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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와 <모세와 아론>

쇤베르크가 남긴 미완의 걸작 오페라 <모세와 아론>

출애굽기와 <모세와 아론>

writer 김성현(조선일보 문화부 기자)

쇤베르크가 남긴 미완의 걸작 오페라 <모세와 아론>.
미완성 작품임에도 20세기를 대표하는 오페라의 하나로 인정받고 있다. 그 이유가 궁금해졌다.

미켈란젤로의 모세 조각상

미켈란젤로의 모세 조각상

오스트리아 작곡가 아르놀트 쇤베르크(1874~1951)는 1921년 6월 잘츠부르크 인근의 마트제(Mattsee)로 가족 휴가를 떠났다. 호숫가의 마을 마트제는 지금도 상주인구가 3,000여 명에 불과할 정도로 한적한 휴양지이다. 작곡가는 당초 여기서 여름을 보내면서 오라토리오 <야곱의 사다리>를 완성하고 1911년 출간한 자신의 저작 <화성>도 손볼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쇤베르크는 씻을 수 없는 마음의 상처를 받았다. ‘유대인은 환영하지 않는다’는 포스터가 나붙더니, 급기야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마을을 떠나달라’는 편지를 받은 것이었다. 이는 독일과 오스트리아 동맹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뒤 급격하게 확산됐던 ‘반(反)유대주의’ 정서를 그대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쇤베르크에게는 유대인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돌아보는 계기가 됐다. 쇤베르크는 1898년 오페라 가수였던 친구의 권유로 유대교에서 개신교로 개종했다. 한 해 전인 1897년에는 작곡가이자 지휘자 구스타프 말러가 빈 궁정 오페라극장 감독으로 취임하기 위해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개종은 유럽 주류 사회에 안착했다는 걸 보여주는 징표와도 같았다. 스스로를 오스트리아인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쇤베르크의 확신은 마트제의 반유대주의 사건으로 송두리째 흔들렸다. 심지어 주변 동료들과의 관계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쇤베르크의 절친한 동료였던 화가 바실리 칸딘스키는 1922년 독일 바이마르의 예술학교인 바우하우스에 부임한 뒤 쇤베르크를 음악 학과장으로 초빙하고자 했다. 하지만 칸딘스키가 반유대주의 발언을 일삼았다는 소문을 전해들은 쇤베르크는 소문의 진위 여부를 따져 물었다. 칸딘스키가 명쾌하게 답변하지 못하자, 이듬해 쇤베르크는 이런 장문의 편지를 보냈다.
“내가 거리를 걸어갈 때 내가 유대인인지 기독교인인지 궁금하게 여기며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답변해줄 수는 없다. ‘칸딘스키와 동료들은 나를 예외적으로 받아들였지만, 히틀러 같은 사람은 그들과 생각이 같지 않을 것’이라고 말이다. 아무리 관대한 시각으로 나를 바라본다고 해도,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유대인이라는) 팻말을 거지처럼 목에 걸어야 한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이다.”

에곤 쉴레가 그린 쇤베르크의 초상화

에곤 쉴레가 그린 쇤베르크의 초상화

이 편지에서 쇤베르크는 마트제 사건을 언급하면서 “나는 독일인도, 유럽인도 아니요, 어쩌면 인간조차 아닐지 모른다. 다만 나는 유대인일 뿐”이라고 말하기에 이른다. 아돌프 히틀러가 총리로 취임한 것이 10여 년 뒤인 1933년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쇤베르크의 선견지명이 얼마나 정확했는지 새삼 놀라게 된다.
쇤베르크는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에 민족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시오니즘(Zionism)에 급속하게 경도됐다. 그즈음 쇤베르크가 구상했던 작품이 <모세와 불붙은 떨기나무>였다. 고대 이집트에서 노예 상태로 있던 유대인들을 이끌고 가나안으로 향했던 모세는 유럽 전역에 뿔뿔이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에게는 정신적 구심점과도 같았다. 당시 유럽에서 기승을 부리던 반유대주의를 고대 이집트의 유대인 박해에 비유한다면, 모세의 가나안행은 유대인의 독립 국가 건설로 해석할 수 있었다. ‘애굽(이집트) 탈출’을 의미하는 출애굽기는 유대인들에게 종교적 복음이자 정치적 지침이었던 것이다. 쇤베르크는 당초 오라토리오나 칸타타로 작품을 쓸 생각이었다. 하지만 극적 구조를 충분히 살릴 수 있는 오페라로 작곡하기로 마음을 바꾸고 <모세와 아론>이라는 제목을 붙인 뒤 직접 대본을 썼다. 하지만 작품 진척은 더디기만 했다. 1924년 이탈리아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페루치오 부소니(Ferruccio Busoni)가 타계하자, 쇤베르크는 2년 뒤 베를린 왕립 예술 아카데미에 후임 교수로 부임했다. 이 때문에 쇤베르크는 작곡과 교육을 병행해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베를린의 춥고 습한 날씨 탓에 제1차 세계대전 때부터 그를 괴롭혔던 천식이 악화되고 말았다. 쇤베르크는 병가를 내고 스페인으로 떠나서 작품 완성에 공을 들였지만, 1932년 베를린으로 돌아왔을 때 전체 3막 가운데 2막까지만 작곡이 끝난 상태였다.

