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ST175

레이어 : 층위의 중첩을 통해 새로운 의미의 길을 트다

레이어 : 층위의 중첩을 통해
새로운 의미의 길을 트다

writer 임근준 AKA 이정우(미술·디자인평론가)

최근 현대미술계에서 각광받는 화가들을 살펴보면, 화면의 복합적 중첩을 통해 새로운 회화적 실험을 모색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화가 입장에서, 컴퓨팅 환경이나, 스마트 기기의 그래픽 인터페이스가 제공하는 시각적 경험에 부합하기 위한 노력일 수도 있겠지만, 굳이 그러한 경험을 회화로 번안하려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산업화 초기에 자동차를 대리석 조각으로 정교하게 재현하고자 애썼던 조각가이며 건축가 카미유 르페브르의 <에밀 르바소르 기념비>의 사례처럼, 시대착오적인 노력인 것은 아닐까? 또, 이런 화면 중첩의 문법은, 언제 누가 시작한 것일까?

  • 프란시스 피카비아 종말의 어린양과 스페인 여성(Espagnole et agneau de l'apocalypse)

    ① 프란시스 피카비아(Francis Picabia, 1879-1953)
    <종말의 어린양과 스페인 여성(Espagnole et agneau de l'apocalypse)>

    1927-28년 추정 / 종이에 과슈, 수채화, 잉크 / 65×50cm / 개인 소장

    *스페인의 민속복장 만티야를 입은 여성 위로 그려진 것들로, 섬유 패턴과 남자의 손 등을 꼽을 수 있지만, 가장 두드러지는 이미지는 12세기 카탈루냐의 프레스코 <종말의 어린양(Lamb of the Apocalypse)>에서 인용한 일곱 눈의 속죄양이다.

  • 중층적 화면을 통해 원근법 회화의 도상해석학적 한계를 극복하려는 충동은, 초현실주의자 프란시스 피카비아(Francis Picabia, 1879~1953)에 연원한다는 것이 통설이다. 그러나, 다중 이미지를 그려낸 피카비아의 1920년대 후반~1930년대 초반의 그림들(‘투명성[Transparence]’ 연작으로 불리는)은, 다중 노출 사진에서 영향받은 것으로, 딱히 층위 개념을 장치한 결과는 아니었고, 당대에 큰 반향을 일으키지도 못했다. 전후 추상미술은 중층 회화의 실험을 도외시했기에, 피카비아의 유산은 그대로 잊히는가 싶었지만, 뜻밖에도, 자본주의 리얼리즘을 주창한 동독 출신의 화가 지그마 폴카(Sigmar Polke, 1941~2010)가 그 바통을 이었다.

    폴카는 1960년대 후반, 미국식 팝아트를 독일화하는 실험을 꾸준히 전개했는데, 스크랩한 인쇄물을 확대해서 캔버스에 옮겨 그리는 과정에서 그가 주목한 것은 ‘망점’이었다. 그는 다종다양한 망점을 확대-강조해 그림으로써 환영의 환영성을 폭로하고, 또 각기 다른 이미지를 중첩시킴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창출할 수 있었다. 폴카는 망점이 광고 이미지로 넘쳐나는 현대사회의 환영을 지탱하는 비가시적 층위이자, 그 환영의 공허한 본질을 폭로할 적절한 알레고리 장치라고 믿었으며, 망점을 드러내는 이미지의 중첩을 통해 제 회화의 화면을 역사적 문제들을 수렴해내는 비평적 채널로 삼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1970년대 중반 동료 게르하르트 리히터가 팝아트의 한계를 뛰어넘어 유형학적 사진회화의 방법론을 개척하는 동안, 폴카는 각종 마약을 즐기며 사이키델릭한 중첩 화면에 심취했다(결과적으로 초현실주의를 계승한 것처럼 보인다). 1970년대의 폴카는 망점에만 집착하지 않고, 종종 캔버스의 내부 구조를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화면 분할을 전제로 삼은 채, 미국화하는 소비문화의 오늘을, 수집한 이미지의 중첩 레이어—페인트 스프레이와 스텐실 마스킹을 적극 활용한—로 풍자하고 또 풍자했다. 화면을 중첩하는 실험의 바통은 1980년대에 이르러, ‘포스트모던 회화의 기수’로 각광받았던 데이비드 샐리(David Salle, 1952)에게 이어졌다. 샐리는 MTV 화면처럼 분할된 캔버스를 활용해 다양한 이미지를 인용-중첩시켰다. 언제나 그의 그림은 그가 의도한 것 이상의 메시지를 발생시켰고, 옹호자들은 회화의 서사적 능력을 새로운 차원에서 부활시켰다고 칭송했다. 하지만, 비판자들은 화가 자신이 잘 알지도 못하는 시각 기호를 마구잡이로 인용해놓은 화면을 과잉 독해하는 것은 난센스고, 방법론적으로 보면 장식적 패스티시에 불과하다고 평가 절하했다.

