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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감의 원천에서 샘솟는 소리 없는 음악

미로와 음악과의 상관성 ②

영감의 원천에서 샘솟는 소리 없는 음악

미로와 음악과의 상관성 ②

writer 호안 푸넷 미로(Joan Punyet Miró)

호안 미로의 손자인 호안 푸넷 미로(Joan Punyet Miró)는 ‘미로와 음악과의 상관성’에 대해 심도 있는 연구를 수행해왔습니다.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리는 <꿈을 그린 화가 호안 미로 특별展>을 기념하여 그의 연구를 간략히 엮은 논문을 4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마음속에 그려 넣은 하나의 단어, ‘음악Musique’>, <영감의 원천에서 샘솟는 소리 없는 음악>,
<음악과 미술, 표현의 경계를 넘어서>, <붓으로 영원한 아름다움을 노래하다>란 부제로 진행됩니다. 미로의 내면까지 세세히 살피는 이야기를 통해, 독자분들이 미로의 예술관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_편집자 주

첫 작업인 <로미오와 줄리엣>에 참여한 후, 1923년 안무가 레오니드 마신(Lèonide Massine)이 미로를 찾아왔다. 그에게 보리스 코치노(Boris Kochno)의 발레 작품이자 조르주 비제(Georges Bizet)의 음악이 사용된 <아이들의 유희(Jeux d’enfants)>에 사용할 커튼, 의상, 세트 및 소도구 디자인을 의뢰하기 위해서였다. 이전보다 더욱 야심 찬 프로젝트에 참여하기 위해 미로는 몬테카를로에서 두 달을 보낸다. 그는 1932년 2월 23일, 친구이자 예술비평가인 세바스티아 가쉬(Sebastià Gasch)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카르멘>의 작곡가인 조르주 비제의 음악은 자네와 내가 에스코레야에 있을 때 깊이 들이마신 공기처럼 깨끗하고 명쾌하네. 나에게는 무한의 자유가 있고 모두가 나를 지지해준다네. 우리는 투우나 헤비급 권투 경기처럼 자극적인 무언가를 만들어볼 수 있을 걸세. 마신이라고 하는 이 놀라운 남자는 밀라노의 라 스칼라에서 나와 함께 일하기 위해 이곳에 왔네. 현재 안무를 짜고 있는데, 내가 만든 모든 것을 안무로 표현해낼 걸세. 이 사람이 피카소와 사티와 함께 <퍼레이드(Parade)>와 <메르쿠리우스(Mercure)>를 창작함과 더불어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Le sacre du printemps)>을 만들어낸 사람이란 것을 잊어서는 안 되네.”

호안 미로와 막스 에른스트, 몬테카를로 기차역에서 발레 뤼스(Ballets Russes) 공연단과 함께, 1932년

호안 미로와 막스 에른스트, 몬테카를로 기차역에서 발레 뤼스(Ballets Russes) 공연단과 함께, 1932년

음반 <가면의 춤(Le Bal Masqué)> 표지, 1956년 / Archivo Successió Miró

음반 <가면의 춤(Le Bal Masqué)> 표지, 1956년
Archivo Successió Miró

미로는 이 발레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했으며, 작품을 통해 급진적인 결과를 만들어내겠다는 열의에 불타고 있었다.
“모든 것은 내 최근 작품과 같은 방식을 따르고 있다네. 커튼이 관객의 눈을 가장 먼저 사로잡게 되지. 올여름 선보인 그림처럼 공격성과 폭력성을 담고 있어. 그리고 나면 좌우에서 중심으로 스윙과 어퍼컷이 극 전체가 끝날 때까지 빗발치듯 이어진다네. 20분간의 1라운드 동안 오브제들이 끊임없이 무대에 나타나고, 그 위에서 움직 이고 부서진다네.”
미로의 그림은 마치 자체적인 생명력을 가지고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으며, 음악이 청자의 귀를 사로잡는 것과 같이 관객의 감정을 이끌어냈다. 미로가 이를 복싱에 비유한 것은 인상적이다. 공연이 진행되는 내내 그의 그림이 관객이 인지하는 동작과 리듬을 이끄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이 공연은 유럽에서 여러 차례 성공을 거두면서 유럽 전역을 순회하였다. 미로는 이를 위한 팸플릿 작업을 맡았다. 하지만 발레에 대한 그의 관심은 시간이 지나도 사그라지지 않았다. 미로에게 발레는 더욱더 다양한 대중에게 이르러 관객과 직접적인 관계를 쌓을 수 있는 수단이었다. 몇 년 후, 프랑스 국영 라디오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미로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발레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최근 <아이들의 유희(Jeux d’enfants)> 작업에 참여했는데 다른 작품에 참여할 기회가 또 있었으면 합니다. 발레는 대중에게 직접적이고 물리적인 형태로 접근하는 하나의 방식입니다. 특히 저는 대중과 소통하는 데 관심이 많습니다. 언젠가는 스스로 각본도 써보고 싶습니다. 작곡가로는 버르토크나 쇤베르크를 선택할 것입니다. 사실 발레는 집단 예술의 완벽한 본보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로에게 있어 집단 예술은 개인의 작업을 통해 다수의 대중에게 다가감으로써 익명성에 이를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미로가 열정을 보인 것 중 하나인 공공예술은 음악처럼 큰 반향을 일으킨다.
미로가 프랑스 태생의 미국인 작곡가이자, ‘전자음악의 아버지’라 불리는 에드가르드 바레즈(Edgard Varèse)와 언제 만났는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1920년대 말 또는 1930년대 초, 파리에서 만났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비슷한 성향을 가진 둘이 빠르게 친구가 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둘 다 평범한 것을 지루하게 생각했고, 일반 사람들이 당연히 여기는 것에 경외심을 느꼈다. 바레즈는 강가의 물결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나 종소리에 경탄하였으며, 미로는 구름이 형성되는 모양이나 금속 조각, 혹은 그의 말을 빌리자면 “신성한 우연에 의해 발견한 것들”에 경외심을 가졌다. 이들의 호기심은 충족될 줄을 몰랐다.
‘소리의 조각가’로 알려진 바레즈는 음악이 전통적인 표현의 형태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당대의 시각예술이 이러한 견해를 명확히 하는 데 분명 참고가 되었을 것이다. 바레즈가 소리의 조각가로 알려져 있었다면, 러시아 태생의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는 탁월한 ‘음악의 화가’로 알려져 있다. 칸딘스키의 작품에서 공감각은 정점에 다다르는데, 미로는 물론 이를 지나치지 않았다. 1933년의 첫 만남 이후 칸딘스키가 독일 나치 정권을 피해 파리에 정착했고, 이 두 화가는 오랜 우정을 유지했다. 미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였다.

