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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창작에서 공동체적 체험으로

오늘날 세계 예술계는 예술교육의 미학적 측면을 넘어 공공성과 공익적 활용을 주시하고 있다.

1920년대 경성, 부모의 뜻에 따라 정략 결혼했던 아내가 죽었다. 남자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으로 먹고 사는 ‘금수저’였다. 이 참에 그는 늘 꿈꾸던 ‘모던한’ 삶을 실천에 옮기기로 결심한다. 서구식 옷차림에 서구식 교육을 받은 신여성을 찾아 신식 결혼식을 올리고, 집안도 신식으로 꾸리기 시작한다. 새로 결혼식을 올린 아내 역시 이상적인 집안을 가꾸기에 여념이 없다. 이것저것 새 살림을 들여놓는 와중에 그들의 ‘모던한 삶’에 한 가지 허전한 구석이 느껴진다. 며칠을 골몰한 끝에 그들은 드디어 그 부족한 1퍼센트가 무엇인지 생각해냈다. 바로 ‘피아노’였다! 아내가 피아노를 갖고 싶다고 말한 지 두 시간도 지나지 않아 그들의 거실에는 피아노가 배달됐다. 아뿔싸. 그제서야 부부는 깨닫는다. 그들 중 누구도 피아노를 칠 줄 모른다는 사실을.

 

1922년 <개벽>에 실린 현진건의 소설 ‘피아노’의 줄거리다. 서구식 문물이 본격적으로 한반도에 유입되던 시절 우리에게 서양음악은 이 부부의 피아노, 즉 연주할 줄은 몰라도 ‘모던한 삶’을 꾸미기 위해 갖춰놓아야 하는 필수품과 같은 것이었다. 피아노 열풍은 해방 이후에도 꺼지지 않았다. 신동일, 백건우, 정명훈 등이 해외 콩쿠르에서 우승하고 화려한 카퍼레이드를 벌이면서 오히려 그 불꽃은 더욱 거세졌다.

 

하지만 이 즈음 피아노는 더 이상 ‘가구’로 남아있지 않았다. 부모들은 더 나은 ‘삶’을 위해 자식들의 음악교육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내 아들과 내 딸이 제2의 정경화, 정명훈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예술학교(Conservatory)가 따로 독립된 서양과 달리 음악 미술 전문교육이 처음부터 종합대학교(University)에 편입되면서 ‘성공한 음악가=엘리트’라는 인식이 널리 퍼졌다. 음악교육은 계급상승을 위한 사다리로 기능하기 시작했다. 1960년대, 경제적으로 그처럼 척박하던 시절 이미 한국 유학생이 미국 줄리어드 음악원 재학생의 60퍼센트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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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 속에서 음악을 포함한 한국의 예술교육은 재능 향상과 영재 발굴에 초점을 맞춰왔다. 초,중,고교 교육 중에서 기본적인 수업을 제외하면, 비슷한 경쟁자들이 쏟아지는 가운데 대부분의 학습은 개인의 기량을 갈고 닦아 생존하는 방식을 터득하는 데 맞춰졌다. 성공을 위해서는 타고난 재능과 인맥, 무엇보다 돈이 필요했다. 전문 음악가가 되지 않더라도 음악교육과 활동은 아이들의 성적을 위해 필요한 부차적 수단으로만 인식됐다. ‘예술은 가진 자들의 여흥’이라는 인식이 한국 사회에 단단히 굳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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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오랫동안 이런 삶이야말로 서구적이라 믿어 왔지만 역설적인 것은 이런 삶을 살고 있는 서양인은 정작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이다. 서구에서는 예술을 배우거나 향유하는 일은 ‘예술가가 되는 것’과는 별개의 일이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의무적으로 받는 예술교육은 우리에게 진부하지만 잊힌 단어, ‘교양’을 위해서다. 교양을 뜻하는 영어 ‘cultivation’의 어원은 ‘경작(耕作)’이고 독일어 ‘Bildung’의 어원은 ‘형성’이다. 두 단어는 모두 인간 정신을 개발하여 풍부하게 만듦으로써 완전한 인격체를 형성해간다는 의미를 포함한다. 교양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의사소통’이다.

 

스위스 광산촌에서 유년기를 보낸 후 함부르크 대학 영문과 교수가 되었던 디트리히 슈바니츠는 교양은 자신만을 거룩하게 만들거나 다른 이와 장벽을 쌓는 수단으로 활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 18세기 계몽주의에서 시작된 교양의 철학적 목표는 오히려 다양한 출신과 배경의 사람들과 언제 어디서든 소통할 수 있는 공용어로서의 활용이라는 것이다. 슈바니츠는 ‘교양은 정신과 몸, 문화가 함께 하나의 인격체가 되는 형식이며 다른 사람들의 거울에 자기를 비추어 보는 형식’이라고 주장한다. 솔리스트 위주로 진행되는 오늘날 한국의 정규 음악교육은 교양 함양에 과연 긍정적이었을까? 적자생존의 원칙이 지배적인 한국 교육 안에서는 예술은 오히려 슈바니츠가 말했던 교양과 괴리되어왔다.

