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OPLE

내 안의 나혜석을 찾아서

주체적인 여성으로 살고자 했던 조선의 나혜석.
그의 삶을 연기하는 세 배우를 만났다.

한 사람을 수식하는 말은 다양하다. ‘조선 여성 최초’, ‘진취적인 예술가’, ‘주체적인 여성’. 이 모든 말은 나혜석을 향한다. 서울시극단 연극 <나, 혜석>에서 나혜석의 삶을 나눠 연기하는 최나라, 박무영, 정새별 3명의 배우. 그들은 나혜석이 되어 우리에게 많은 물음을 던진다.

최나라 배우는 2016, 2019년 <햄릿>을 여성으로 재창작한 <함익>에서 타이틀롤을 맡았다.
<나, 혜석> 역시 여성을 주인공으로 하는 작품이다.

최나라 공연계에는 여성이 타이틀롤인 작품이 많지 않다. ‘함익’이라는 인물을 분석하고 연습하며 끊임없이 고민하고 삶의 모든 것이 <함익>으로 채워지기도 했다. 잘 해내지 않으면 다음 여자 타이틀롤이 나오기 힘들 수도 있다는 부담감과 사명감으로 임했던 작품이었다. <나, 혜석> 역시 여성을 중심으로 하는 작품이고, 나혜석에 대한 평가가 다양하기 때문에 그의 사고를 관객이 공감할 수 있게 만드는 게 어려울 수 있다는 점에서 또 부담으로 다가온다.

주체적인 여성으로 살고자 했던 조선의 나혜석.그의 삶을 연기하는 세 배우를 만났다.

배우 최나라는 고뇌와 핍박과 설움의 시기의 뜨겁고 용감했던 나혜석을 연기한다.

박무영, 정새별 배우는 객원으로 참여하게 됐다.

정새별 <나, 혜석> 작가인 한송희 배우와 친구이자 대학 동기다. 하루는 그 친구 집에 놀러 갔는데 나혜석 관련 책이 많아서 뭐냐고 물었더니 이 작품을 한다고 하더라. 얘기는 안 했지만 내심 하고 싶었고, 제안이 들어왔을 때 냅다 수락했다.(웃음)
박무영 서울시극단은 믿고 있는 단체였기 때문에 어떤 작품이든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사실은 나혜석이 아니라 이모나 아주머니 역을 맡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혜석을 한다고 해서 ‘아싸!’라고 생각했다.(웃음)

세 배우가 각각 초년(정새별), 중년(최나라), 말년(박무영)의 나혜석을 연기한다.
나혜석을 만들면서 어려운 지점은 무엇이었나?

최나라 나혜석의 당찬 발언과 행동들이 내가 맡은 시기에 응축되어 있다. 고뇌와 핍박과 설움의 시기를 연기한다.(웃음) 나혜석은 조선 사회에 뿌리 깊게 박힌 불평등에 저항했고, 그의 행동이 시초가 되어 많은 사람이 지금도 사라지지 않은 불합리에 맞서 행동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연습을 할수록 알게 되는 건 그 역시 일반적인 사람이었다는 거다. 조금 더 뜨겁고 용감했을 뿐인데, 이 지점이 잘 드러났으면 좋겠다.
정새별 나혜석의 어린 시절은 많은 선택지가 놓여 있던 진취적이고 희망적인 시기인 것은 맞다. 하지만 어릴 때 쓴 글들에서도 당시의 여성들이 선택하지 않는 길을 가는 것에 대한 고민과 갈등이 보인다. 진취적인 모습 이면의 고민들도 잘 표현해야 할 것 같다.
박무영 나혜석은 초년 빼고는 외로움과 억압 속에서 살았지만, 말년은 가장 고독한 시기다. 특히 자식을 끝까지 돌보지 못하고 보고 싶을 때 보지 못하는 엄마의 불안함에 많이 공감했고, 이 마음을 짧은 분량에 어떻게 담아낼지가 고민이다.

주체적인 여성으로 살고자 했던 조선의 나혜석.그의 삶을 연기하는 세 배우를 만났다.

배우 정새별은 나혜석의 진취적인 모습 이면의 고민들을 표현하겠다고 말한다.

각기 다른 시기를 연기하지만, 결국 한 인간의 궤적을 담는 작품이다.
나혜석이 생애에 걸쳐 갖고 있는 정서는 무엇인가?

최나라 연출가님이 진취적일 때도 고립되어 있을 때도 뭔가 불안해 보일 것 같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당사자가 아무리 확신에 가득 차 있어도 그 자체로 불안해 보일 때가 있고, 그것은 당사자의 내면이기도 하지만 주로 외부의 시선인 경우가 많다. 그 불안함 혹은 불안정이라는 정서를 셋 모두 공감했던 것 같다.
정새별 누군가가 호기심이 많으면 ‘궁금한 게 많구나?’라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그 탐구하는 모습을 피곤하게 여기는 이들도 있으니까.

그 외에도 나혜석에게 공감하는 지점이 있을까?

