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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을 두근거리게 하는 ‘시즌제’의 마력

관객을 두근거리게 하는
‘시즌제’의 마력

글. 유주현(중앙SUNDAY 공연담당 기자)

예능 〈무한도전〉이 ‘시즌제’ 검토로 화제가 됐다.

시청자들이 예능에도 높은 완성도를 요구하게 된 시대적 상황에서 필연적인 절차로 보인다.

사실 시즌제란 프로야구 시즌, 프로축구 시즌처럼 관중이 있는 곳엔 광범위하게 존재한다.
아이돌 그룹 활동 패턴도 시즌제에 가깝다. 그렇다면 공연계에서는 어떨까?

MBC 무한도전

완성도 높은 방송이
지속가능하려면

최근 드라마 〈리턴〉이 여주인공 교체로 파문이 일었다. 최자혜 변호사를 연기하던 고현정이 분량과 캐릭터 변질 문제로 PD와 옥신각신 하다 하차했고, 결국 최자혜가 머리를 자르자 배우가 박진희로 바뀌는 마법이 일어난 것이다. 황당함은 시청자 몫이다. 분량 축소든 캐릭터 변질이든 사전 계획대로 가지 않고 생방송에 가깝게 진행되는 제작 환경에서 무슨 완성도를 기대할까. “가만히 있던 시청자는 무슨 죄냐?”는 게 중론인데, 배우나 PD나 좋은 드라마를 보고 싶은 시청자에 대한 배려와 존중이 없었던 게다.
한편 13년 장수 예능 〈무한도전〉은 뒤늦게 ‘시즌제’ 검토로 화제가 됐다. 재기 넘치는 김태호 PD를 선장 삼아 유재석 등 출연자들이 개성적이고 친근한 캐릭터를 구축해 오랜 사랑을 받아왔지만, 그런 만큼 제작진의 아이디어는 고갈 상태에 이르렀고 시청자들의 피로도도 누적된 것이 사실이다. 주기적으로 재충전 기간을 가지면서 제작진이든 출연자든 조금씩 새 피를 수혈해 가야 완성도 높은 방송이 지속가능하다는 취지다.
예능 시즌제는 이제 일반화됐다. 나영석 PD가 케이블 방송에서 〈꽃보다 할배〉, 〈신서유기〉, 〈삼시세끼〉, 〈윤식당〉,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사전(알쓸신잡)〉 등 다수의 프로그램을 쏟아내고 있는 것도 모두 시즌제로 운영되기 때문이다. 〈무한도전〉 시즌제 전환도 시청자들이 예능에도 높은 완성도를 요구하게 된 시대적 상황에서 필연적인 절차로 보인다. 굳이 새로운 포맷을 기획하지 않아도 브랜드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매 시즌 새로운 출발로 시청자들의 관심을 환기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드라마라고 다르지 않다. 90년대 〈프렌즈〉 이후 미드 시청이 보편화되면서 우리 드라마에도 시즌제 요구가 높아지고 있다. 인기 미드는 보통 7~8년을 시즌제로 이어가는데, 세계관을 이어가면서도 시즌별로 설정과 인물 변화를 양념처럼 가미해 익숙함 속 새로움을 추구한다. 국내에서는 2000년대 〈논스톱〉, 〈프란체스카〉로 시작해 최근 시즌16이 종영한 최장수 케이블드라마 〈막돼먹은 영애씨〉 등 주로 시트콤 계열에 그치고 있다. 하지만 우리도 잘 만든 드라마가 나오면 시즌제에 대한 팬들의 요구가 높다. 〈시그널〉, 〈김과장〉 등은 은근히 시즌제로 돌아올 여지를 남기는 엔딩을 보여주기도 했는데, 올 상반기 KBS 〈추리의 여왕 시즌2〉가 동일한 주인공과 스토리 연속성으로 지상파 최초의 본격 시즌제 드라마를 표방하고 나서 관심을 끌고 있다.
시즌제의 매력은 뭘까. 프로야구 시즌, 프로축구 시즌처럼 사실 ‘시즌제’란 관중이 있는 곳엔 광범위하게 존재한다. 아이돌 그룹 활동 패턴도 시즌제에 가깝다. 과거 가수들이 맺고 끊음 없이 연속적으로 활동하던 것과 달리, 요즘 아이돌들이 컴백과 굿바이 무대를 쉴 새 없이 되풀이하는 이유가 있다. 컴백 때마다 새로운 콘셉트를 장착하고 나타나 팬들의 관심을 환기시키고, 휴지기를 선언하는 굿바이 무대는 아쉬움과 함께 다음 컴백에 대한 기대감을 주기 때문이다.

하쿠센 나가시

개인적으로 ‘시즌제’의 매력에 눈뜬 건 1996년부터 10년간 비정기적으로 이어진 일본 드라마 〈하쿠센 나가시(白線流し)〉를 보면서였다. 사실 완벽한 의미의 시즌제는 아니다. 1996년 고교생들의 첫사랑과 우정을 그린 11부작 미니시리즈로 방영됐지만, 평균 2년에 한번씩 ‘스페셜 드라마’로 편성되어 잊을만하면 주인공들이 20대를 보내는 뒷이야기가 이어졌다. 여운이 남는 결말이었던 만큼 뒷이야기를 보고 싶은 시청자들의 욕구를 채워주면서, 당시 최고 전성기 청춘스타들이 함께 성숙해 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재미도 있었다.
결국 ‘시즌제’란 팬들에게 다가가는 방식이다. 물건을 잘 만들어도 요령 있게 팔지 못하면 소용없다. 수십 년 스테디셀러 과자나 라면도 맛은 그대로 지키되 소비자 인터페이스인 포장 디자인을 시대에 맞게 바꿔주며 새로운 관심을 호소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믿고 보는’ 브랜드의 연속성과 정체성이 팬들의 굳건한 소속감을 유발하되 새로운 테마로 호기심을 자극하는 마케팅 전략인 것이다.

