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ST175

나의 공연은 위로의 손길이다

작가 정여울은 고단한 일상 속 지친 마음을 치유하는, 오아시스 같은 공연을 사랑한다.

복잡한 도심 한복판에서 아름다운 오케스트라 공연이나 오페라를 볼 수 있다는 것은 내게 일상의 거친 사막 한가운데서 발견하는 눈부신 오아시스다. 오래전 ‘과연 내가 내 꿈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살아갈 수 있을까’하는 두려움을 안고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오케스트라 공연을 본 적이 있다. 오랫동안 좋은 글을 쓰는 작가가 되고 싶었지만 과연 나에게 재능이 있을지, 재능을 꽃피울 수 있는 뚝심이 있는지, 확신이 없던 때였다. KBS 교향악단의 라흐마니노프 협주곡 연주였는데, 연주를 감상하는 내내 사막처럼 황폐한 내 마음속에서 형언할 수 없는 그리움의 샘물이 끝없이 솟아 나오는 느낌이었다. 나는 이런 순간을 그리워하고 있는 줄도 몰랐다.

나는 그때 그 음악을 들으며 비로소 깨달았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나는 간절하게 그리워하고 있었음을. 아름다운 음악을 들으며 일상의 모든 슬픔을 잊을 수 있는 시간을. 낮에는 학교에서 수업을 듣고 저녁에는 학원에서 강의를 하고 깊은 밤이 되어서야 졸린 눈을 비비며 간신히 글을 쓸 수 있었던 시절. 온갖 ‘열정페이’와 각박한 세상을 향한 공포에 지쳐버린 내 영혼의 발걸음이 잃어버린 모든 아름다움이 그 음악 속에 깃들어 있었다.

그 후로 나는 조금씩이라도 틈이 날 때마다 공연을 관람하는 시간을 갖기로 마음먹었다. 가장 저렴한 좌석에서 졸린 눈을 비비며 공연을 관람하더라도, 그저 좋았다. 나는 눈부신 예술과 함께 하는 그 찰나의 시간을 소중히 여기게 되었다. 지친 나를 위한 최고의 선물은 뭔가 새로운 상품을 구입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의 아름다움을 가슴 깊숙이 호흡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체험하는 일임을 알게 되었다.
세종문화회관은 모든 시민을 위해 열린 복합문화공간의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음악, 미술, 연극, 오페라, 각종 전시 등 그야말로 다채로운 예술작품을 언제든지 향유할 수 있는 장소다. 이 장소를 진정한 축제적 공간으로 만드는 것은 ‘그곳에서 예술의 기쁨을 느끼는 사람들’의 마음이다. 아무리 멋진 공연과 전시를 기획해도 사람들이 보러 오지 않는다면, 그 장소의 아름다움은 한 번도 펼치지 못한 아름다운 공작새의 날개처럼 쓸쓸한 존재가 된다.

셰익스피어의 희극 <햄릿>을 재해석한 연극 <함익>

나는 공연과 전시를 관람할 때마다 마음속에 깊이 되새기곤 한다. ‘예술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너무도 아름답고 소중한 마음의 권리’를 잊지 말아야 한다고. 아름다움은 항상 우리 곁에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눈을 크게 뜨고, 부지런히 신발을 신고 밖으로 나서지 않는 한, 아름다움은 그저 안타까이 우리 곁을 빠르게 스쳐 지나갈 뿐이다. 시민들이 언제든 예술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권리를 찾을 수 있도록, 더욱 다채롭고 매혹적인 자극을 줄 수 있는 장소들이 많아질 때, 온갖 미디어의 자극과 삶의 고단함에 지친 사람들이 ‘예술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는 장소’의 치유적 효과는 더욱 커질 것이다. 

