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적 매시업 : 이것저것 뒤섞는 예술적 방법
writer 임근준 AKA 이정우(미술 · 디자인 평론가)
오늘의 현대미술가들은 예술적 실험을 지속하기 위해 과거엔 시도하지 않았던, 희한한 형식의 뒤섞기를 시도하곤 한다. 예의 대화와 합의와 동조에 의한 협업이 아니라, 각자의 전형적 방법론을 특정한 전제 조건에 따라 무심하게 재조합하거나, 혹은 제 개인 작업에서도 상호 무관한 이질적인 개념과 요소들을 하나의 조형으로 연결해, 새로운 예술적 시공을 콜라주-연출해내기도 한다. 핵심이 되는 키워드는, 대중음악에서 유래하는 ‘매시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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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의 현대 예술가들이 창작하는 과정을 보면, 예전과 다른 몇몇 작업 방식을 발견할 수 있다. 그 가운데 가장 특징적인 세 가지는 첫째, 조사·연구(research and investigation), 둘째, 피처링(featuring), 셋째, 후반기 작업(post-production)이다. 새로운 세대의 창작자들은 사이비 과학자처럼 몇 가지 가설을 세우고 그를 검증하려는 듯 전제 조건을 세운 뒤, 그에 맞춰 조사·연구를 진행하고, 그를 통해 수집한 데이터를 후반기 작업 과정에서 분석하고 조작해 최종 결과물을 도출시키는 경향을 띤다(그러므로 실제론 과정 그 자체가 작업의 핵심이고, 작업처럼 뵈는 최종 결과물은 그 과정을 유추하도록 이끄는 증거물로 기능하곤 한다).
조사·연구 기반의 작업 방식은, 의사(擬似)-과학적 태도를 통해 작업에 새로운 변수를 부여하고, 소위 천재성과 창조성의 신화에 바탕을 둔 작자의 과도한 자율성을 줄여나가며, 작업 과정에서 결과물을 정확히 예측할 수 없도록 만드는 등, 몇 가지 장점을 지닌다(작업 과정에서 최종 결과를 예측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작가 스스로 작업을 즐기기 위한 편법이 되기도 한다). 반면, 주로 음악가들이 시도하는 피처링은, 타 분야의 창작자들에게도 새로운 협업 방식의 모델이 되고 있다. 본디 피처링은 유명 음악인이 상대적으로 덜 유명한 신인의 음반 작업(의 한 트랙)에 참여하는 일을 뜻했다. 하지만 힙합 문화가 발전하면서 점차 누가 누구를 피처링하는 것인지 알 수 없게 됐고, 표기 방식도 ‘feat.’으로 변했다. 피처링 트랙은 두 음악인의 브랜드 스타일(branded style)이 공히 드러나는 문화적 혼성(cultural hybrid)의 좋은 본보기가 되는 터라, 일부 미술가들은 피처링의 관례를 차용해 예의 공동작업과는 다른 차원의 협업, 즉 호상 간의 특징적 문법이나 대표적 양식화 전략을 강조하는 방식의 협업을 시도하고 있다.
그러나 역시 보다 광범위한 이 시대 작업 환경의 특성은 후반기 작업에 있다. 디지털 작업 환경은 예전에 가능하지 않았던 일을 가능케 하기에, 적잖은 이들이 후반기 작업 과정에서 오리지널 소스-종종 남의 것을 훔쳐와 구성해놓은 아카이브/DB-를 이리저리 편집해 최종 작업 형태를 다양하게 도출시키는 실험을 시도해왔다.그 가운데 가장 특징적인(하지만 이해하기는 쉬운) 실험 방식이, DJ 걸톡(Girl Talk)으로 알려진 그렉 길리스(Greg Gillis, 1981~)의 매시업(mashup)이다. 엔지니어 출신의 음악가인 그는, 남의 히트곡에서 주요 부분(hook-up line)을 따다가 접합선(partingline)이 분명히 드러나는 리믹스를 만들어 전례 없는 메타사운드를 구축했고, 이는 20세기의 대중문화를 DB 삼아 참조적 리믹스를 일삼는 (20)00년대의 힙스터 프로토콜과 결합해 독특한 화학 반응을 일으켰다. 그렉 길리스의 매시업은, 지난 2010년경 무시간성(atemporality)과 경험해보지 못한 과거 혹은 미래를 향한 좀비적 노스탤지어를 특징으로 하는 힙스터-힙을 메인스트림으로 이끌어내, 어떤 문화적 분수령을 이뤘다.
