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GE

무대 위의 심판

재판을 통해 인간의 이중성을 꼬집는 뮤지컬 <베니스의 상인>을 감상하기 전 살펴보면 좋은 뮤지컬 속 재판 장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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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재판은 다양한 콘텐츠에서 갈등을 그려내는 데 탁월하게 쓰인다. 그중에서도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은 재판을 다룬 대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베니스의 거상인 안토니오는 친구의 구혼 자금을 유대인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에게 빌린다. 담보는 심장에서 가장 가까운 부위의 살 1파운드. 기간 내 돈을 갚지 못한 안토니오에게 샤일록은 “증서대로”를 외치고, 결국 이 분쟁은 재판으로까지 이어진다.
이 재판에서 안토니오 측은 샤일록의 자비 없음을 비난하며 계약 위반이라는 팩트를 감추고, 담보 집행 과정에서 한 방울의 피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궤변을 늘어놓으며 위기를 모면한다. 상대의 약점을 발견한 후에는 이를 이용해 상황을 역전시키기까지 한다. 샤일록은 베니스인들을 향해 “네가 베이는 것은 살 한 점이지만, 내가 베는 것은 너희들의 허영과 오만”이라 지적한다. 그러나 이방인이자 소수자인 그가 재판에서 이기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베니스의 상인>은 샤일록의 이야기를 통해 가장 공정해야 하는 재판에서조차 배제되는 소수의 삶을 그려내는 셈이다.

 

 
뮤지컬 <시카고>는 20세기 초 카운티 공판의 실화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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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에 대한 불신과 비판은 뮤지컬 <시카고>에서도 발견된다. <시카고>는 1926년 실제 있었던 쿡 카운티 공판에서 영감을 받아 재탄생된 작품으로, 가수 지망생이었던 록시 하트가 자신의 정부를 죽이고 감옥에 들어오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살인이 쇼이던 시대, <시카고>는 록시와 변호사 빌리의 재판과정을 통해 당시의 사법체계를 조롱한다. 록시의 재판 전 기자회견을 다룬 노래 ‘We Both Reached For The Gun’이 대표적이리라.
록시는 빌리가 꾸며낸 개인사를 통해 언론의 동정심을 끌어내고 순식간에 시카고의 스타가 된다. 이후 계속되는 재판에서도 빌리는 뇌물로 판사와 증인을 매수하고, 과장된 액션, 사건과 관계성이 얕은 자극적인 내용을 앞세워 록시의 무죄를 받아낸다. <시카고>의 서사는 재판 그 자체에 있다. 그러나 농염한 재즈 선율과 독특한 춤에 이끌려 관객은 종종 이것이 ‘살인사건’이라는 팩트를 잊고, 어느새 이 해괴한 재판에 동조한다. 이러한 관객의 반응 또한 <시카고>가 계획한 조롱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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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판이 품는 다양한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우리가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유일한 장소는 법정일 수밖에 없다. 뮤지컬 <영웅>의 ‘누가 죄인인가’는 이 사실을 가장 직관적으로 그린다.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후 이어진 실제 재판을 재현한 무대는 뜨거운 분노로 가득하다. 그는 자신의 행동에 대한 이유를 조목조목 밝히고, 한국인임에도 일본법에 의해 재판을 받아야 하는 상황을 지적하며 당당함으로 맞선다. 이 장면은 죽음보다도 당시 한국인이 처한 상황을 세계에 알리는 것이 더 중요했던 안중근의 결심을 고스란히 담아내며 <영웅>을 대표하는 장면으로 손꼽힌다.

 

 
<영웅>의 ‘누가 죄인인가’는 안중근 의사의 결의를 고스란히 담아내는 명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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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의 세르반테스 역시 ‘꿈’에 대한 신념을 재판을 통해 말한다. 이 재판은 수도원에 세금을 추징한 이유로 투옥된 세르반테스가 종교재판에 회부되기 전, 신참의 기를 꺾으려는 죄수들에 의해 시작된다. 기소 이유는 ‘이상주의자, 엉터리 글쟁이, 고지식한 인간’. 세르반테스는 이를 위한 변론으로 자신이 기사라 믿는 돈키호테의 이야기를 공연으로 선보인다. 돈키호테의 행동만으로도 정의와 사랑, 꿈에 대한 이야기는 충분하다. 하지만 <맨 오브 라만차>는 재판이라는 형식 안에 이 이야기를 담아냄으로써 좀 더 직접적인 질문을 던진다.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것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과연 잘못된 일인가?’