아름다운 예술이 주는 치유의 효과는 고단한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려주는 친구의 손길을 닮았다. 아픈 사람의 어깨를 주물러주는 치료사의 손길처럼, 하루 종일 감정 노동에 지친 엄마의 발을 주물러주는 소년의 손길처럼, 예술은 우리 몸 속에 있는 줄도 몰랐던 고통을 끄집어내어 ‘여기가 아프신가요?’하고 묻는 것만 같다. 얼마 전 세종문화회관에서 연극 <함익>을 봤을 때도 그랬다. 햄릿의 후예로 그려진 함익 박사처럼, 우리는 ‘상처 입지 않은 척 멀쩡하게 살아가는 연기를 하는 자아’와 ‘도저히 상처를 치유할 수 없는 내면의 자기’를 함께 안고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함익이 자신의 그림자 인격인 ‘익’과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나는 내 안의 ‘사회적 자아’와 ‘내면의 자기’가 친밀하게 대화를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오페라 <베르테르>를 볼 때도 가슴이 저릿했다. 영원히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안고 세상을 떠나가는 베르테르의 슬픔이,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머나먼 낯선 땅의 젊은이가 느낀 아픔이, 바로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저마다의 슬픔과 따스한 교집합을 이룰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술은 바로 그런 면에서 ‘모든 것들을 이어주는 존재’다. 내가 겪어본 고통과 결이 다를지라도, 마치 작품 속 주인공의 아픔이 내 아픔인 것처럼 느껴지는 것. 예술의 프레임 속에서는 모든 것이 이해된다. 우리와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지구 반대편의 온갖 파란만장한 이야기도, 예술의 프리즘을 거치면 모든 것이 ‘이해 가능한 것, 공감할 수 있는 것’이 된다. 바로 그렇게 예측 불가능한 모든 상황들 속에서 타인의 고통받는 마음에 대한 공감 능력을 키울 수 있는 것이야말로 오늘날의 예술이 감성이 메마른 사회를 향해 선사하는 마음의 축복이다.

쥘 마스네의 오페라 <베르테르>의 서울시 오페라단 공연

예술은 일상의 타성에 젖어 규격화된 의식을 깨뜨려주고,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세상’이 누군가의 피땀과 눈물이 일구어낸 눈물겨운 작품임을 일깨워준다. 삶을 치유할 수 있는 힘을 예술의 아름다움에서 얻을 때마다, 우리는 더욱 뜨겁게 ‘삶에 대한 사랑’을 느낄 수 있게 된다. 다른 그 무엇도 아닌 예술이 필요한 시간은 바로 예술의 손길이 내 지친 등짝을 두드려주는 순간이다. 아름다운 음악을 들을 때, 그냥 스쳐 지나갈 수 없는 그림 앞에 속수무책으로 한참 동안 서 있을 수밖에 없을 때, 너무 몰입해서 시간과 공간과 휴대폰조차 잊게 만드는 공연을 볼 때. 그 순간만은 일상의 모든 감정 노동과 불편한 인간관계와 아직 해결하지 못한 수많은 인생의 문제가 눈 녹듯 사라져버리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몰입과 도피의 시간이 끝나고 나면 나는 더 지혜롭고 강인해진다. 아름다운 공연과 함께하는 순간, 나는 예전보다 훨씬 더 크고 깊고 자유로운 사람이 되어, 나의 고통뿐 아니라 타인의 고통을 치유할 수 있는 더욱 따스한 사람이 된다.

우리는 예술을 통해 분명 더 품격있는 삶, 더 아름답고 향기로운 삶을 누릴 권리가 있다. 삶에 지친 사람들, 온갖 동영상과 이미지와 미디어의 홍수 속에서 지친 사람들에게 예술의 아름다움은 더 큰 그리움으로 귀환환다. 아름다움은 항상 우리 편이다. 우리가 예술의 아름다움을 놓치지 않을 준비가 되어 있다면.

글 | 정여울_<빈센트 나의 빈센트>, <내가 사랑한 유럽 TOP10>을 쓴 작가이자 문학평론가다. KBS 제1라디오에서 ‘백은하의 영화관, 정여울의 도서관’을 진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