<자정의 밤꾀꼬리 소리와 아침의 비 (Le Chant du rossignol à minuit et la pluie matinale)>1940년 9월 4일, 종이에 과슈와 유채, 38 x 46 cm, Private Collection

<자정의 밤꾀꼬리 소리와 아침의 비
(Le Chant du rossignol à minuit et la pluie matinale)>

1940년 9월 4일, 종이에 과슈와 유채, 38 x 46 cm, Private Collection

“칸딘스키는 저 멀리 날아가기 위해 음악과 시에 도달하였다네.”
칸딘스키는 숙달된 첼로 연주자였고, 바그너와 쇤베르크의 음악에 진정으로 열광하였다.
“친애하는 미로에게, 감명 깊은 자네의 편지 감사하네! 정말 좋았어. 오늘은 러시아의 부활절일세. 따뜻한 안부의 인사를 전하네.”
진실한 표현이 담긴 편지의 형식으로 미루어 보아 서로에 대한 깊은 존경심을 지니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호안 미로는 늘 자신은 추상주의 화가가 아니라고 주장했지만, 이들이 서로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캔버스의 여백을 채운 순수한 정신성 제2차 세계대전이 점차 위협을 가하자, 미로는 1939년 아내와 딸을 데리고 파리를 떠나 보다 안전하고 평온한 지역으로 거주지를 옮겼다. 그는 오트노르망디의 바랑주빌에 있는 한 저택을 임대했다. 1948년 시사지 <파르티잔 리뷰(Partisan Review)>에 실린 예술 비평가이자 박물관 관장인 제임스 존슨 스위니(James Johnson Sweeney)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평소 절친한 친구와 대화할 때와 같이 자신의 영감의 원천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1939년 바랑주빌 쉬르 메르에서 내 작업의 새로운 시기가 도래하였다네. 나는 음악과 자연에서 영감을 얻었지. 이 시기에 전쟁이 발발하자 도망치고 싶은 강렬한 욕구를 느꼈어. 의도적으로 나 스스로를 자신 안에 가두었다네. 밤과 음악, 그리고 하늘의 별들이 내가 그림을 그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기 시작했지. 음악은 항상 나의 관심사였고, 지금도 마치 20세기 초에 시가 그러했던 것처럼 창작을 하는 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어. 특히 프랑스가 나치에 점령된 후, 마요르카에 돌아오고 난 후에는 바흐와 모차르트의 음악에 심취했지.”
카탈루냐 출신의 이 대가에게 당시는 혼돈의 시기였다. 스페인 내전이 그에게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기고, 파시즘이 기승을 부림과 동시에 또 다른 전쟁으로 어지러웠다. 그 가운데 이제는 미로가 자초한 오랜 피난길을 끝내고 자신의 뿌리를 향해 돌아올 시간이었다. 미로는 영원성을 갈망했다. 미쳐 돌아가는 난국에서 도망쳐 평온과 피난처를 찾고, 자신이 나고 자란 고향과의 연결성을 다시 회복하고자 하는 것은 단순한 육체적 욕구 이상이었다. 바랑주빌 쉬르 메르에서 시작한 ‘성좌(Constellations)’ 시리즈에 참가하면서 무자비한 전쟁의 진행에 맞설 마음의 평화를 찾을 수 있었다. 미로가 상당한 애정을 보인 23점의 음악적이고 시적인 정취가 가득한 과슈화는 지금까지 미로의 작품 중 가장 서정적이고 섬세한 연작이 되었다.

