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GE

3인 3색 「영웅」

3명의 문화예술인이 뮤지컬 「영웅」을 감상하고 각자의 소감을 보내왔다.

애국심은 이렇게 끓어오르는 것인가

‘삼일운동 100주년.’ 말만 들어도 가슴 뭉클해진다. 그동안 다큐멘터리나 TV 특집 정도로만 방송되던 삼일운동이 최근에는 SNS를 통해 독립선언서 필사 릴레이로 이어지는 광경을 보면서 이제는 엄숙하기만 한 날이 아니라 모두가 즐기고 기억하는 축제로 계속된다는 또 다른 감동마저 느꼈다.

3월이면 기억해야 할 인물이 한 명 존재한다. 도마 안중근. 그의 삶을 담아낸 뮤지컬 「영웅」은 올해가 10주년이었다. 극중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잠깐 등장하는데 같은 제작사의 「명성황후」 10주년 공연에 배우로 참여했던 기억 때문인지 그때 연습 과정들이 어렴풋이 떠오르면서 무대에 함께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매 신을 위해 배우와 스태프들이 얼마나 고생했을까. 정성화가 ‘누가 죄인인가’를 부를 때 터져 나오는 카리스마, 오프닝 넘버 ‘단지동맹’에서 「레미제라블」의 ‘One Day More’ 못지않게 웅장하게 퍼지는 스케일, 세트 구성이 독특해 궁금증을 불러일으킨 열차이동 및 이토 저격 장면 등을 통해 명성황후의 제작 과정을 떠올리면서 공연을 색다르게 즐길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 3월 1일에 왜 쉬는 거냐고 뜬금없이 묻던 일본인 친구가 떠올랐다. 차분하게 3·1 만세운동 이야기를 해줬더니 아무 대꾸를 하지 못하던 친구. 일본은 정말 진짜 역사가 아니라 가짜 역사를 가르치고 있는 것일까? 일본 친구들을 모두 데려다 내 돈을 잔뜩 들여서라도 이 뮤지컬을 보여주고 싶어졌다. 영원히 기억해야 할 3월은 그렇게 흘러가고 있다.

조기준_작가, 전 뮤지컬 배우

 

 
‘장부가’를 부르는 정성화(왼쪽)과 양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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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10

안중근 의사와 열 명의 동료가 손가락을 끊어 혈서를 쓴 러시아의 자작나무 숲에서 게이샤들이 춤추고 노래하는 이토 히로부미의 연회장으로, 다시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회상하는 궁녀 설희가 있는 경복궁으로. 눈 깜빡할 새 전혀 다른 분위기에서 새로운 이야기가 펼쳐진다. 빠른 무대 전환이 선사하는 시각적 쾌감이 뮤지컬 「영웅」의 초반을 지배한다. 조명 효과와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의 광활한 무대를 십분 이용한 일본 경찰과 독립운동가들의 추격 신은 그 중 압권이라 할 만하다.

극의 중심은 인물과 음악으로 옮겨간다. 뮤지컬 「영웅」은 스포일러가 불가능한 작품이다. 모든 관객이 안중근 의사와 이토 히로부미의 운명을 알고 있다. 초연한 지 10년이 지났고, 관객 누구도 줄거리가 궁금하지 않음에도 연일 대극장 객석을 가득 메우는 힘은 생생한 캐릭터와 진정성 넘치는 음악에서 나오는 것이리라. 관객 반응과 시대 흐름에 따라 「영웅」은 계속 변화해왔다. 10주년 기념 공연에선 새로운 에피소드와 노래를 더해 안중근 의사와 함께 의거를 준비한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 등 조역 3인과 여성 배역인 설희와 링링의 캐릭터를 강화했다. 조역들의 이야기가 보다 설득력 있게 그려진 덕에 거사 직전, 객석의 긴장감이 극도로 높아진 상태에서 우덕순과 조도선이 능청스레 주고받는 아리랑 춤과 노래가 효과적으로 관객의 웃음을 끌어낸다. ‘누가 죄인인가’의 역동적 합창에 이어 사형대 앞에서 부르는 안중근 의사의 독창 ‘장부가’의 벅찬 감동은 여전하다.

