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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로와 음악 마음속에 그려 넣은 하나의 단어, ‘음악MUSIQUE’

미로와 음악
마음속에 그려 넣은 하나의 단어, ‘음악MUSIQUE’

writer 호안 푸넷 미로(Joan Punyet Miró)

호안 미로의 손자인 호안 푸넷 미로(Joan Punyet Miró)는 ‘미로와 음악과의 상관성’에 대해 심도 있는 연구를 수행해왔습니다.
그의 연구를 간략히 엮은 논문을 4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마음속에 그려 넣은 하나의 단어, ‘음악Musique’>, <영감의 원천에서 샘솟는 소리 없는 음악>, <음악과 미술, 표현의 경계를 넘어서>, <붓으로 영원한 아름다움을 노래하다>란 부제로 진행됩니다.
미로의 내면까지 세세히 살피는 이야기를 통해, 독자분들이 미로의 예술관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_ 편집자 주

예술의 표현 방식 중 최상의 것은 음악이 아닐까 싶다. 일반적으로 음악이라고 하면 바흐, 모차르트, 베토벤 등 정통 클래식 음악의 대가가 먼저 떠오른다. 하지만 깊은 마음의 울림을 주는 여러 형태의 예술이 존재한다. 음악은 그 자체만으로 영원할 수 없다. 시, 회화, 조각 역시 이러한 한계가 있다. 모든 예술은 ‘영감’이라고 하는 원천에서 파생됐으며, 서로에게 영향을 준다. 이는 카탈루냐 출신의 예술가 호안 미로(Joan Miró, 1893~1983)의 작품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난다.
미로는 10대 후반이었던 1912년에서 1915년까지, 프란세스크 갈리(Francesc Galí)의 사립학교에서 처음 음악을 접했다. 당시 이 학교는 굉장히 독특한 방식으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갈리는 학생들에게 특정 물체를 못 보게 하고, 촉각에만 의존해서 재현하도록 했다. 또한, 학생들이 작업할 때 ‘시적’ 요소와 ‘음악적’ 요소를 조화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우리는 스케치를 끄적거리지 않았어요. 산책을 했고, 저녁에는 곡을 연주하고, 시를 읽었죠.”
갈리의 의도는 다재다능한 예술가를 양성하는 것이었다. 주변 세계를 파악할 뿐 아니라 깊은 내면 세계를 그릴 수 있는 예술가를 키우고자 했다. 이것은 미로가 마음에 새기고 평생 따른 가르침이었다. 1916년 10월 7일, 미로가 동료 화가이자 친구였던 엔릭 크리스토폴 리카르트(Enric Cristòfol Ricart)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러한 면모가 잘 드러나 있다.
“내 계획이 궁금한가? 열심히 작업하며, 산을 거닐고, 아름다운 여자를 바라보고, 독서를 하거나 콘서트에 가며 충실한 생활을 할 것이라네. 그리하면 형태, 리듬, 색채에 대한 전망을 점차 가지게 되겠지. 내 영혼을 살찌우고, 나의 언어에 힘을 실어줄 것이네. 무엇보다 ‘성스러운 초조함’이 늘 내 안에 가득하도록 신께 간청 드린다네. 초조함이야말로 인간을 진보할 수 있게 만들지.”
이 편지는 삶과 예술을 바라보는 미로의 시각을 보여준다. 그는 마음 깊은 곳에서 삶과 예술이 다르지 않은 하나의 개념이라고 생각했다. 그로부터 2주가 지난 후, 미로는 작가이자 삽화가인 친구 롤라 앙글라다(Lola Anglada)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별이 가득한 밤하늘 아래를 걸으면, 멀리서 아득하게 들려오는 음악 소리를 음미할 수가 있다네.”
이러한 공감각의 전형은 몇 년 후 미로의 작품에 스며든다. 미로가 음악과 천국 사이의 서정적인 은유를 사용한 예는, 1918년 10월 18일 타라고나 지방의 몬트로이그 농장에서 리카르트에게 쓴 편지에 잘 나타난다.
“나는 아주 잘 지내고 있네. 시골의 가을은 정말 멋져(문득 하이든의 <사계>가 떠오르는군). 하늘을 떠다니는 구름의 숭고한 관현악 조곡…”
계절의 순환적인 성격을 떠오르게 하는 아름다운 오라토리오가 미로의 격양된 기분과 더불어, 새로운 경험에 목말라하는 영혼의 초조함을 사로잡았다. 이는 훗날 미로를 파리로 이끈 전주곡이 된다.

