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GE

다시 사랑을 노래하다

뮤지컬 <번지점프를 하다>

다시 사랑을 노래하다

뮤지컬 <번지점프를 하다>

글. 장경진(공연칼럼니스트)


2000년 영화로, 그리고 2009년 뮤지컬로 관객을 맞았던 뮤지컬 <번지점프를 하다>가 2018년, 다시 한 번 관객을 찾아온다.
비오는 여름날의 애잔함을 닮은 모습으로, 다시 사랑을 노래할 준비중.

“이 지구상 어느 한 곳에 요만한 바늘 하나를 꼽고 저 하늘 꼭대기에서 밀실을 또 딱 하나 떨어뜨리는 거야. 그 밀실이 나풀나풀 떨어져서 그 바늘 위에 꽂힐 확률. 바로 그 계산도 안 되는 기가 막힌 확률을 인연이라고 부르는 거다.” 사랑과 인연. 누구나 알지만 정의하는 바는 모두가 다르다. 이병헌과 故 이은주가 주연을 맡은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2000)는 이 정의하기 어려운, 논리적으로 설명이 불가능한 사랑과 인연, 그리고 환생이라는 단어를 구체화하며 큰 사랑을 받았다. 그리고 영화는 뮤지컬이 되어 다시 새로운 관객을 맞았다. 2009년의 일이다.


영화의 잔잔한 영상미 vs. 뮤지컬의 센티멘털한 음악

영화의 잔잔한 영상미 vs. 뮤지컬의 센티멘털한 음악

<번지점프를 하다>는 ‘사랑’이라는 단어에서 상상하고 공감할 만한 일상의 소중한 순간을 펼쳐놓는다. 인우와 태희는 세찬 비가 내리는 여름날 우연히 만나 사랑을 시작한다. 함께 산을 오르고, 음악을 듣고, 춤을 추고,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다툰다. 태희에게 잘 보이기 위해 인우는 피우지도 못하는 담배를 배우고, 인우와의 사랑을 잃고 싶지 않은 태희는 서두르지 않는다. 하지만 영화와 뮤지컬은 마치 그 시간을 그대로 느끼라는 듯 말이 없다.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평범한 일상은 느리지만 섬세한 묘사를 통해 비로소 기적이 된다. 영화는 좁은 우산 속으로 불쑥 들어오는 여자의 행동과 낯선 여자에게 우산을 씌워주느라 다 젖은 남자의 한쪽 어깨로 이들의 만남을 그린다. 한 마디 말도 없이 멍하니 태희 곁에 서있던 인우의 감정은 뮤지컬에서 드러난다. “뭐죠? 이 기분은 / 뭐죠? 이 이상한 설렘 / 아주 잠신데도 영원한 것 같던 / 모든 게 정지해 버린 듯한 찰나의 순간”(‘그대인가요’)

영화가 잔잔한 영상으로 그들을 비춘다면, 뮤지컬은 감정을 예민하게 잡아내는 음악으로 표현한다. 바이올린과 첼로, 콘트라베이스에 기타와 피아노 선율이 더해진 음악은 멜랑콜리한 사랑의 감정을 포착해낸다. 하지만 뮤지컬의 음악이 더욱 빛을 발하는 것은 작품이 가진 어쩔 수 없는 한계를 음악으로 돌파하기 때문이다. <번지점프를 하다>의 후반부는 고등학교 국어 선생님이 된 인우가 사고로 죽은 태희를 자신의 제자 현빈에게서 발견하고 다시 사랑하게 된다는 이야기로 진행된다. 영화 속 인우는 현빈에게서 태희의 습관과 말, 물건을 발견한다. 그러나 환생을 통해 전생의 사랑을 알아본다는 비논리적인 인우의 사랑은 개연성에 대한 의문으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뮤지컬은 감정을 자극하는 음악으로 논리의 영역을 공감의 영역으로 바꿔놓는다.

