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GE

기기묘묘한 치유의 춤

서울시무용단 〈기기묘묘 춤약방〉을 통해 내년 공연될 〈키스〉의 면면을 먼저 만나봤다.

엘리자베스 키스를 아시나요? 색동옷을 입은 아이들과 떠들썩한 잔치가 열리는 어느 시골 마을의 풍경, 달빛의 푸른 어스름 속 모습을 드러낸 동대문까지. 키스는 20세기 초반 한국의 풍경과 풍속을 다수의 목판화로 남긴 영국의 여성 화가입니다. 키스가 처음 한국을 찾은 건 3·1 운동의 열기가 한창이었던 1919년 3월이라고 합니다. 그는 1946년 발간한 작품집 <올드 코리아(Old Korea)>에서 3·1 운동 당시 한국인에게 받은 깊은 인상을 털어놓기도 했는데요. 그런 첫 만남 후 한국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이 담긴 작품을 다수 남겼습니다.
100여 년의 시간이 흘렀기 때문일까요. 키스가 그린 20세기 초 한국은 익숙한 듯하면서 생경하기도 합니다. 오래전 이곳을 찾은 한 이방인의 시선에 2021년을 살아가는 나의 시선을 겹쳐봅니다. 낯선 땅에 대한 호기심과 애정이 묻어나는 그의 그림을 춤으로 표현하면 어떨까요? 서울시무용단이 엘리자베스 키스의 그림에서 모티프를 얻은 창작 무용극 <키스>를 내년 하반기 선보입니다. 키스가 한국에서 활동했던 일화와 그의 눈을 통해 본 당시의 시대상을 춤의 언어로 되살린 공연입니다. 12월 7~8일 세종문화회관 무대에 오른 신작 쇼케이스 <기기묘묘 춤약방>을 통해 내년 공연될 <키스>의 면면을 먼저 만나봤습니다.

공연은 학의 형상을 한 무용수의 신비로운 춤으로 시작된다.

기기묘묘한 춤의 묘약을 전합니다

<기기묘묘 춤약방>이라는 기기묘묘한 이름으로 공개된 쇼케이스엔 내년 <키스> 공연에서 사용될 ‘굿’, ‘지게놀이’, ‘빨래터 춤’, ‘상여놀이’ 등의 소품이 담겨 있습니다. 서울시무용단은 작년부터 다음 해 신작을 먼저 쇼케이스 무대로 선보여 완성도를 끌어올리는 사전제작 시스템을 도입했습니다. 올해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을 과감하게 물로 채운 대작 <감괘> 역시 지난해 12월 쇼케이스 <더 토핑>으로 관객과 먼저 만났죠. <기기묘묘 춤약방>의 안무와 연출 역시 2022년 정기공연 <키스>에 반영하는데, 단순 쇼케이스를 넘어 서사를 갖춘 온전한 공연으로 무대에 올랐습니다.
막이 오르고 관객이 처음 만나게 되는 것은 학의 형상을 한 무용수의 춤입니다. 막 날아오르려는 듯 어깨를 들썩이기도, 고고하게 목을 뽑기도 하는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통 검은 옷을 입은 무용수들이 학을 원형으로 둘러쌉니다. 그 모습이 마치 위태로운 인간 세상에 잠시 내려온 어떤 존재를 반기는 의식 같기도, 신성한 제의 같기도 합니다. 학이 허공에서 날갯짓을 하듯, 세상을 유영하는 신비로운 춤의 향연이 시작되는 순간입니다.
공연은 이 프롤로그를 시작으로, 총 4개의 소품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각 장별로 한수문, 김진원, 전진희, 김성훈 4명의 안무자가 안무를 맡았습니다. 경기도 당굿과 양구·공주의 지게놀이, 상여놀이 등 우리 전통 춤을 소재로 하면서도 세련되고 현대적인 춤사위를 보여줍니다.

<기기묘묘 춤약방>이란 제목은 어린 만신이 빚는 기기묘묘한 치유의 약에서 비롯했다.