손 아브리나스(Son Abrines)의 자택에서 호안 푸넷 미로(Joan Punyet Miró)·필라르 준코사(Pilar Juncosa)·호안 미로(Joan Miró)가 함께, 팔마 데 마요르카(Palma de Mallorca), 1971년

손 아브리나스(Son Abrines)의 자택에서 호안 푸넷 미로(Joan Punyet Miró)·필라르 준코사(Pilar Juncosa)·호안 미로(Joan Miró)가 함께,
팔마 데 마요르카(Palma de Mallorca), 1971년

아방가르드의 영향을 받다

‘Musique. Seine. Michel, Bataille et moi’를 위한 밑그림, 1927년 / 종이에 흑연 연필, 20 x 26.4 cm, Fundación Joan Miró, Barcelona

‘Musique. Seine. Michel, Bataille et moi’를 위한 밑그림, 1927년
종이에 흑연 연필, 20 x 26.4 cm, Fundación Joan Miró, Barcelona

1920년은 청년 미로에게 굉장히 결정적인 시기로, 커리어에 있어 전환점이 된 해였다. 그는 처음으로 파리 땅을 밟았고, 눈 앞에 펼쳐진 도시 풍경에 현혹됐다. 루브르 박물관과 룩셈부르크 박물관에 방문하고, 피카소를 만난 미로는 아무것도 그릴 수 없었다. 말 그대로 압도된 것이다. 5월 26일, 미로는 살 가보에서 열린 다다 페스티벌에 참석했다. 다다 페스티벌에서 프란시스 피카비아(Francis Picabia)는 세 가지 음표가 무한히 반복되는 실험적인 작품 <'미국 간호사(La Nourrice Américaine)>를 선보였고, 이는 반향을 일으켰다.
이 작품의 의도는 분명했다. 듣기 좋은 음악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임의적으로 선정한 음표를 통해 화제를 불러일으키고자 한 것이다. 이는 미로가 이제까지 들어왔던 음악과는 정반대인, 앞으로도 거의 들을 기회가 없을 음악이었다. 우연성이 작곡에 있어 이처럼 큰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생각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미로는 지독하리만큼 독립적이었으며, 특정한 이론의 학파를 온전히 따른 적이 없었지만, 당시 아방가르드로 충만했던 주변 환경에 영향을 받은 것은 분명하다. 곧 미로는 그가 사랑하던 몬트로이그로 돌아왔고, 아이가 울음을 터뜨리듯 즉각적으로 다시 그림을 그렸다. 미로는 조각가이자 친구인 가르가요(Gargallo)가 그에게 남긴 블로메가 45번지에 있는 작업실에 자리를 잡을 이듬해까지 파리에 돌아가지 않았다.
“블로메가는 나에게 의미 있는 장소이자 결정적인 순간이지. 바로 이곳에서 나 자신의 모든 것, 내가 도달할 모든 것을 발견했다네.”
미로의 옆집에 살던 초현실주의 화가 앙드레 마송(André Masson)은 이러한 급진적인 변화에 큰 영향을 준 인물이었다.
“우리는 함께 이야기하고, 술을 마시고, 음악을 듣곤 했네.”
그리고 처음으로 그의 밑그림에 ‘음악(Musique)’이라는 단어가 나타났다. 미로는 갑자기 열정적으로 작업을 하고 싶다는 욕구에 휩싸였다. 마송의 작업실은 시인, 화가 등 여러 예술가들의 아지트였다. 앙드레 마송의 아들이자 지휘자 겸 작곡가인 디에고 마송(Diego Masson)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는 자신의 작업실이 항상 음악을 듣고, 춤을 즐기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고 말했어요. 이곳을 들락거리는 사람들이 많았죠. 사실 아버지의 작업실은 항상 어질러져 있었지만, 미로의 작업실은 모든 것이 정리정돈 되어 있었어요.”
실제로 미로는 마치 승려와도 같이 완전한 고립 속 정돈된 분위기에서 작업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메티에(Métier, 화가로서의 전문적 기법)에 대한 미로의 사상에 매우 강렬한 정신적 요소가 있었음이 분명하다. 미로는 맹목적인 신앙의 추종자처럼 철저한 단련과 금욕주의를 보였다. 자신의 직관에 따라 살았으며, 자신의 통제력 이상의 힘이 그를 이끌었던 것처럼 보인다. 미로가 높이 평가하던 16세기 신비주의 시인인 십자가의 성 요한(San Juan de la Cruz)과 아빌라의 성 테레사(Santa Teresa de Ávila)가 그러했듯이, 미로 역시 마치 최면에 빠진 것과 같은 상태에서 작업했다. 그는 수일 동안 연속으로 끼니를 거르기도 했다.