공연계의 시즌제
극장 브랜드를 구축할 것

공연계에서는 어떨까. 유럽에서는 시즌제가 오래전부터 정착돼 왔다. 국공립 대형 공연장이 아니라도 동네마다 도서관처럼 극장이 있고, 소속 극단이 축적해온 레퍼토리 작품을 장기 재연하는 ‘연극 시즌’이 매년 두 차례쯤 있다. 주민들은 시즌을 기다리고, 시즌이 막을 열면 마을은 관광객으로 활기를 띤다. 지역마다 과거로부터 이어오는 대표적인 공연들이 새로운 관객을 만날 기회를 얻고, 과거에 본 사람이나 처음 보는 사람이 각자 다른 감동을 얻는다. 현장성과 일회성이 생명인 공연 문화 나름대로 시즌제의 당위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비교적 새로운 개념이다. 지역 베이스의 공연 문화가 성숙하지 못했고, 어느 공연장·단체에서나 장기 계획 없이 3~4개월 전에 작품기획을 시작하는 환경에서 공연 생태계는 불안정할 수밖에 없었다. 국내 최초로 시즌제를 도입한 게 2000년 LG아트센터였다. 세계 공연계 최신 트렌드로 채워진 ‘시즌제 패키지’를 믿고 사는 관객이 생겨났고, 2012년엔 본격 제작극장인 국립극장이 대대적으로 레퍼토리 시즌제 개시를 선포하며 시즌제 개념을 확산시켰다. 이후 2016년 세종문화회관과 예술의전당, 국립오페라단과 국립발레단, 서울예술단, 서울시향 등이 동참하며 국공립 기관 중심으로 차츰 연단위의 안정적인 공연 생태계가 조성되는 모양새다.
관객 입장에서는 마다할리 없는 제도다. 공연장별 라인업을 미리 검토해 큰 폭의 할인율이 적용된 패키지 티켓을 구입함으로써 계획적이고 합리적인 예술 소비를 할 수 있고, 사전 예매해둔 공연에 충분한 정보와 지식을 갖춘 상태에서 공연장에 들어설 수 있으니 관객의 호응은 자연스레 따라왔다. 여섯 번째 시즌을 진행 중인 국립극장은 시즌제 전후로 뚜렷한 변화를 보여주고 있는데, ‘전통의 현대화’를 브랜드로 내걸고 신작을 쏟아내자 언론과 평단의 관심이 집중됐다. 시즌제 도입 전년 기획 공연에 대한 언론 리뷰가 단 3건에 그쳤던 것에 비해 도입 첫해 리뷰는 45건으로 15배 증가가 증가했고, 전체 보도건수는 322건에서 1075건으로 3배 이상 증가했다. 기획 공연 관객 수는 4만 여명에서 6만 여명으로 1.6배 정도 도약한 수치를 유지중이다.

2년간 시즌제를 운영한 세종문화회관도 서서히 가시적인 성과가 보이고 있다. 시즌 첫해 청소년을 위해 대폭 할인을 제공한 ‘대극장 올패스 패키지’는 500매가 완판됐고, 2015년 99.8%였던 기획공연 수지율은 16년엔 123.5%으로, 17년엔 177%로 증가하고 있다. 세종문화회관은 2018년 3월 세 번째 시즌을 시작한다. 올해는 40주년을 맞은 만큼 ‘생일잔치의 시즌’이 될 것 같다. 5월 내내 펼쳐지는 페스티벌 ‘세종 아트 페스타’를 필두로 올해 최고 기대 공연으로 꼽히는 〈게르기예프&뮌헨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내한공연〉 등 국내외 명품 아티스트들의 명단이 빼곡하다. 블록버스터급 공연 스케줄이 기대되긴 하지만, 거장이나 스타 예술가 중심의 기획에 머물고 있다는 아쉬움도 있다. 지난 1월 세종시즌 발표 기자 간담회에서도 일관된 방향성이 보이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왔다. 세종문화회관의 ‘브랜드’가 보이지 않는다는 얘기다. ‘전통의 현대화’ 브랜드를 확고히 구축한 국립극장의 경우, 시즌제 초기 해외 거장이나 타장르 예술가와의 교류에 방점을 찍었다면 올 시즌엔 그간 강화된 제작 역량을 발휘해 소속 단체의 차세대 예술가를 육성하고 새로운 장르를 개발하는 등 자기진화 모색을 새로운 화두로 삼았다.

2018-2019 세종시즌 기자간담회 현장(2018년 1월 세종M씨어터)

시즌제 성공의 관건은 뭘까. 시즌제 프로그래밍으로 공연장의 브랜드를 구축하고 브랜드를 지지하는 관객을 매 시즌 두근거리게 해야 한다. 아이돌 그룹이 컴백할 때마다 새로운 ‘세계관’을 어필하는 건 아이돌의 존재감만으로는 롱런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공연장도 다음 시즌을 고대하게 하는 스토리텔링 테크닉이 필요하다. 스타 예술가 섭외를 우선하는 기획 보다 관객이 어떤 공연을 원하는지 먼저 귀기울여보면 어떨까. 드라마 〈리턴〉의 시청자들도 스타배우 아무개가 아니라 가슴 뛰는 ‘우리들의 이야기’를 원했을 터다.

2018-19 세종시즌 패키지 티켓

2018-19 세종시즌 패키지 티켓

판매기간 : 2018.1.18(목) ~ 2017.4.2(월)

장소 : 세종문화회관

문의 : 02-399-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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