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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적 성스러움과 세속적인 화려함이라는 이중성

예레미아 애가와 번스타인 교향곡 1번 <예레미야>

종교적 성스러움과 세속적인 화려함이라는 이중성

예레미아 애가와 번스타인 교향곡 1번 <예레미야>

writer 김성현(<조선일보> 문화부 기자)

일찍이 지휘자의 명성을 얻었으나 ‘지휘하는 작곡가’이기를 소망했던 레너드 번스타인.
홀로코스트 시대의 유대인으로 아픔을 담아 교향곡 <예레미야>를 작곡하여 익명으로 출품하고, 자신이 직접 초연하기까지.

1955년 피아노 앞에서 작곡하는 레너드 번스타인

1955년 피아노 앞에서 작곡하는 레너드 번스타인

1939년 커티스 음악원에 입학한 레너드 번스타인(1918~1990)을 두고 ‘치열한 쟁탈전’이 벌어졌다. 한 편에선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세르게이 쿠세비츠키(1874~1951)가 여름 음악 축제이자 계절 학교인 탱글우드 페스티벌에서 번스타인을 가르치고 있었다. 번스타인은 악보 해석과 지휘에서 발군의 실력을 보였고, 처음엔 학생 신분이었지만 세 번째로 참가할 때는 조교가 됐다. 쿠세비츠키는 영특한 제자에게 셔츠 소매를 잠글 때 사용하는 단추를 선물했다. 그 뒤 번스타인은 음악회에서 이 단추에 가볍게 입맞춤을 하고 무대에 올라가는 것이 습관이 됐다.
하지만 커티스 음악원에서 번스타인을 가르치던 지휘자 프리츠 라이너 (1888~1963)가 가만히 있지 않았다. 번스타인은 장학금을 받고 커티스 음악원에 입학한 상황이었다. 라이너 역시 1950~1960년대 시카고 심포니를 지휘했던 거장이다. 미국의 두 명문 교향악단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이끌던 지휘자들이 갓 스무 살을 넘긴 청년을 두고 자존심 대결을 벌인 것이었다. 이런 기묘한 상황은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직후, 젊은 음악인들이 대거 입대하는 바람에 지휘자 기근이 일어난 것과도 연관이 있었다. 번스타인 역시 입영 대상이었지만, 고질적인 천식 때문에 연기 판정을 받았다. 젊은 지휘자에 대한 수요는 있는데, 정작 전쟁 발발로 지휘자의 공급이 현저히 줄었으니 번스타인에게 관심이 집중된 건 어쩌면 당연했다. 본의 아니게 난처한 상황에 빠진 번스타인은 고심 끝에 ‘제3의 길’을 택했다.

지휘자 프리츠 라이너

지휘자 프리츠 라이너

두 스승과 척지는 것보다는 차라리 뉴욕 필하모닉의 부지휘자로 가는 방안을 고른 것이다. 뉴욕 필하모닉은 당시 폴란드계 지휘자 아르투르 로진스키(1892~1958)가 이끌고 있었다. 번스타인 영입 경쟁에서 엉겁결에 승자가 된 로진스키는 “신에게 어떤 지휘자를 데려올까 물었더니 신께서 번스타인을 데려오라고 응답하셨다”는 농담으로 기쁨을 우회적으로 표현했다.
번스타인의 승부수는 적중했다. 1943년 11월 14일 뉴욕 필하모닉의 객원 지휘자로 초청받았던 브루노 발터가 연주회 직전 독감으로 몸져눕는 바람에 번스타인이 대타로 지휘봉을 잡은 것이다. 당시 번스타인은 25세에 불과했다. 미국에서 태어나고 미국에서 교육받은 미국산(産) 지휘자의 출현에 <뉴욕타임스>는 당시 연주회를 대서특필했고, 번스타인은 전국적인 스타로 발돋움하기에 이르렀다.
지휘자로서는 승승장구했지만, 정작 번스타인의 음악적 야망은 딴 곳에 있었다. 평생 음악적 모델로 삼았던 구스타프 말러처럼, ‘작곡하는 지휘자’보다는 ‘지휘하는 작곡가’가 되는 것이야말로 번스타인의 꿈이었다. 번스타인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입버릇처럼 ‘나의 시대는 올 것이다’라는 말러의 말을 인용했다. 사실상 이 말은 번스타인 자신의 욕망이기도 했다. 1942년 번스타인은 교향곡 1번 <예레미야>를 작곡한 뒤, 뉴잉글랜드 음악원이 후원하는 작곡 콩쿠르에 익명으로 출품했다. 당시 콩쿠르의 심사위원장은 공교롭게도 스승인 쿠세비츠키였다. 12월 31일이라는 마감 기한을 맞추기 위해 그가 작곡을 마치면 여동생과 친구들이 관현악 최종본을 악보에 일일이 옮겨 적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결과는 낙선이었다.