 

뮤지컬 <HOPE: 읽히지 않은 책과 읽히지 않은 인생>(이하 <호프>)과 <신과 함께 저승편>은 <맨 오브 라만차>처럼 작품 자체가 재판의 형식을 띈다. 이런 형식의 경우 주인공의 일대기를 보여주는 방식으로 쓰인다. <호프>는 카프카의 유작을 두고 30년간 진행된 실제 재판을 모티브로 하지만, 정작 <호프>가 주목하는 것은 그 유작을 간직해온 에바 호프라는 여성 그 자체다. 원고를 얻게 된 계기부터 여전히 간직할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한 재판부의 질문은 자연스레 호프가 경험한 70년간의 삶을 돌아보게 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호프>는 다양한 상처로 자신만의 견고한 벽을 쌓아올린 인간의 외로움과 불행을 확인하고, 두려움을 딛고 전진하려는 이의 용기를 응원한다.
반면 「신과 함께 저승편」은 서른아홉에 사망한 김자홍이 저승에서 경험하는 7개의 재판을 소재로 한다. 거짓, 나태, 불의, 배신, 폭력, 살인, 천륜을 심판하는 재판이 망자의 지난 생을 돌아보는 것은 당연하고, 환생을 위한 이 과정은 어떤 것이 인간다운 삶인가를 질문한다. 특히 「신과 함께 저승편」은 이 재판이 상상의 영역이며 그 수가 다양하다는 점에서 다른 콘텐츠와 차별점을 갖는다. 뮤지컬은 지옥을 형상화한 영상과 안무, 독특한 의상 등을 통해 자칫 단조로운 나열처럼 보일 수 있는 7개의 재판을 구현해낸다.

 

 
<레미제라블>에서 장발장은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법정에 자진 출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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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판은 법이라는 테두리가 있다 하더라도 시대와 상황에 맞게 논리나 기준을 스스로 정해야 하는 만큼 집행관에게 주어지는 고뇌도 만만치 않게 크다.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에서는 집행관의 고뇌가 발견된다. 빌라도는 예수에게 십자가형을 언도한 인물이지만, 그 역시 석연치 않은 이유로 비난 받는 예수를 동정했으며 대중의 강요에 흔들리는 모습을 재판에서 보여준다. 때때로 법정은 고민 끝의 결심을 선전포고하는 자리가 되기도 한다. 뮤지컬 <레미제라블>의 ‘Who Am I’가 그렇다. 신분을 숨긴 채 살아가던 장발장은 자신 대신 잡힌 사람의 결백을 주장하기 위해 법정에 자진 출석해 자신의 정체를 밝힌다. 장발장은 이 행위를 통해 더 이상 남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겠다 선언하는 셈이다.

 

법정은 가장 약하면서도 가장 강한 곳이다. 다양한 계급과 입장이 첨예하게 부딪히는 곳이며, 인간의 내밀한 감정이 가장 추악한 방식으로 드러나는 곳이기도 하다. 5월 28일에 공연을 시작하는 뮤지컬 <베니스의 상인> 역시 재판을 통해 인간의 이중성을 꼬집는다. 과연 현실의 법정은 어떤 모습일까. 가능하면 소수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고 피해자의 마음을 헤아리는 자리가 되길 바란다.

 

뮤지컬 <베니스의 상인>
일정 : 2019.5.28(화)~2019.6.16(일)
장소 : 세종M씨어터
시간 : 화, 목, 금 오후 7시 30분
          토 오후 3시, 오후 7시 30분 
          수, 일, 현충일 (6/6) 오후 3시
          (월요일 공연없음)
          (공연시간 : 120 분 / 인터미션 없음)
연령 : 만 7세 이상
티켓 : R석 60,000원, S석 40,000원, A석 30,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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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ㅣ 장경진(공연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