 사티가 프랑스 6인조의 정신적 지주였고, 장 콕토는 대변인 역할을 자임했다. 이처럼 프랑스 6인조는 데뷔와 동시에 눈부신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이들의 결합에는 일찍부터 균열의 조짐이 내포되어 있었다. 오릭과 미요, 풀랑크는 간결하면서도 위트 있는 사티의 음악을 흠모했다.
하지만 오네게르는 경멸에 찬 시선을 보냈다. 미요는 바그너를 질색으로 여겼지만, 반대로 오네게르는 바흐의 종교곡과 베토벤의 교향곡, 바그너의 오페라에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이를테면 탄탄한 대기업 계열사보다는 느슨한 독립채산제의 소사장처럼, 프랑스 6인조의 예술적 지향점에도 공통점보다는 차이점이 두드러졌다.
오네게르는 “콕토는 우리를 같은 꽃병에 담았지만, 우리는 서로 어울리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열렬한 공산주의자였던 뒤레가 이듬해 결별을 선언하면서 6인조는 사실상 단명하고 말았다. 1950년대까지도 이들은 연주회를 간간이 열거나 작품집을 출간했지만, 느슨한 동인(同人) 이상으로 발전하지는 못했다.
6인조의 일원인 오네게르가 스위스 극작가 르네 모락스(1873~1963)의 연극 <다윗 왕>을 위한 극 부수 음악을 작곡해달라는 위촉을 받은 건 1921년이었다.
모락스는 1903년 스위스 로잔 인근의 소도시 메지에르에 극장을 건립한 뒤 연극과 오페라를 무대에 올렸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휴관에 들어갔던 극장은 재개관 기념작으로 <다윗 왕>을 준비하고 있었다.
문제는 1,000석 남짓의 극장에서 연주할 수 있는 악기가 17개로 제한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반면 아마추어 합창단의 규모는 100여 명에 이르렀다. 더구나 <다윗 왕> 초연까지는 넉 달밖에 남지 않았다. 이 때문에 작곡가들이 잇따라 퇴짜를 놓자, 모락스는 스트라빈스키와 지휘자 에르네스트 앙세르메에게 조언을 구한 끝에 오네게르를 추천받았다.
작곡 기간이나 악기의 제약이라는 점에서 오네게르에게도 이 작품은 ‘이중의 시험대’였다. 하지만 스위스계의 독실한 신교도 집안에서 태어난 오네게르에게 구약성서에 바탕한 <다윗 왕>은 거절하거나 단념하기 힘든 주제가 분명했다. 넉 달 안에 27곡을 써야 하는 숨 가쁜 일정 때문에 한 곡을 써내면 리허설하기 위해 공연장으로 곧바로 악보를 보내는 과정이 되풀이됐다. 오네게르가 스트라빈스키에게 난관을 타개할 방안을 묻자 스트라빈스키는 이렇게 답했다.
1921년 자크 에밀 블랑슈가 그린 <프랑스 6인조>
왼쪽부터 제르멘 타유페르, 다리우스 미요, 아르튀르 오네게르,
장 비너, 여성 피아니스트 마르셀 메이어, 프랑시스 풀랑, 장 콕토,
오른쪽 앉아있는 사람이 조르주 오릭. 6인조 가운데 루이 뒤레는 빠져있다.
“아주 간단합니다. 당신 스스로 이 편성을 고른 것처럼 일하세요. 17명의 단원과 100명의 합창단을 선택했다고 생각하고 작곡하는 것이지요.”
<다윗 왕>은 양치기 소년 다윗이 골리앗을 쓰러뜨린 일화부터 말년에 아들 솔로몬에게 이스라엘 왕위를 물려주기까지의 일대기를 3부에 걸쳐 그렸다.
부하인 우리야 장군을 사지(死地)로 내몰고서 그의 아내 바셰바를 취하는 인간적 결점까지도 가감 없이 담았다. 오네게르는 바흐의 종교곡을 면밀히 참고해서 작품의 기본 구조로 삼았다. 금관과 합창이 두드러진다거나 곡마다 악기 편성이 조금씩 달라지는 점도 바흐의 종교곡과 흡사했다. 오네게르는 여기에 포레의 낭만주의와 드뷔시의 인상주의까지 다채로운 ‘음악적 속살’을 채워 넣었다.
요컨대 악조건을 훌륭하게 기회로 바꿔낸 것이었다.
오네게르의 음악적 절충주의는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스트라빈스키가 신고전주의로 돌아가던 시기와도 절묘하게 맞물렸다. 프랑스의 여성 피아니스트 나디아 타그린(1917~2003)은 “그는 이 작품으로 그야말로 하룻밤 사이에 유명 인사가 되었다”고 회고했다.
초연이 성공을 거두자 오네게르는 1923년 대편성 오케스트라를 위한 오라토리오로 편곡해서 다시 무대에 올렸다. 오늘날 즐겨 연주되는 <다윗 왕>이 바로 이 오라토리오 버전이다. 이 오라토리오는 유럽 전역은 물론, 1926년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와 1928년 소련 레닌그라드 (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도 공연됐다. 1955년 오네게르는 파리에서 심장마비로 숨졌다. 6인조의 대변인을 자임했던 장 콕토는 장례식에서 이런 조사를 통해 오네게르의 음악 정신을 기렸다.
“아르튀르, 당신은 이 불경한 시대에 존경을 받았습니다. 성당을 건립하는 소박한 장인의 단순함을 중세 건축가의 과학에 결합시켰지요. 당신은 활활 타올라 재가 되겠지만, 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도 결코 식지 않을 겁니다. 음악은 이 세상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며, 그 영향력은 끝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죠.”
1925년 작곡가 아르튀르 오네게르와 아내 앙드레 보라부르
작곡가 아르튀르 오네게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