쇤베르크 초상화를 그리는 작곡가 조지 거슈윈

쇤베르크 초상화를 그리는 작곡가 조지 거슈윈

이 작품에서 쇤베르크가 화두로 삼았던 주제는 믿음과 언어의 문제였다. 오페라 1막 도입부에서 모세는 이집트의 압제에 시달리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라는 신의 계시를 듣고서도 여전히 머뭇거린다. 그는 굳건한 신앙은 있지만, 정작 대중에게 전달할 말주변이 없는 것이다. 반면 그의 형 아론은 모세의 대변인 역할을 맡지만, 종교적 진심이 없다. 쇤베르크는 모세에게 고정된 선율 없이 낭송조(Sprechstimme)로 가사를 전달하도록 하고, 아론에게만 화려한 테너의 멜로디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이 모순을 드러냈다. 어찌 보면 <모세와 아론>은 현대음악의 ‘예언자’ 쇤베르크가 대중과의 관계에서 겪었을 법한 고뇌가 담긴 작품이기도 했다. 쇤베르크는 일찌감치 조성의 법칙을 버리고 무조(無調) 음악과 12음 기법으로 나아갔지만, 그때마다 평단이나 대중의 적대감에 시달렸다. ‘보이지도 않고 상상할 수도 없는 유일신’에 대한 믿음을 설파해야 하는 모세는 좀처럼 귀에 들어오지 않는 음악을 쓰고자 했던 쇤베르크의 처지와도 같았던 것이다. 미완성으로 남은 3막에서 유일신과의 언약을 저버리고 우상 숭배에 빠진 유대인들을 향해 모세가 터뜨리는 분노는 사실상 쇤베르크 자신의 목소리이기도 했다.

렘브란트의 <십계명 석판을든 모세>

렘브란트의 <십계명 석판을든 모세>

“너희들은 유일신을 배신하고 신들에게 갔고, 이념을 배신하고 이미지를 섬겼다. 선택받은 백성의 지위를 버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갔으며, 비범한 것을 떠나 평범함을 택했다.”
종교적으로든 음악적으로든 작곡가의 고민이 응축된 작품이지만, <모세와 아론>은 결국 미완성으로 남았다. 1951년 7월 2일 독일 다름슈타트 현대음악제에서 오페라 2막의 ‘황금 송아지 주위에서의 춤’이 먼저 공개됐다. 작곡가가 타계하기 불과 11일 전이었다. 쇤베르크는 생전에 이 오페라가 공연되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작곡가가 완성한 2막 버전은 1954년 3월 12일 독일 함부르크에서 열린 음악회에서 콘서트 형식으로 처음 연주됐다. 이날 공연에서 이탈리아 출신의 현대음악 작곡가 루이지 노노는 쇤베르크의 딸인 누리아를 처음 만났다. 이듬해 둘은 결혼식을 올렸다. 노노는 ‘한 옥타브의 12음을 동등하게 사용한다’는 쇤베르크의 12음 기법을 이어받아서 음높이만이 아니라 음(音)의 강약과 길이, 음색까지 확대 적용하기에 이르렀다. 쇤베르크에서 막다른 종착점에 다다른 것처럼 보였던 현대음악은 이렇듯 사위 노노를 통해서 새로운 출구를 찾아갔다.

니콜라 푸생의 <홍해 건너기>

니콜라 푸생의 <홍해 건너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