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GE

혜석의 선택

서울시극단의 기대작 〈나, 혜석〉은 세상의 부조리에 맞서 고달프지만 주체적인 삶을 선택한 나혜석의 인생을 입체적으로 조명한다.

최초. 이 단어에서 발견되는 감정은 여럿이다. 대체로 감탄인 경우가 많지만,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선택하고 실행해 기어이 이뤄내는 과정 자체의 어려움이 먼저 떠오르는 때도 있다. 나혜석이 그렇다. 조선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로 불렸으나, 삶의 모든 순간이 평가로 점철된 철저히 대상화된 인물. 그의 주장들은 맥락이 사라진 채 자극적인 문장으로만 기억되거나, 받아들이는 이들의 목적에 맞춰 납작하게 그려졌다. 서울시극단의 연극 <나, 혜석>은 나혜석이 이룬 성취나 행려병자로 생을 마감한 비극적 최후가 아닌, 그 길에 이르기까지의 고민을 담으며 동시대와의 만남을 시도한다.

일생 동안 마주한 의문, 불평등

<나, 혜석>은 50대의 나혜석(박무영)으로부터 시작한다. 가족과 친구 같은 친밀한 인간관계는 산산조각 났으며, 그는 ‘나혜석’ 대신 ‘최고근’으로 불리며 보육원에서 살아간다. 지독한 고독과 마음을 따라가지 못하는 몸 상태에도 그는 자신의 생각을 여전히 글과 그림으로 담아내며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 작품은 보육원에서 일하는 박인경(한송희)이 우연히 나혜석의 글을 옮겨 적으며 회고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그의 삶은 연대기적 구성이 아닌, 살면서 의문을 가졌던 요소들을 중심으로 재배치됐다. 나혜석이 평생토록 지적한 것은 사회적 불평등이었으며, 그중 다수는 가부장제에 대한 비판이었다.

서울시극단의 기대작 은 세상의 부조리에 맞서 고달프지만 주체적인 삶을 선택한 나혜석의 인생을 입체적으로 조명한다.
서울시극단의 기대작 은 세상의 부조리에 맞서 고달프지만 주체적인 삶을 선택한 나혜석의 인생을 입체적으로 조명한다.

<나, 혜석>은 나혜석의 글을 옮겨 적으며 회고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상대적으로 자유롭고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나혜석은 스스로의 선택으로 선택지가 없는 여성의 삶을 보여주었다. ‘도쿄여자미술학교 최초의 조선인’과 ‘조선 최초로 구미 여행에 오른 여성’이라는 타이틀에서 알 수 있듯, 다수의 여성에게는 배움과 여행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거부가 불가능했던 결혼과 임신, 출산, 양육은 지위고하를 떠나 모든 여성에게 강요되었다. 나혜석 역시 이 굴레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는 만삭의 상태로 개인전을 열고 막내를 낳은 지 2주 만에 인터뷰를 하며, 여성에게도 자유와 성공에 대한 욕망이 존재함을 증명해낸다.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은 논의조차 되지 않던 시절, 나혜석은 언제나 상대보다 더 가혹한 비난을 받았다. 대신 그는 이혼고백장과 정조유린소송을 통해 자신의 추락과 대비되는 상대 남성의 비정상적인 성공과 사회의 이중 잣대를 비판했다.

서울시극단의 기대작 은 세상의 부조리에 맞서 고달프지만 주체적인 삶을 선택한 나혜석의 인생을 입체적으로 조명한다.
서울시극단의 기대작 은 세상의 부조리에 맞서 고달프지만 주체적인 삶을 선택한 나혜석의 인생을 입체적으로 조명한다.

나혜석은 여성에게도 자유에 대한 욕망이 존재함을 증명하며 사회의 이중 잣대를 비판했다.

힐난 속에서 더 단단해진 의지

세상을 향한 나혜석의 외침은 여전히 통쾌하고 유효하다. 하지만 연극은 매 순간 그가 가졌을 양가적 감정과 고민에도 주목한다. 나혜석의 시도들은 정반대의 목소리로 되돌아왔다. 관습에 도전하며 얻어낸 기회들에는 ‘유별나다’는 힐난이 함께였고, 칭찬을 빙자한 지적과 평가가 이어졌으며, ‘예술가’ 대신 ‘여성’이라는 정체성에만 집중되어 사생활이 소비되었다. 비난의 목소리에는 상처도 받았고, 제 안의 모순을 발견할 때면 자신을 탓했다. 그러나 작품은 분노하는 나혜석을 통해 그가 언제나 새로운 것을 알고자 하고 자신에게 솔직하고자 애쓴 인간이었음을 말한다. 세상의 부조리를 자각하고, 문제를 구체적으로 지적하며, 변화를 요구하는 과정은 삶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개인의 의지이기도 했다.

