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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적 비의(秘義) : 현대미술이 기적을 찾는 마음과 하나가 될 때

종교적 비의(秘義) : 현대미술이
기적을 찾는 마음과 하나가 될 때

writer 임근준 AKA 이정우(미술·디자인평론가)

예술사회학자인 사라 손튼(Sarah Thornton)은, “현대미술은 무신론자를 위한 일종의 대안 종교가 됐다”고 일갈한 바 있다.
그렇다면, 신을 믿는 사람들에게 현대미술은 무엇일까? 대체로 전통적 신앙심과 현대미술의 가치 체계는, 공존은커녕 양립하기도 어려운 게 사실이다. 득의양양하던 현대예술가가 마음이나 몸에 병을 얻어 종교에 귀의하면, 작업의 종류를 불문하고, 현대적 비판정신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 당연지사.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기묘한 예외는 존재한다.

  • 이탈리아의 움브리아 주 페루자 현에 ‘산타 리카 다 카시아’라는 이름의 작은 예배소가 있다. 그곳은, 좌절하고 실망한 사람들의 수호성인인 카시아의 성녀 리타를 기리는 아우구스티누스 선교회의 성소다. 한데, 유명 관광지도 아닌 그곳에서, 1980년 범상치 않게 생긴 봉헌물이 발견됐다. 1979년 지진으로 피해를 입은 예배당을 복구하는 과정에서, 봉헌물 형태의 비의적(秘義的, Mystique) 현대미술품이 발견된 것. 영문을 모르는 수녀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던 종교적 작품에 적힌 제목은, <이브 클랭이 카시아의 성녀 리타께 바치는 봉헌물(Ex-voto dédié à Sainte-Rita de Cascia par Yves Klein)>이었다(흔히 줄여서 ‘익스-보토’, 즉 봉헌물이라고 부른다).

  • 이는, 1961년 2월, 프랑스의 현대미술가 이브 클랭(Yves Klein, 1928-1962)이, 33세 생일을 몇 달 앞두고,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으로 바친 제 작업의 요체였다. 봉헌물의 상자는 특별히 제작된 플랙시글라스 팔레트로, 나사로 봉인하게 돼 있다. 3단으로 분할된 상단부엔 작가의 작업 세계를 구성하는 세 가지 색상의 재료, 핑크색 안료, 청색 안료, 금박을 삼위일체로 담고 있고, 그 아래의 좌우로 긴 공간에 작가의 친필 기도문을 넣었으며, 그와 등치를 이루는 하단의 공간엔 다시 청색 안료를 채우고 세 개의 작은 금괴를 세로 가로 세로로 배치했다(이브 클랭은 ‘분홍색’이 삶을, ‘청색’이 정신성을, ‘금색’이 절대성을 상징한다고 생각했고, 이 세 가지 색이 모여서 생명력의 총체를 이룬다고 믿었다).

  • 이브 클랭이 카시아의 성녀 리타께 바치는 봉헌물

    ① 이브 클랭(Yves Klein, 1928-1962)
    <이브 클랭이 카시아의 성녀 리타께 바치는 봉헌물 (Ex-voto dédié à Sainte-Rita de Cascia par Yves Klein)>

    1961년 / 14×21×3.20cm/ 플랙시글라스, 나사못, 기도문을 적은 종이, 청색 안료, 핑크색 안료, 금박, 소형 금괴

  • 편지의 형태로 봉납된 기도문은, 기본적으론 이미 당해 1월에 독일 크레펠트의 무제움하우스랑게(Museum Haus Lange)에서 개막한 대규모 회고전 <이브 클랭: 모노크롬과 불(Yves Klein: Monochrome und Feuer)>에 감사하고 또 성공을 기원하는 내용인데, 읽어보면, 그 문구가 퍽 순수하고 또 절실하다. “청색, 금색, 핑크색, 비물질 / 전설 속 에덴의 상태에 부합하는 자연 속 인간의 삶으로 회귀하기 위한, 빈 공간, 공기의 건축, 도시의 공기, 공기의 조절, 드넓은 지리학적 영역. 세 개의 금괴는 ‘비물질적 회화의 감수성의 첫 네 영역’을 판매함으로써 얻은 최종 산물이옵니다. / 전지 전능하신 주 하느님께, 주 예수의 이름으로, 고귀하신 성모 마리아를 위해.