공감은 애잔한 멜로디 위에서 불리는 구체화된 가사를 통해 구현된다. 대부분의 뮤지컬 넘버는 상황을 설명하는 것에 집중한다. 그러나 <번지점프를 하다>는 각 인물들이 순간 느끼는 감정에 집중한다. 시를 전공하고 가요 작사가로 활동한 경험이 있는 박천휴 작사가는 인물에 이입해 최대한 구체적인 형태의 가사를 쓴다. 그의 가사에는 감정을 표현하는 형용사와 은유, 비유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인우의 곁에 바람처럼 등장해 바람처럼 사라진 태희는 이렇게 노래한다. “혹시 들은 적 있니 / 바람의 노래 소리를 / 내가 세상에 오기 전부터 / 여길 맴돌던 이 바람의 노래”(‘혹시 들은 적 있니’) 세심하게 채집한 그의 가사 덕분에 관객은 잊고 있던 감정을 느끼게 된다. 상대의 마음을 알 수 없어 생기는 불안과 두려움, 모든 게 서툴러도 마냥 기분 좋은 들뜸. 사랑을 확인한 순간 느끼는 벅차오름.

이병헌이 그리는 서툰 첫사랑 vs. 강필석이 그리는 혼돈과 쓸쓸함

 

<번지점프를 하다>는 인우라는 한 남자가 겪는 사랑을 오롯이 따라가는 작품이다. 때문에 하나의 사랑이 시작되고 끝나는 과정에서의 감정이 고스란히 펼쳐지고, 그 감정은 설렘과 쓸쓸함이라는 양면을 드러낸다. 이병헌이 연기한 영화의 인우는 서툰 첫사랑을 온 몸으로 표현한다. 긴장할 때마다 나오는 딸꾹질과 헛발질, 태희를 바라보는 멍한 표정과 재미없는 농담에도 마냥 해맑은 미소. 상황에 맞지 않은 커다란 양복과 우산도 그런 그를 도우며 서툰 첫사랑의 매력을 극대화한다.

반면 뮤지컬의 인우는 애잔한 음악이 설명하듯, 쓸쓸함에 방점을 찍는다. 노을 진 해변에서 인우와 태희가 서툴게 추던 왈츠도 뮤지컬에서는 “눈부신 계절을 지나 / 춥고 긴 겨울에도 / 그대는 여전히 나의 곁에 있을까요”(‘프롤로그 왈츠’)라고 노래한다. 인우의 두려움은 극 전체를 관통하는 정서이며, 현빈에게서 태희의 모습을 볼 때마다 괴로워하는 그는 또 이렇게 노래한다. “넌 누구니 / 왜 날 슬프게 만드니 / 겨우 참아온 그리움을 / 넌 왜 내게 데려오니”(‘겨우’) 감정이 세세하게 표현되면 될수록 성별을 초월한 사랑의 혼돈과 쓸쓸함이 짙게 배어나온는 셈이다. 특히 잔잔한 일상 속 격렬한 내적 갈등은 강필석에 의해 명확한 모양을 갖는다. 2009년 시범 공연을 시작으로 2018년 올해 공연에 이르기까지 그는 다섯 번을 인우로 살았다. 연극과 뮤지컬을 막론하고 특유의 섬세한 감정 연기로 인정받아 온 만큼 그가 만들어낸 인우는 뮤지컬 <번지점프를 하다> 그 자체다.

사랑을 논리적인 언어로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게다가 미련할 정도로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남자는 시대착오적이다. 하지만 뮤지컬은 지난 공연에서 사랑이라는 감정은 보편적이며 여전히 변치 않는다는 것을 음악을 통해 증명해냈다. 모든 것이 빠르기만 한 시대에 <번지점프를 하다>는 시대를 역행하는 것으로도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어제의 사랑을 되돌아보고 내일의 사랑을 기대하게 하는 작품으로 <번지점프를 하다>만 한 것이 없다. 공연은 6월 12일부터 8월 26일까지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뮤지컬 `번지 점프를 하다`

뮤지컬 `번지 점프를 하다`

기간 : 2018.06.12 (화) ~ 2018.08.26 (일)

장소 : 세종M씨어터

시간 :  평일 8시 / 토 3시, 7시 / 일요일, 공휴일 2시 6시
※6.27(수), 7.4(수), 7.11(수), 8,22(수) 3시 공연 있음
※월요일 공연 없음 (공연시간: 120분 / 인터미션 15분)

티켓 : R석 88,000원 / S석 66,000원 / A석 20,000원

연령 : 만 7세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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