낯설고도 익숙한 한 세기 전 풍경

한수문이 안무한 1장 ‘약을 빚다’에선 무복 차림의 어린 만신이 등장합니다. <기기묘묘 춤약방>이란 제목은 이 만신이 빚는 기기묘묘한 치유의 약에서 비롯했습니다. 세상을 굽어보듯 지긋이 바라보던 만신은 무언가 결심한 듯 부채를 펴고 방울을 흔들며, 부정한 기운을 씻어내는 활춤을 추기 시작합니다. 전통 악기를 사용하면서도 이국적이고 무속적인 느낌의 음악, 음악에 신비로운 분위기를 더하는 여성의 내레이션, 에너지가 가득한 무용수들의 춤사위가 어우러져 한바탕 신명나는 치유의 의식이 벌어집니다. 만신은 신성한 기운을 모아 빚은 약을 학에 목에 매달아 세상에 보냅니다.
그렇게 조제한 약이 당도한 곳은 어디일까요. 그곳은 자신의 몸집보다 거대한 등짐을 힘겹게 짊어진 어느 지게꾼의 일터이기도 하고, 어느 화창한 날 아낙들이 모여 앉은 빨래터이기도 합니다. 이어지는 소품들에선 20세기 초반 엘리자베스 키스가 목격했을 법한 소박하고 다정한 풍경들이 펼쳐집니다. 2장 ‘일하는 그대에게’(김진원 안무)와 3장 ‘망설이는 그대에게’(전진희 안무)는 한국 춤의 멋과 흥으로 삶의 희로애락을 표현합니다. 남성 무용수들이 지게꾼으로 등장하는 2장은 강원도 양구와 충청남도 공주에서 전승된 민속놀이인 지게놀이를 모티프로 소박하지만 여유와 풍류가 가득한 춤을 보여줍니다.
빨래터의 여인들을 그린 3장은 아주 재치 있는 춤을 선보입니다. 빨래 바구니를 이고 사뿐하게 등장하는 무용수들은 저마다 자신만의 방법으로 옷감을 두드리고, 쥐어짜고 밟으며 빨래를 합니다. 그 동작 하나하나가 춤이 됩니다. 이 여인들의 공간에 빨랫감을 안고 쭈뼛쭈뼛 망설이며 등장하는 한 남자도 있네요. 그의 서툰 빨래질에 웃고 가르쳐 주며, 분위기는 더 유쾌해집니다.

빨래터의 여인들은 재치 있는 춤으로 분위기를 유쾌하게 만든다.

세상을 위무하는 치유의 춤

빨래터의 왁자한 풍경이 사라지면, 상여의 종소리가 어둠 속 공연장을 울립니다. 종소리와 함께 망자를 보내는 상여놀이가 시작됩니다. 현대무용가 김성훈이 안무한 4장 ‘저승 가는 그대에게도’는 시각적으로 강렬한 경험을 관객에게 선사합니다. 가장 많은 무용수가 한꺼번에 무대에 오르지만, 이들의 얼굴을 가린 검은 천은 죽음 앞에선 모두가 혼자일 수밖에 없음을 은유하는 듯합니다. 상실과 비통을 온몸으로 표현한 춤사위는 한껏 격렬해지다가, 이내 죽음을 받아들인 듯 담담해지기도 합니다. 누군가는 고개를 숙이고, 또 누군가는 양손을 가슴께에 꼭 모아 쥐고, 다른 누군가는 체념한 듯 터덜터덜 걸으며 상여를 뒤따릅니다. 곧이어 망자를 보내기 위한 제의가 시작됩니다.
쇼케이스의 마지막 무대는 이렇듯 죽음의 길목을 그리고 있지만, 그 길이 마냥 어둡지만은 않습니다. 오히려 동시대 수많은 이들의 죽음과, 그 죽음 뒤에 남겨진 이들을 위무하는 춤으로 느껴졌습니다. 이 춤의 모티프가 된 ‘상여놀이’ 자체가 남은 이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출상(出喪) 전날 빈 상여를 메고 풍악과 노래를 하는 민속놀이라고 하죠. 팬데믹으로 수많은 이들이 생을 등지고 남은 이들의 일상도 멈춰버린 오늘의 풍경은 시간이 흐른 뒤 어떤 모습으로 기억되고 기록될까요. 전통을 바탕으로 동시대와 호흡하는 한국 춤의 오늘을 확인할 수 있는 공연입니다.

<기기묘묘 춤약방>을 통해 만난 치유의 춤은 더 발전된 모습으로 내년 <키스>에서 만날 수 있다.

신비로운 학의 등장으로 시작된 공연은 다시 세상을 치유하는 학의 날갯짓으로 막을 내립니다. 세상을 치유할 힘을 가진 것은 어린 만신이 빚었다는 기기묘묘한 약이 아니라, 이 공연처럼 동시대 관객과 함께 호흡하는 춤과 예술 그 자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기묘묘 춤약방>이 보여준 치유의 춤이 어떻게 발전해 내년 <키스>의 무대에 오를지, 벌써 기대가 됩니다.

베토벤 탄생 250주년이자 엄청난 시련을 겪고 있는 2020년. 서울시합창단과 서울시유스오케스트라가 베토벤이 영혼으로 직조한 난관 극복기를 들려준다.
베토벤 탄생 250주년이자 엄청난 시련을 겪고 있는 2020년. 서울시합창단과 서울시유스오케스트라가 베토벤이 영혼으로 직조한 난관 극복기를 들려준다.

서울시유스오케스트라와 함께 연주할 바이올리니스트 송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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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유스오케스트라와 함께 연주할 바이올리니스트 송지원.

베토벤 탄생 250주년이자 엄청난 시련을 겪고 있는 2020년. 서울시합창단과 서울시유스오케스트라가 베토벤이 영혼으로 직조한 난관 극복기를 들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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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 탄생 250주년이자 엄청난 시련을 겪고 있는 2020년. 서울시합창단과 서울시유스오케스트라가 베토벤이 영혼으로 직조한 난관 극복기를 들려준다.

서울시유스오케스트라와 함께 연주할 바이올리니스트 송지원.

_선명수(경향신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