몬테카를로에서 상영된 발레 뤼스(Ballets Russes) 공연의 팸플릿, 1933년 9월

몬테카를로에서 상영된 발레 뤼스(Ballets Russes) 공연의 팸플릿, 1933년 9월

나는 팔마의 외곽에서 살았기 때문에 몇 시간 동안 바다를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고는 했습니다. 이렇게 고독에 잠겨 있을 때 시와 음악 모두 저에게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습니다. 매일 점심을 먹고 난 후에는 오르간 리허설을 들으러 대성당에 가고는 했지요. 텅 빈 고딕 양식의 성당 안에 앉아 몽상에 잠기면 형태가 떠오르곤 했습니다. 스테인드글라스 창을 통해 어두운 내부에 주황색의 불꽃 같은 빛이 쏟아지곤 했어요. 이 시간대의 대성당은 항상 비어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오르간 음악과 스테인드글라스 창을 통해 어두운 내부를 비추는 빛이 나에게 형상을 보여주곤 했습니다. 몇 달 동안 사실상 대성당을 오가는 사람을 한 명도 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고독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 내 영혼은 풍요로워졌습니다. 늘 십자가의 성 요한(St. John of the Cross)과 아빌라의 성 테레사(St. Teresa of Avila), 말라르메(Mallarmé)와 랭보(Rimbaud)의 작품을 읽었습니다. 나는 오직 일만 생각하는 금욕적인 존재였습니다.”
미로는 시와 더불어 신성과 음악을 통해 기운을 회복했고, 이는 그의 영감의 원천이었다. 완전히 미쳐 돌아가는 세상에서 의미를 찾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었다. 오로지 순수한 정신성을 통해서만 미로의 영혼은 인간의 살인 의지를 뛰어넘을 수 있었다.
미로는 1947년 뉴욕을 처음 방문할 당시, 전위적인 작곡가 존 케이지를 처음 만났을 가능성이 높다. 존 케이지는 음악 잡지 <파서빌리티스(Possibilities)>의 편집장이었다. 쇤베르크가 <천재의 발명가(The inventor of genius)>에서 그를 묘사한 것을 보면, 존 케이지는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미국의 실험적인 작곡가였다. 쇤베르크는 음악은 어느 곳에나 존재하며, 모든 것이 음악의 소재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물은 미로에게 살아 있는 존재였다.
마요르카 호안 미로 재단(Fundació Pilar i Joan Miró a Mallorca)의 아카이브에 존 케이지가 미로에게 건넨 주목할 만한 문서가 보관되어 있다. 1952년의 하이쿠(Haiku)가 바로 그것이다. 미니멀리즘이 돋보이는 이 문서는 미로의 가장 소박한 작품들을 연상시킨다. 미로는 아마 일본의 문화에서 영감을 받은 케이지의 작품에 매료됐을 것이다. 이는 그 역시 침묵 속에 숨겨진 아우성을 찾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음악은 분명 미로의 예술에 영향을 미쳤다. 미로가 그의 지인이었던 다수의 작곡가들과 협업한 덕분에 우리는 미로가 어떠한 방식으로 음악을 해석했는지에 대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대표적인 사례는 풀랑크의 음반 표지다. 풀랑크의 장난스럽고 축제의 분위기가 감도는 곡에 작가 막스 자코브(Max Jacob)의 초현실적인 가사는 당대의 예술적 활기를 반영한다. 미로의 표지 그림에는 두 명의 검은색 인물이 공중제비를 넘고 있고, 기괴한 얼굴의 가면 세 개가 놓여 있다. 이는 해학적인 자연과 분별없고 자유로운 음악을 형상화한 것이다. 그 외 바탕에는 음악의 반음계 조성을 암시하는 여러 색의 점이 찍혀 있다. 미로는 이처럼 경쾌한 칸타타의 정수를 놀랍도록 잘 포착해냈다. 1959년 미로는 작가이자 비평가인 이본 타일란디에(Yvon Taillandier)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내가 찾고자 하는 것은 사실 움직이지 않는 움직임입니다. 소위 침묵의 웅변과 같은 것 또는 십자가의 성 요한이 소리 없는 음악이라고 한 것 말입니다.”
한 노래의 후렴구를 듣고 나면 침묵을 여실히 느낀다. 침묵은 음악 그 자체만큼 신비스럽다. 마찬가지로 이 카탈루냐 출신 화가의 캔버스에 있는 빈 여백에 우리는 매료된다. 이 역시 모든 것을 말하고 있다.

꿈을그린화가 호안미로 특별전

꿈을그린화가 호안미로 특별전

기간 : 2016.06.26 (일) ~ 2016.09.24 (토)

장소 : 세종 미술관1관, 세종 미술관2관

시간 : 오전 10시 30분 ~ 오후 8시 (입장마감 60분전)

티켓 : 성인 1만5천원, 청소년 1만원, 어린이 8천원

문의 : 02-399-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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