특히 <나, 혜석>은 정새별, 최나라, 박무영이라는 세 배우를 통해 10대부터 50대까지의 시간을 그린다. 이들은 종종 서로 스치며 지나가거나 상대를 바라보고 마주한다. 이러한 방식은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를 상상하는, 나혜석 안의 투쟁을 보여준다. 타인의 시선이 아닌 자신과 싸우는 나혜석을 통해 우리는 스스로를 믿고 자신과 화해하며 성장하는 인간의 강인함을 발견한다. 작품은 현실의 고통을 딛고 일어서려는 의지 자체가 가장 중요한 것임을 말하는 셈이다.

서울시극단의 기대작 은 세상의 부조리에 맞서 고달프지만 주체적인 삶을 선택한 나혜석의 인생을 입체적으로 조명한다.

이번 작품에서 나혜석을 연기하는 정새별, 최나라, 박무영 배우(왼쪽부터).

세상의 변화는 개인의 변화로부터

자신의 경험을 개인의 문제로 그치지 않고 공적 발화한 나혜석의 용기는 더 넓은 곳까지 뻗어나간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이라는 말 그대로, 나를 위한 목소리는 모두를 위한 구호가 된다. <나, 혜석>에는 여성독립운동가로 활동한 김마리아와 최초의 여성 기자였던 최은희가 등장한다. 연극은 그들의 존재를 조명함과 동시에, 이들과 나혜석의 교류를 통해 나혜석의 발언들이 개인의 성정에 의한 것만이 아닌, 다양한 이들과 함께 배우고 고민한 결과임을 보여준다. 나혜석의 삶은 그의 과거를 되짚어온 박인경의 선택으로 이어진다. 연극은 보이지 않는 서로의 밀고 당김이 세상의 변화를 견인한다고 말한다.
배우들 역시 나혜석의 고민과 선택에서 함께 질문하고 다짐하며 꿈을 꾼다. “남들이 세운 규정에 맞게 살지 않는다고 해서 나쁘다는 이야기를 들을 이유가 있을까?”(정새별), “지금도 계속 던져지는 나혜석의 질문에 공감해 함께 소리를 낸다면 수많은 불평등도 사라지지 않을지”(최나라), “‘여자이기 때문에’ 자신의 일과 꿈을 포기하지 않기를”(박무영).

서울시극단의 기대작 은 세상의 부조리에 맞서 고달프지만 주체적인 삶을 선택한 나혜석의 인생을 입체적으로 조명한다.

나혜석의 삶은 연대기적 구성 대신 그가 살면서 의문을 가졌던 요소를 중심으로 재배치된다.

서울시극단 <나, 혜석>은 10년간 함께 해온 한송희 작가와 이기쁨 연출가 콤비의 작업으로 오래전부터 기대를 모았다. 이들은 고전을 재해석한 <헤라, 아프로디테, 아르테미스>, <줄리엣과 줄리엣>, <헤카베>에서 여성의 모순과 고민, 선택을 그려냈다. 매 작품을 통해 동시대의 문제를 재확인하고 함께 고민하며, 어제보다 나은 오늘을 무대에 올린다. <나, 혜석> 역시 인간의 복잡한 내면을 입체적으로 다룬다. 관객은 연극을 통해 나혜석이 나와 다른 먼 존재가 아니라, 의문을 갖고 고민하고 살아있는 인간임을 자연스레 느끼게 될 것이다.
세상의 변화는 개인의 변화로부터 시작한다. 가장 가까운 곳의 불평등을 의식하고, 사고하며, 목소리를 함께 모을 때 비로소 세상은 조금씩 전진한다. <나, 혜석>이 누군가에게는 그 시작이 되길 바란다. 9월 22일 개막 예정이었던 <나, 혜석>은 현장 공연 대신 10월 26일 저녁 8시, 온라인 중계로 공개될 예정이다.

_장경진(공연 칼럼니스트, 월간 <여덟 갈피> 콘텐츠 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