  • 지그마 폴카 여자친구(Freundinnen)

    ② 지그마 폴카(Sigmar Polke,1941~2010)
    <여자친구(Freundinnen)>

    1965/1966년 / 캔버스에 유채 / 150×190cm / 요제프 프뢰리히(Josef Froehlich) 소장

    *1960년대의 작업 특징을 잘 보여주는 망점 회화.

  • 1990년대 초반 데이비스 샐리가 완전히 주저앉은 어떤 지점에서, 제프 쿤스(Jeff Koons, 1955)의 중층 회화가 등장했다. 쿤스는 샐리를 서서히 집어삼키는 과정에서, ‘레이어 회화(상이한 이미지를 중층 구조의 화면에 축적함으로 비평적 소격 효과를 발휘하는 그림)’의 계보에 대한 자의식을 획득한 것으로 보인다. 특기할 만한 변화는, 2008년부터 화면에 망점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 폴카가 말기암으로 투병 중이라는 소문이 미술계에 돈 뒤의 일이었다. 제프 쿤스는 다의성을 띠는 명료하고 정교한 오브제 작업으로 유명하지만, 그의 평면 회화 작업도 입체 작업에 버금가게 훌륭하고 또 문제적이다. 작가가 진지한 자세로 회화에 임하기 시작한 것은, 1994~1995년경, <축하(Celebration)> 연작을 전개하면서부터였다. <축하> 연작의 주력 작업은, 널리 알려졌듯이, 각종 기념일에 주고받는 선물의 형상을, 채색 코팅한 고광택 스테인리스스틸 조각으로 구현해놓은 대형 조각품들이다. 기술적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1994~1995년에 구상한 작업들이 실물로 귀결되기 시작한 것은, 1999~2000년 이후의 일. 오히려, <축하> 연작에서 조각에 앞서 등장한 것이, 회화였다. <축하> 연작의 회화는, 즉물성을 추구하는 미국식 포토리얼리즘의 전통을 따르는 다소 평이한 모습이었지만, 1999년의 <이지펀(Easyfun)> 연작에 속하는 그림들은 양상이 달랐다. 사진 콜라주처럼 교차 중첩하는 이미지들이 화면에 나타나기 시작한 것. 이후 화면 중첩의 충동은 2000~2002년의 <이지펀-이더리얼(Easyfun-Ethereal)>에서 본격화하는데, 이 시리즈는 (오브제 작업 대신) 회화가 주축을 이룬다는 점에서 또 특별했다.

  • 데이비드 샐리 우리는 자루를 흔들거야(We'll Shake the Bag)

    ③ 데이비드 샐리(David Salle, 1952-)
    <우리는 자루를 흔들거야(We'll Shake the Bag)>

    1980년 / 캔버스에 아크릴릭 / 121.9×182.9cm

    *운동회에서 입으로 뭔가를 떼어 먹으려 애쓰는 소년들의 이미지와 정사 직후의 성인 이미지를 중첩해 맥락 차원의 소격 효과를 창출하고 있다.

  • 쿤스는 광고인들이 이용하는 레디메이드 사진 DB처럼 성적 페티시의 이미지를 수집해 제 작업의 데이터베이스로 삼고, 그것들을 괴이한 방식으로 중첩시켜 낯익은 이미지들로부터 최대한 낯설고 불유쾌한 느낌을 도출해냈다. 물리적 제작 과정도 특별하다. 작가가 직접 작업의 계획안이 되는 사진/포토샵 이미지를 제작하면, 그것을 컬러리스트 조수가 이어받는다. 컬러리스트 조수는 일일이 색면을 분할하고 각 면에 적용할 색상을 미리 선별 혹은 배합한 뒤, 분류를 위해 이름까지 붙여 팔레트를 준비한다. 그러면, 다시 새로운 붓질 작업 담당자가 배정된다. 채색을 맡은 조수는, 프로젝터로 열쇠 이미지를 캔버스에 투사하고, 컬러리스트의 면 분할을 화면에 옮긴다(요즘은 사전에 작업 계획 이미지를 일러스트레이터에서 벡터 이미지로 면을 일일이분할하고, 그를 이용해 컷-아웃 마스킹을 출력해 채색 작업에 활용한다). 그다음부터는 정교하게 각 면을 지정된 색으로 칠하는 지루한 노동이 반복된다. 세밀한 면을 제작하는데 사용되는 붓은 0호 이하의 세필. 한 점을 제작하는데, 최소 6개월 이상, 길면 1년 정도의 기간이 소요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기호학적 등치를 이루는 이미지를 중첩해놓은 동어반복적 화면에서 관객이 읽거나 감지하게 되는 것은 무엇일까? 현대사회에서 소비되고 있는 성적 페티시의 이미지를 중첩해놓은 화면이 추적하는 것은, 리비도를 시각화해온 인류 문화의 계보 그 자체인 것은 아닐까?