    수호성인 카시아의 성녀 리타를 통해 제 무한한 감사의 뜻을 표합니다. 고맙습니다. Y.K. / […] 공허의 극장 – 제 작업의 여백 – 그 우주생성론 – 저의 청색 – 일반론으로서의 제 모든 이론에서 무엇이든 특별한 변화를 허하소서. 제 적들이 친구가 되게 하시고, 원컨대, 저를 적대하며 해하지 않게 하소서. 저와 제 작업 모두를 안전하게 보호해주시옵소서. 이 모두 이루어지리로다. / […] 카시아의 성녀 리타시여, 불가능하고 절망적인 이상들의 수호성인이시여, 지금까지 제게 베풀어주신 진지 전능하고 신묘한 도움의 손길에 무궁한 감사를 드리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그럴 자격이 없다 하여도 저와 제 예술에 도움의 손길을 다시 한 번 허락하시어 제가 창조한 모든 것들이 모자란 저 자신에도 불구하고 언제까지나 위대한 아름다움으로 남도록 보호하여 주시옵소서.”

  • 여기에 공간이 있다

    ② 이브 클랭(Yves Klein, 1928-1962)
    <여기에 공간이 있다(Ci-gît l'Espace[Here Lies Space])>

    1960년 / 패널에 금박과 조화와 자연산 해면과 합성 레진과 청색 안료 / 124.9×100×10cm

  • 이브 클랭은 1950년대에 이미 연예인 못잖은 쇼맨십으로 사회적 논란거리가 됐던 인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문화적 사기꾼이었던 것은 아니다. ‘비물질적 감수성(Sensibilité Immatérielle)’을 제 작업 세계의 열쇳말로 삼았던 그는, 물질의 실존을 관문 삼아 비물질적 초월성의 영역으로 나가갈 수 있으리라 믿었고, 실제로 ‘갤러리의 텅 빈 공간을 예술 작품으로 제시한 최초의 추상예술가’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어려서부터 장미십자회의 비의적 교리에 심취했던 이브 클랭에겐, 현대미술의 가치 체계에 온전히 포섭되기 어려운 신앙인의 면모가 있었다. 장미십자회의 우주진화론(La Cosmogonie des Rose-croix)의 가르침에 따라, 작가는 ‘공간은 비었거나 허망한 것이 아닌 정신 그 자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가톨릭 교리로부터 삼위일체나 숭고의 상징 체계를 빌려온 현대미술가들을 보기는 어렵지 않지만, 아예 제 작업을 수호성인에게 봉헌하고, 그것이 제 작업 세계의 비가시적 기준점이 되도록 꾸민 사례는, 이브 클랭이 유일하다.

    1955년 전업 작가로 활동을 본격화한 이브 클랭은, 1960년 제 작업 세계의 기본적 상징 체계를 사실상 완성했고, 1961년 커리어의 대전환을 맞을 참이었다. 돌이켜보면, 1960년은 작가에게 실로 특별한 해였다.

  • 5월 개막한 개인전 <청색 시대의 인간측정학(Anthropométries de l'époque bleue)>은 대성공이었고, 곧이어 자신만의 물감인 ‘인터내셔널 클랭 블루(IKB: International Kein Blue)’로 특허권까지 인정받았으며, 10월엔 평론가 피에르 레스타니가 주창한 누보레알리즘 운동의 발기인으로 참여해 전후 미술계의 새로운 변화를 주도했다. 따라서 1961년을 맞는 작가의 마음은, 여느 해와 달랐을 테다. 4월엔 미국 뉴욕의 유력화랑 레오카스텔리에서 개인전이 예정돼 있었고, 화염방사기로 그림을 그리는 <불의 회화> 연작을 야심 차게 준비하고 있었으며, 또 개인적으로는 사랑하는 연인 로트라우트 웩커와 약혼한 상황이었다.

  • 작가의 간곡한 기원은 응답을 받은 듯했다. 1961년에 벌인 작업과 전시는 모두 성공적이었고, 미국에서의 명성도 높아갔다. 하지만, 이브 클랭은 당해 10월 몇몇 동료들과 함께 누보레알리즘 그룹의 해체를 선언해버렸다. 미국식 팝아트에 경도된 피에르 레스타니의 새로운 선언문에 동의할 수 없다고 생각해버린 나머지, 중요한 동료를 적으로 돌리게 됐던 것. 1962년 1월 21일엔 약혼자와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다. 면사포 아래로 이브 클랭이 제작한 청색 왕관을 쓴 신부는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다. 그러나, 당해 6월 6일, 만 34세의 이브 클랭은 파리의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떴고, 두 달 뒤인 8월, 미망인은 니스에서 아들 이브를 낳았다.

