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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문화회관과 나

연주자의 간절함과 엄격한 심사위원의 책임감으로

 

세종문화회관과 나

연주자의 간절함과 엄격한 심사위원의 책임감으로

글. 이종덕(단국대학교 예술대학원 원장)


세종문화회관 40주년을 맞이하여 문화·예술 각계에서 글을 보내왔다.
이번 호에서는 세종문화회관 초대 사장이었던 이종덕 단국대학교 예술대학원 원장의 글로
세종문화회관의 지난 40년을 되돌아본다.

 

40돌 세종문화회관. 세종문화회관과의 인연을 되짚어보니 감회에 젖는다. 그곳에는 젊음과 꿈, 뜨거운 열정과 애틋한 연정이 있다.

경복고 재학시절 광화문 네거리에 무뚝뚝하고 투박하지만 우직하게 서있던 당시 시민회관, 지금의 세종문화회관을 늘 지나다녔다. 하루는 ‘저 시민회관 사장이 될 수 있을까’라고 생각해보았던 것 같은데 그 수줍고 들뜬 꿈이 이루어져 5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문화예술기관에서 일 했다는 것이 얄궂은 운명의 장난처럼 여겨진다.

1961.10.25 개관을 앞둔 시민회관 내 전경

1961.10.25 개관을 앞둔 시민회관 내 전경

1999년, 예술의 전당 사장 임기를 마치고 당시 민영화 체제로 바뀐 세종문화회관의 첫 재단법인 사장으로 부임하였다. 하지만 세종문화회관과 나의 인연은 그 이전부터 계속되어 왔다.

1960년대 후반 당시 문공부 주무관이었던 나는 시민회관에서 여러 국빈의 환영공연을 주관하였다. 당시 에티오피아의 ‘하일레 세라시에’ 황제가 방문하였고 여느 때와 다름없이 시민회관에서 성심껏 환영공연을 준비해 무사히 행사를 마쳤다. 이후 시간이 흘러 1972년 뮌헨올림픽 개회식을 위해 한국민속예술단을 인솔해 세계 24개국을 순회하던 중 에티오피아를 방문하게 됐다. 그때 한국 방문 당시 극진한 환대에 감동을 받은 황제께서 예술단원 50명 전원에게 금목걸이를 직접 달아주었던 추억이 떠오른다.

서울 도심에서 가장 좋은 길목인 광화문에 위치한 세종문화회관은 이처럼 공연장이라기보다는 정부의 중요한 경축행사가 자주 열리는 행사장으로 권위적인 이미지가 강했다. 세종문화회관 사장으로 부임한 뒤 첫 번째 과제가 바로 그 ‘이미지 쇄신’이었다.

권위적 관료주의에 물들어 있던 이미지를 깨끗이 씻어내고 시민들이 향유하는 예술을 위한 공연장 이미지를 새롭게 구축하기로 한 것. 이를 위해 극장의 얼굴인 로비와 야외무대를 먼저 고치고 사무 공간을 줄여 미술관을 확대했다. 또 중앙계단 통로에 담배연기 자욱한 브로커들의 아지트 같았던 커피숍을 없애고 악기상점, 꽃가게, 어린이휴게소 등 편의시설이 들어선 아케이드 ‘아트피아’를 조성하였다. 부족한 예산이었지만 임대업체가 직접 리모델링을 하고 임대료를 절감해 주는 방법으로 아트센터의 외관을 갖춰나갔다.

강수진&슈투트가르트 발레단 〈오네긴〉 (2015)

강수진&슈투트가르트 발레단 〈오네긴〉 (2015)

외형적 개선만큼 공연 작품의 수준을 끌어올리는 것 역시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대중적 작품 30%, 순수예술작품 70%를 유치하겠다는 전략을 세우고 다양한 공연을 선보였다. 특히 대극장에서는 정명훈 지휘의 팝 콘서트, 백건우와 파리앙상블, 스위스 모리스 베자르 발레단 초청, 강수진 슈트트가르트발레단 초청공연 등 안팎으로 화제가 되는 공연을 유치하여 광화문 일대를 명실상부 한국 공연의 1번지이자 예술의 향기가 가득 찰 수 있도록 했다.

외부 초청공연이 아무리 훌륭해도 산하단체의 공연 수준이 떨어지면 극장의 위신이 서지 않는다. 세종 산하 9개 예술단체의 정기공연도 질적인 수준을 높이기 위해 예술단원들을 대상으로 오디션을 실시해 실력을 향상시키고자 했다. 이를 통해 능력이 부족한 사람은 내보내겠다고 했고 그 결과 서울시향 연주자 4명을 포함해 9명이 탈락했다. 이에 노조는 즉각 세종문화회관 앞에 천막을 치고 농성을 벌였다. 타협안을 찾기 위해 수 차례 협상을 하고 노력했지만 결국 소송 끝에 탈락자를 복귀시키되 1~2년 동안 오디션을 봐서 합격하지 못할 경우 해고하는 것으로 합의하였다. 이후 서울시향에는 정명훈이 예술 감독으로 취임했고 결국 그 당시 탈락자들은 영원히 해고되고 말았다.

돌이켜보면 이 과정이 너무나 지난하고 외로웠다. 그러나 어떤 분야의 발전과 개혁을 위해서는 반드시 살을 깎는 노력과 고통이 동반한다는 것을 되새기고 악역을 자처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결코 나아질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시를 떠올리면 안타깝고도 아찔한 마음이지만 이것이 단원들에게 무사안일주의 나태함을 경계하고 갈고 닦을수록 빛나는 예술의 가치를 되새기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세종문화회관이 있는 광화문 거리를 거닐면 아직도 가슴이 뛴다. 공연장은 그 도시를 상징하는 공간이고 창조의 구심점이 되는 장소다. 세종문화회관이 바로 그 역할을 다 하는 것 같아 무척 자랑스럽고 뿌듯한 마음이다. 예술가에게는 창작의 산실로 시민들에게는 믿고 선택할 수 있는 명품극장으로, 예술가와 시민이 경계 없이 어우러지는 문화공간으로 거듭나기를 소망한다.

“예술이란 얼마나 풍요로운 것인가. 본 것을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은 결코 허무하지도 생각에 목마르지도 않을 것이며 고독하지도 않을 것이다”

빈센트 반 고흐의 말처럼 예술의 향기가 널리 퍼지는 광화문 광장. ‘풍요로운 도시 서울’을 만드는데 더욱 많은 일을 해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