음악과의 작업을 시작하다

미로의 ‘음악’에 대한 관심은 ‘그림’에 대한 것을 넘어섰다. 1926년 발레 뤼스(Ballets Russes)의 창시자인 세르게이 디아길레프(Sergéi Diághilev)는 콘스턴트 램버트(Constant Lambert)의 곡에 맞춰 발레 <로미오와 줄리엣>을 제작할 예정이었는데, 무대 미술 작업을 화가 막스 에른스트(Max Ernst)와 미로에게 부탁했다. 1926년 5월 4일 몬테카를로에서의 초연은 순조롭게 진행됐지만, 5월 18일 파리에서의 초연은 혹독한 비난을 받았다. 초현실주의 운동을 주도한 루이 아라공(Louis Aragon)과 앙드레 브르통(André Breton)이 자본가에게 작품을 팔았다며 미로와 에른스트에게 적의를 보였기 때문이다. 1926년 6월 미국인 작곡가 조지 엔타일(George Antheil)의 <기계적인 발레(Ballet Mécanique)> 초연이 끝나고, 그의 아내인 보스케 엔타일(Boske Antheil)은 미로에게 편지를 보냈다.
“우리는 파리에 돌아왔습니다. 미로 씨를 대단히 뵙고 싶군요. 조지는 발레 공연을 막 끝내고 오페라 작업에 돌입했는데, 이를 미로 씨에게 보여주고 싶어 합니다.”
엔타일 부부는 1923년 파리에 도착해, 실비아 비치(Sylvia Beach)의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Shakespeare and Company) 서점 위층에 자리한 아파트에 머물렀다. 그들은 이곳에 머무르는 동안 미로의 지인들과 어울렸다. 아마 이 시기에 미로와 엔타일 부부가 함께 작업할 수 있을지 논의했을 것이다. 그로부터 얼마 후 보스케 엔타일이 이탈리아 북부 지방인 라팔로에서 미로에게 편지를 썼다.
“베를린에서 이곳으로 잠시 휴식하러 왔습니다. 조지는 이제까지 많은 일을 했어요. 테아트르 드 레타(Théâtre de l'État)에서 선보인 <오이디푸스(Oedipus)>에 들어갈 곡을 작곡했습니다. 이는 큰 성공을 거둬 거의 매일 공연을 하고 있지요. (…) 미로 씨의 작업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조지는 항상 미로 씨와 함께 발레를 제작하는 것을 구상하고 있어요. 독일에서는 조지에 대한 평가가 좋기 때문에, 그곳에서 함께 작업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스스로를 ‘음악계의 악동’이라 지칭하는 조지 엔타일은 작곡에 대한 독특한 접근 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조지 엔타일은 정식 교육을 거의 받지 않았고, 그가 만든 음악은 충격적이고 시끄럽다고 평가받았다. 그의 이러한 점이 미로의 관심을 끌었다. 미로는 정통적인 예술 형태에 대한 혁신적인 접근법에 대해 호기심을 보였기 때문이다.

꿈을그린화가 호안미로 특별전

꿈을그린화가 호안미로 특별전

기간 : 2016.06.26 (일) ~ 2016.09.24 (토)

장소 : 세종 미술관1관, 세종 미술관2관

시간 : 오전 10시 30분 ~ 오후 8시 (입장마감 60분전)

티켓 : 성인 1만5천원, 청소년 1만원, 어린이 8천원

문의 : 02-399-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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