「영웅」은 기념비적 작품이다. 한국 창작뮤지컬 단일 작품으로 최다 수상을 기록했고, 초연 이후 전국 20개 도시와 뉴욕, 하얼빈 등에서 공연하 사랑받았다. 그리 가볍지 않은 이야기지만, 가족 관객과 어린 학생들의 모습이 유난히 눈에 많이 띄는 작품이다. 10주년 기념 공연을 보며 다음 10년의 변화가 즐겁게 기다려질 만큼, 한국 대표 창작 뮤지컬 「영웅」은 훌륭하게 나이 먹고 있다.

정규영_「행복이 가득한 집」 문화교양팀 기자

 

 
「영웅」의 무대는 빛과 그림자를 효과적으로 대비시켜 관객의 감정을 조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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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 대로 다 타시오

뮤지컬을 썩 좋아하지 않는다. 뜨겁기 때문이다. 뜨겁다는 건 감정적이고 직접적이고 단순하다는 의미다. 나는 좀 더 이성적이고 세련되고 건조한 무언가를 좋아한다. 이런 내가 「영웅」을 선택했다. 뜨거워지고 싶어서. 삼일운동 100주년의 3월에는 한껏 달궈져도 좋으니까. 같은 이유로 얼마전 ‘유관순 오페라 칸타타’를 관람했다. 열 받은 가슴 속 응어리가 확 풀어져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했다. 오페라는 차가우니까. 「영웅」은 나를 뜨겁게 달굴 수 있을까?

완전! 나는 그냥 불에 확 데어버리고 말았다. 연기? 음악? 무대? 극본? 뮤지컬을 이루는 요소가 무엇이든 간에 그 모두가 뜨겁게 훌륭했다. 정성화는 대단한 배우였다. 무대뿐만 아니라 극장 전체를 장악하는 능력. 배에서 나오는 깊은 울림으로 관객과 같이 끓어오르다 정점에서 폭발해버리고 마는 가창력. 안중근 의사는 모든 피지배 민족의 울분을 풀어버린 장부(丈夫)다. 정성화는 장부의 기상, 그 자체였다. 「영웅」의 음악은 내가 유장하고 서사적인 느낌 때문에 좋아하는 엔리오 모리꼬네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오리지널 스코어를 떠올리게 했다. 음악과 함께 무대 역시 색깔과 빛과 관객의 감정을 쥐었다 폈다 하며 능란하게 다뤘다. 아, 가창력 때문에 이름을 다시 보게 된 배우가 있다. 설희 역의 임민지. 그녀의 가녀리면서도 심지가 있는 목소리와 애절한 가창력은 국모를 자객의 칼에 내주고도 울음을 삼킬 수밖에 없었던 불쌍하고도 못난 나라의 운명을 떠올리게 했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는 장면

 

바라던 대로 내 마음은 확 달궈져 버렸지만 차가운 내 눈에는 아쉬움이 남았다. 도마 안중근은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다.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기로 마음먹은 그의 마음에서 번민이 일지 않았을 리 없다. 그 번민을 달랜 건 한 생명을 버려 더 많은 생명을 구하는 것이 천주가 가르친 ‘정의’라는 깨우침이었을 것이다. 그에 이르기까지 그는 얼마나 많이 기도하며 천주와 대면했을까? 「영웅」 속 안중근은 신앙 때문에 고뇌하기는 하지만 모친만큼이나 그에게 용기를 주었을 천주의 존재가 더 부각됐다면 안중근 의사의 선택에 더 깊이가 생기지 않았을까?

하지만 이런 아쉬움은 「영웅」의 감동을 ‘1’도 훼손하지 못한다. 영웅 때문에 제대로 뜨거워져서 너무 좋다. 목욕탕에서 나오자 마자 시원한 바람을 맞은 것처럼 후련하다. 삼일운동 100주년을 기념하는 최소한의 행동을 한 것 같아 홀가분하다. 활활 타버린 재처럼 가벼워졌다.

송원석_「문화공간 175」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