정새별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나혜석을 두고 세상은 이기적이라 말한다. ‘그런데 남들이 세운 규정에 맞게 살지 않는다고 나쁘다는 이야기를 들을 이유가 있나?’ 같은 질문이 생겼다.
최나라 정새별 배우가 공유한 영상이 있다. 쪽찐 머리를 한 1920년대 여성들이 빨래를 기계처럼 하고 있었다. 그 모양새가 찍어낸 것처럼 똑같아서 소름 끼치게 무서웠다. 왜 결혼한 여성은 무조건 머리를 틀어 올려서 유부녀와 처녀를 구분해야 하지? 여성성에 대한 고민과 질문을 하긴 했지만, 이 작품을 하면서 정말 폭발적으로 하게 됐다.(웃음)
박무영 사실 나는 애를 낳는 순간 그동안 해왔던 모든 것이 멈출 거라는 두려움에 아이를 원하지 않았다. 남편이 낳기만 하면 자기가 다 키워줄 테니 공연하라는 말을 했다. 나혜석은 끝까지 자기 일을 포기하지 않는데, 나 역시 내 일을 포기하지 않을 거라는 선전포고를 하고 결혼했다. 아이 엄마이기도 해서 아이 기르는 어려움에 대한 글을 보며 200% 공감했다.

주체적인 여성으로 살고자 했던 조선의 나혜석.그의 삶을 연기하는 세 배우를 만났다.

배우 박무영은 현재를 살아가는 수많은 나혜석에게 응원의 메시지를 전한다.

나혜석은 불합리에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었다. 세 배우는 어떤가?

최나라 서울시극단에서 총무를 맡으면서 그렇게 됐다.(웃음) 30대 중반 이후로는 목소리를 내고 있지만, 어린 시절 나혜석이 했던 고민을 지금 내가 하고 있다. 내 생각이 옳다고 해서 소리를 내는 게 맞는지, 나는 어떻게 할 것인지.
정새별 어떤 주장을 할 때 너무 많은 사람을 살피고, 다른 사람은 다른 생각을 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굉장히 조심스럽다. 그런데 대본을 볼수록 ‘나에게 나혜석 같은 부분이 없는가?’ 혹은 ‘나는 어떤 목소리를 내고 싶지?’ 같은 질문이 생겨나면서 나를 더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박무영 잘 얘기하는 사람이었다. 20대 초반에 한 연출가가 “야 이년아”라고 한 적이 있다. 나이가 많은 연출이 나이가 적은 배우에게 한 일이었다. 누군가는 “연출이 쌍욕 할 수도 있지”라고도 말했다. “‘야 이년’ 취급받으면서 공연하고 싶지 않습니다”하고 바로 짐 싸서 연습실을 나왔다. 다른 연출가에게 뺨을 맞은 적도 있다. 가슴이 다 드러나는 시스루 민소매 의상을 가져와서 입어야 한다고 했다. 왜 입어야 하냐고 물으니 “입으라면 입지 어디 버르장머리 없이”라는 말이 돌아왔다. 여러 번의 물음과 변함없는 대답에 못 입겠다 했더니 바로 뺨을 때렸다. 나이가 어리고 여자 후배라는 이유로 폭력을 가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 후로 ‘버릇없고 제멋대로’라는 소리도 들었고, 한동안 공연을 못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그때도 지금도 불합리한 것은 바로 얘기한다.

주체적인 여성으로 살고자 했던 조선의 나혜석.그의 삶을 연기하는 세 배우를 만났다.

연극 <나, 혜석>에서 나혜석을 시대별로 연기하는 정새별, 최나라, 박무영(왼쪽부터).

마지막으로 이 작품을 통해 관객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나?

정새별 누군가는 깊이 공감하고 누군가는 ‘그래서 뭐?’라고 할 수도 있다. 그 이전에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가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한 인간의 과정을 지켜봐 준다면 좋겠다.
최나라 만약 나혜석이 현재에 존재했다면, ‘여성 인권’ 대신 ‘불합리’, ‘불평등’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았을까 싶다. 말이나 행동의 표면만을 보고 판단하기보다는, 그가 던진 질문이 뭔지 생각해 주면 좋겠다. 작품을 준비하면서 <세상을 바꾼 변호사>, <라라 걸>, <밤쉘> 등의 영화를 봤다. 2016년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밤쉘>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불평등의 문제는 여전하다. 나혜석은 다양한 세계에서 내면적 활동성이 강한 여성들을 봤고 조선도 그랬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 외치기 시작했다. 이해 여부를 떠나서 지금도 계속 던져지는 나혜석의 질문에 공감하며 함께 소리를 낸다면, 수많은 불평등도 사라지지 않을까.
박무영 세상에는 누군가의 딸, 아내, 어머니로 현재를 살아가는 수많은 나혜석들이 있다. 그들은 하고 싶은 일, 하고 싶었던 꿈을 포기하는 경우가 있다. 그게 상황 때문이라면 이해하지만, ‘여자이기 때문’이라면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_장경진(공연 칼럼니스트, 월간 <여덟 갈피> 콘텐츠 디렉터)
사진_김대진(지니에이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