1945년 뉴욕 시티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레너드 번스타인

1945년 뉴욕 시티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레너드 번스타인

하지만 탈락의 고배를 마신 번스타인을 따뜻하게 위로해준 것도 스승들이었다. 커티스 음악원 시절 스승이었던 라이너는 자신이 이끌던 피츠버그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통해서 교향곡 <예레미야>를 지휘할 기회를 번스타인에게 선사했다. 결국 <예레미야>는 1944년 1월 번스타인 자신의 지휘로 피츠버그에서 초연됐다. 쿠세비츠키도 번스타인이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에서 이 교향곡을 지휘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이후 번스타인은 시카고와 뉴욕, 프라하와 예루살렘등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전 세계에서 이 교향곡을 지휘했다. 그는 이 작품으로 1944년 뉴욕 음악 비평가 협회상을 받았다.
그의 교향곡 1번인 <예레미야>는 중단 없이 3악장을 이어서 연주하는 독특한 구조다. 3개의 악장에는 ‘예언’과 ‘신성모독’, ‘애가(哀歌)’라는 제목이 각각 붙었다. 악장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번스타인은 구약성서의 선지자인 예레미야의 애가에서 히브리어 가사를 가져왔다. 교향곡의 마지막 3악장에서 히브리어 가사는 메조소프라노가 부르도록 했다. 성악과 기악이 통합된 말러의 교향곡과 같은 구조였다.
“수년간 고통과 노역에 시달렸던 유다, 결국 포로로 잡혀갔다. 뭇 민족 가운데 떠돌며, 편히 다리 뻗고 쉴 곳 없이 모두에게 쫓기며,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_예레미야 애가 1장 3~4절
기원전 6세기 바빌론의 왕 네부카드네자르 2세에게 예루살렘이 멸망한 뒤 70년간 지속된 유대인들의 포로 생활이 ‘예레미야 애가’의 배경이다. 구약성서의 ‘예레미야’가 예루살렘이 멸망될 때까지의 상황을 서사적으로 설명한다면, 그 뒤의 ‘애가’는 유대인들이 겪어야 했던 극한적 고통과 슬픔을 노래했다. 번스타인은 직접 쓴 곡 해설에서 “교향곡 3악장의 ‘애가’는 필사적으로 예루살렘을 구하려고 애썼지만, 결국 자신이 사랑했던 예루살렘이 파괴되고 약탈과 능욕을 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슬퍼하는 예레미야의 통곡”이라고 설명했다.

지휘자 세르게이 쿠세비츠키

지휘자 세르게이 쿠세비츠키

이 교향곡은 유대인이라는 번스타인의 정체성이 녹아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유대교 랍비의 아들인 그의 아버지 사무엘은 20세기 초 러시아에서 일어난 유대인 학살을 피해서 오늘날의 우크라이나에서 미국으로 건너왔다. 당초 탈무드에 해박했던 번스타인의 아버지는 미국에서 여성용 파마 장비와 가발 사업으로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사업가로 변모했다. 종교적 성스러움과 세속적인 화려함이라는 이중성은 애초에 번스타인 가족사에 공존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작곡가와 지휘자, 클래식 음악과 대중음악, 이성애와 동성애까지 번스타인의 음악과 삶에도 언제나 모순과 균열의 조짐이 내포되어 있었다. 그는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같은 뮤지컬과 교향곡 <예레미야>를 모두 작곡하는 일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믿었지만, 완고하고 보수적인 클래식 음악계의 입장에서 번스타인은 어디까지나 뮤지컬 작곡가일 뿐이었다. 지휘자로서 그는 일찌감치 성공을 거뒀지만, 작곡가로서 온전한 평가를 받기 위해서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는 교향곡 1번 <예레미야>를 아버지 사무엘에게 헌정했다. 그는 1977년 기자회견에서 “평생 내가 작곡해온 작품들은 우리 시대의 위기인 신앙의 위기에 관한 것이었다. 심지어 돌아보면 교향곡 <예레미야>를 쓸 때도 그런 문제와 씨름하고 있었다”라고 말했다. 유대인 학살의 전모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야 드러났지만, ‘홀로코스트’의 시대에 <예레미야> 교향곡이 탄생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