 
 
영화와 뮤지컬로 제작된 <빌리 엘리어트>는 공공예술교육의 가치를 역설한다 ©Billy Elli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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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양의 문화예술정책은 ‘교양’의 이상적 목표를 위해서 시작됐다. 뮤지컬로 명성을 지속하고 있는 스티븐 달드리의 영화 <빌리 엘리어트>를 들여다보자. 관객들은 탄광촌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로열 발레단 수석 무용수로 성장하는 빌리의 ‘개천용’ 신화에 집중하지만, 실상 더 유심히 들여다봐야 할 것은 빌리와 함께 발레를 배우던 어린 소녀들이다. 그 아이들도 빌리처럼 유명한 댄서가 되었을까? 현실적으로 무리한 가정이다. 그러나 선택 받지 못했다고 하여 그 소녀들이 도태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소녀들은 발레리나가 되기 위해 그곳에 찾아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야말로 중요하다.
공공 예술교육을 통해, 빌리를 비롯한 아이들에게 발레와 음악은 직업적 재능이기에 앞서 소통의 언어이자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성인이 된 후에도 그들은 이 언어로 자신을 표현하고 타인과 대화하며 다른 세계를 이해한다. 사회의 구성원들은 그렇게 공동의 영역을 형성해간다. 이처럼 모든 사람에게 공통의 관심사로서 향유되고 균등한 기회로 주어질 때, 문화예술은 특권층의 전유물로부터 벗어나 비로소 공공성을 획득하는 것이다.

 

 
베를린 필의 ‘ZuKunft’ 프로그램을 통해 새로운 음악교육의 가능성을 제시한 사이먼 래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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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성과 예술적 발전의 조화를 성공의 척도로 볼 때, 새롭고 남다른 시도라고 평할 수 있는 두 가지 사례가 있다. 첫 번째는 베를린 필의 음악교육 프로그램 ‘ZuKunft’다. ‘ZuKunft’는 전임 예술 감독 사이먼 래틀이 취임과 더불어 시작한 어린이 대상 음악교육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의 첫 취지는 미래의 청중 확보에 있었다. 평균 나이 55~60세에 이른 음악회 청중이 조만간 소멸되리라는 위기감을 느꼈던 베를린 필은 이른 나이에 클래식 음악을 접하고 음악회를 빈번하게 방문할 경우 성인이 되어서도 음악 애호가로 남을 것이라는 가정 하에 이 교육을 시작했다.
그러나 래틀은 단순한 교육과 경험을 넘어 음악이라는 예술이 사회적 정의에 미칠 수 있는 영향력까지 간파했다. 다수의 난민이 유입되는 독일의 사회적 상황 아래 그는 서로 다른 인종과 연령, 지위, 계급이 각각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소통할 수 있는 창의적인 매개로서 음악을 활용하고자 했다. 베를린 필은 매 시즌 새롭고 창의적인 교육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청중들이 직접 창작한 동화를 이용하여 뮤지컬 음악을 만들고 함께 공연하는 한편, 안톤 체홉의 작품 등 기존의 연극을 바탕으로 아이들이 작곡이나 안무를 하는 프로그램을 시도했다. 아이들이 만든 음악에는 사이렌과 전자음, 각 나라의 전통악기 등 다양한 소리 매체가 동원되었다.

 

난민들을 포함해 다채로운 문화적 배경을 지닌 시민들은 이 프로그램에 무료로 참여했고, 자신만의 독창적인 소리와 표현을 다른 이들과 융화시키는 노력을 해왔다. 지난 10년간 베를린 시민들의 절대적 호응을 얻은 이 프로그램으로 인해 베를린 필하모닉 홀은 ‘문화의 사원(temple of culture)’라는 새로운 별명을 얻게 되었다. 3세에서 73세에 이르는 다양한 연령층의 3천 명의 넘는 사람들이 이 프로그램에 참여했으며, 공연을 관람한 사람은 20만 명이 넘었다.

 


카네기 홀은 현대 음악가들과 함께 ‘자장가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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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사례인 카네기 홀의 ‘자장가 프로젝트’는 베를린 필의 ‘Zukunft’보다 좀 더 급진적이다. 카네기 홀이 섭외한 현대 음악가들은 임산부 및 신생아를 둔 부부와 함께 새로운 자장가를 창작한다. 이 프로그램은 본래 음악가들과 라이컬즈 아일랜드 감옥의 여죄수들이 함께 시작한 것이었다. 감옥에 갇힌 후 자식들의 잠자는 모습을 볼 수 없게 된 여죄수들이 자장가의 가사를 만들면, 음악가들은 거기에 선율을 붙여 녹음을 해주는 작업이었다. 몇 해에 걸쳐 진행된 이 프로젝트가 여죄수들의 정서에 미친 파장은 몹시 컸다. 그 긍정적인 효과에 힘입어 카네기 홀은 자장가 프로젝트의 대상을 홈리스와 미혼모, 일반 시민에게까지 확대한 후 지금까지 진행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불의의 사건이나 의도치 않은 상황에서 부모가 된 사람들의 모성애를 일깨우는 한편, 카네기 홀 및 음악가들과의 공동 작업을 통해 사회적 유대감을 형성하는 데 큰 몫을 하고 있다.

 

이 같은 프로그램들의 공통점은 세 가지다. 첫째, 예술을 사치가 아닌 인간의 기본적 욕구로 받아들이고 활용한다. 둘째, 스승과 제자, 예술가와 객석이라는 이분법을 파기하고 아마추어와 직업적 예술가들이 동등하게 창작에 참여하여 공동 작품을 만들어 나간다. 셋째, 그 교육의 여파가 예술 안에 머물지 않고 공동체적 정의(justice)에까지 미친다. 혼자만의 고독한 창작행위가 아니라, 서로의 다름 사이에서 부딪히고 이해하고 협동하며 완성시키는 공동체적 자산으로서 예술을 활용하며 성장한 아이들의 미래를 상상해보자. 적어도 ‘빠루’와 망치가 난무하는 기성세대의 ‘동물국회’보다는 더 아름다운 풍경을 그들은 만들어나갈 수 있지 않을까.

글ㅣ노승림(문화정책학 박사/숙명여자대학원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