현대미술의 매시업 사례로는 작가와 디자이너의 협업 프로젝트팀인 SMSM을 들 수 있다. SMSM은 그래픽 디자이너 듀오인 슬기와 민, 현대 미술가 듀오인 박미나와 Sasa[44]가 결성한 프로젝트 그룹이다. 슬기와 민은 BMW 구겐하임 연구소를 위해 시민들의 의견 개진에 따라 실시간 변형되는 로고를 제작하는 등, 다이어그램을 활용해 그래픽 디자인의 전형적 문법(시각적 양식이 아니라)을 해체하고 재구성해왔다. 반면, 박미나와 Sasa[44]는 각자 현대미술가로 활동하면서 조사·연구에 기반을 둔 포스트미디엄의 조형 실험을 계속해왔다. SMSM의 프로젝트 작업에서 이들 4인은, 상대의 메소드를 인용·변주하거나, 과감히 아웃소싱을 실행함으로써 미적 판단의 책임을 타인에게 전가하고, 그를 통해 자기-윤리의 금도를 살짝 넘어선 결과(즉, 조금 짓궂은 작업)를 얻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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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에너지!(Energy!)>의 원료가 된 기능성 음료의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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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SM의 프로젝트 <에너지!(Energy!)>(2011)는 제4회 광주디자인비엔날레 출품작으로, 서울에서 광주, 광주에서 서울에 이르는 고속도로 여행의 과정에서 주요 휴게소를 일일이 방문해 유통 중인 기능성 음료를 모두 모으고 목록화한 뒤, 그 모두(총 77종)를 뒤섞어 ‘종합 에너지 칵테일’ <수퍼 하이브리드 에너지(SHE: Super Hybrid Energy)>(총 800점)를 만들고, 개막 당일 면책동의서에 서명한 관객에게 나눠준 이벤트 형태의 기획이었다.
이 작업에서 작가들은, 서울-광주 간 고속도로 통행이라는 과정과 유통 중인 기능성 음료라는 순환의 구조와 기능성 음료에 구현되고 있는 기능 혹은 위약 효과와 비엔날레가 요구하는 이벤트성 작업에의 기대를 비평적 양태로 접붙인 셈인데, 그 접붙이는 방식 또한 매시업이었다는 게 중요하다.
음료수를 강박적으로 수집하고 기록하는 ‘면모’는 본디 Sasa[44] 작가의 것이었고, 사이비 과학자의 자세로 조사·연구를 전개하는 ‘태도’는 박미나 작가의 것이었으며, 수동적 공격성을 유희하는 태도로 주어진 조건에 응대하는 ‘방식’은 “우리의 작업은 ‘컨셉추얼리 리버럴하고, 비주얼리 기회주의적’이다”라고 주장해온 디자이너 듀오 슬기와 민의 것이었다.
최종 전시-디자인도 대체로 기시감이 들도록 남의 것을 차용했다. 과학자처럼 백색의 실험복을 갖춰 입은 작가 4인이 불길한 느낌의 칵테일을 설명하며 관객에게 배포할 때, 뒤로는 원료가 된 기능성 음료가 전시됐는데, 같은 내용물이 네차례, 각각 칼로리, 용량, 인기도, 가격순으로 반복되는 형식이었고, 그 옆으론 각 제품의 광고 카피가 소형 전광판-대체로 편의점에서 널리 사용되는-으로 제시되고 있었다.
① SMSM <에너지! (Energy!)> 2011년
기능성 음료 77종, 수집한 기능성 음료 77종을 모두 혼합한 <수퍼 하이브리드 에너지(SHE: Super Hybrid Energy)>, 의료용 플라스틱 앰풀, 화학 실험용 유리 단지, 테이블, 면책동의서, 실험용 가운, 의료용 장갑 등 가변 크기
<수퍼 하이브리드 에너지>의 에디션은 800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