  • 기적적인 것을 찾아서

    ③ 바스 얀 아더르(Bas Jan Ader, 1942-1975?)
    <기적적인 것을 찾아서(In Search of the Miraculous)>

    1975년 / 대서양 횡단에 나서기 전에 시행된 기념 합창의 기록.

    *<대양의 파도 위에서의 삶(Life on the Ocean Wave)>을 부르는 혼성중창단의 모습.
    80장의 기록 사진 가운데 하나.

  • 바스 얀 아더르

    ④ 바스 얀 아더르(Bas Jan Ader, 1942-1975?)

    *기적적인 것을 찾아 나서기 전, ‘대양의 파도(Ocean Wave)’라 명명된 포켓 크루저(초소형 보트)를 점검하고 있는 바스 얀 아더르(Bas Jan Ader, 1942-1975?)의 모습.

  • 이러한 비의적 헌신(獻身)의 모습은, 네덜란드의 개념미술가 바스 얀 아더르(Bas Jan Ader, 1942~1975?)의 마지막 작업에서도 찾을 수 있다. 얀 아더르는, 1975년 <기적적인 것을 찾아서(In Search of the Miraculous)>라는 제목의 괴이한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대양의 파도(Ocean Wave)’라 명명된 포켓 크루저(초소형 보트)를 타고 대서양 횡단에 도전하기로 작정했던 것. 1975년 7월 9일 미국 매사추세츠 주 케이프 코드(Cape Cod)를 출발해서, 계획대로 두 달 반 안에 영국 팰머스(Falmouth) 해안에 무사히 도착했다면, ‘가장 작은 배로 대서양 횡단에 성공한 인물’로 역사에 기록됐을 테다. 그러나, 항해 시작 이후 3주 만에 라디오 통신이 두절됐고, 모험가는 실종됐다. 열 달 뒤인 1976년 4월, 아일랜드 해변에서 스페인 어선이 주인 잃은 배를 발견했지만, 작가의 시신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본디 작업은 크게 셋으로 나뉘어 실행될 계획이었다. 제1부는 오밤중에 캘리포니아의 어느 언덕에서 해변으로 걸어가는 제 모습을 사진으로 기록한 것이고, 제2부가 대서양을 횡단에 도전하는 일이었으며, 제3부는 암스테르담의 해변에서 앞서 시행한 심야 산책을 재연하고 사진으로 기록할 예정이었다.

  • 한데, 이 작업을 진행하던 당시 작가의 나이는 만 33세로,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한 나이와 같았다. 2007년 마리온 반 윅(Marion van Wijk)과 코스 달스트라(Koos Dalstra)는 이 미스터리 사건을 추적-조사해 자료집을 발간했다. 제목은 <바스 얀 아더르:기적적인 것을 찾아서 ― 수사 파일 143/76(Bas Jan Ader: In Search of the Miraculous ― Discovery File 143/76)>. 이들의 조사에 따르면, 스페인 코루냐 주의 산 디에고 항만에 정박해 있던 ‘대양의 파도’는 1976년 5월 18일과 6월 7일 사이에 사라졌고, 배를 찾는 데 실패한 경찰은 1977년 2월 1일 실종 사건에 대한 수사를 종결해버렸다. 바스 얀 아더르는 기적을 향한 도전을 빙자해 자살을 기도했던 것일까? 그의 모친은 1975년 10월 12일 아들의 죽음을 예견한 듯 음울한 시를 쓴 바 있다. 다음은 시구의 일부다. “그대는 슬픔의 깊은 우물이 읊조리는 행복을 들어본 일이 있는가? 절망과 번민과 죽음으로부터 울려 나오는 사랑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 아트 & 프로젝트 소식지 89(Art & Project Bulletin 89)

    ⑤ 바스 얀 아더르(Bas Jan Ader, 1942-1975?)
    <아트 & 프로젝트 소식지 89(Art & Project Bulletin 89)>

    1975년 8월호 / 포토리소그래프 인쇄물 / 29.6 x 42cm (펼친 크기)

  • 대양의 파도 위에서의 삶

    *뒤표지에 인쇄된 악보는 헨리 러셀(Henry Russell)의 노래 <대양의 파도 위에서의 삶(Life on the Ocean Wave)>(1838)으로, 영·미 해군에서 애창되는 행진곡이다. 아더르가 자신의 포켓 크루저에 붙인 ‘대양의 파도’란 이름은 이에 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