  • 제프 쿤스 폐품처리장(Junkyard)

    ④ 제프 쿤스(Jeff Koons, 1955-)
    <폐품처리장(Junkyard)>

    2002년 / 캔버스에 유채 / 259.1×350.5cm / 시어 웨스트리치 와그거와 이선 와그너 부부(Thea Westreich Wagner and Ethan Wagner) 소장

    *노상 매매춘과 관련된 은어적 이미지를 모아 중첩해놓은 화면.

  • 2007년작 <자유의 종(Liberty Bell)>-<헐크-엘비스> 연작에 속하는-은 지금까지 발표된 제프 쿤스의 중첩 회화 가운데, 작가의 방법론적 특질을 가장 잘 보여주는 대표작이다. 제목이 지시하는 ‘자유의 종’은 미합중국의 독립을 상징하는 기념물로, 미 펜실베니아 주 필라델피아 시에 위치한 자유의종센터(Liberty Bell Center)에 소장돼 있는데, 보기 좋게 금이 쩍 가 있는 모습으로 유명하다(미국의 독립운동을 이끈 정치인이자 법률가였던 존 마샬[John Marshall]이 서거한 뒤에 금이 갔다는 근거 없는 전설이 있다). 그림 한가운데, 그리고 그림의 층위에서도 다시 한가운데 위치한 자유의 종은, 하이퍼리얼리즘 화풍으로 그려져 있고, 그 아래의 층위에 증기 자동차와 밀려오는 파도가 백색 라인 드로잉 이미지로 삽입돼 있고, 다시 그 아래로 하늘색 배경과 함께 작가의 전유 조각 작업인 <헐크>가 하이퍼리얼리즘 화풍으로 두 번 반복 삽입돼 있다. 자유의 종 바로 위의 층위엔 서로 마주 보며 웃고 있는 뽀빠이와 올리브가 노란색 라인 드로잉 이미지로 중첩됐고, 다시 그 위엔 머리에 꽃을 꽂으며 유혹적 시선으로 관람자를 바라보는 일본 춘화의 게이샤가 주황색 라인 드로잉 이미지로 중첩돼 있다.

  •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제프 쿤스가 2014년 6월 27일 휘트니미술관에서 개막한 대규모 회고전—휘트니미술관이 브로이어 빌딩 시대를 마무리하는 피날레 전시이기도 했던—에서, 자유의 종 모사품을 제 신작 가운데 하나로 제시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8년의 노력 끝에 3D 스캐닝, 3D 렌더링, 3D 프린팅 등 첨단 기술의 도움을 받아 원본과 거의 완벽하게 똑같다고 볼 수 있는 복제품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원본의 스캐닝과 스캔 데이터를 구성하는 작업은 다이렉트 다인멘션즈(Direct Dimensions)사가 맡았고, 렌더링은 쿤스의 스튜디오가 직접, 종의 제작은 주식회사 아르놀트(Arnold AG)가 진행했다.

  • 공정을 기획하고 관리하고 감독하는 일은 언제나 쿤스 본인의 몫. 복제품은 각 부품의 금속 성분까지도 원본과 거의 동일한데, 이렇게 제작된 기술적 등가물 양태의 작업을, 작가는 ‘변조된 레디메이드(altered readymade)’라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제프 쿤스의 회화 작업 일부는, 입체 작업의 예고편이 되는 것인가? 아니면, 쿤스의 어떤 회화 작업은, 제 입체 작업보다 먼저 현실에 도착한, 물신적 망상의 초상화가 되는 셈이려나?

  • 제프 쿤스 자유의 종(Liberty Bell)

    ⑤ 제프 쿤스(Jeff Koons, 1955-)
    <자유의 종(Liberty Bell)>

    2007년 / 캔버스에 유채 / 259.1×350.5cm / 아테네, 다키스 조아누(Dakis Joannou) 소장

    *1960년대의 작업 특징을 잘 보여주는 망점 회화.

  • 제프 쿤스 자유의 종(Liberty Bell)

    ⑥ 제프 쿤스(Jeff Koons, 1955-)
    <자유의 종(Liberty Bell)>

    2006–14년 / 청동, 연철, 주철, 강철, 나무, 다중 도색 / 에디션 1/3 / 개인 소장

    *원본과 기술적으로 거의 동일한 모사품이다. 작가는 이를 “변조된 레디메이드”라고 부르는데, 미 펜실베니아주 필라델피아시의 자유의종센터에 소장된 원본 자체도 수차례 재주조되고 수리된 흥미로운 역사의 층을 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