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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석 매진의 신화, 음치 소프라노의 특별한 공연

전석 매진의 신화, 음치 소프라노의 특별한 공연

writer 이상민(음반칼럼니스트)

소프라노 ‘플로렌스 포스터 젠킨스’는 역사상 최악의 소프라노였습니다.
하지만 이 표현은 남들이 그녀를 평가한 것이었지, 결단코 그녀가 자신을 평가한 결과는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언제나 자신의 노래에 대해 높은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열정적인 예술가였으니까요.

리마스터 재킷 포스터

요즘은 아무래도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들의 시대’인 것 같습니다. 방송국마다 숨은 가수를 선발하는 오디션 프로그램을 앞다퉈 진행하고, 프로 가수들이 심사를 통해 노래 대결을 펼치는가 하면, 모창 가수 중에 진짜 가수를 찾는 콘셉트의 방송도 인기를 끌었습니다. 아예 누구인지 정체를 알 수 없게 꽁꽁 싸맨 복면을 쓰고 나와 노래로만 실력을 평가하는 프로그램도 큰 호응을 얻고 있죠.
TV를 끄더라도, 우리 곁 10분 거리에는 언제라도 들를 수 있는 노래방이 천지고, 전문 가수가 아닌 회사 동료들조차, 가수 부럽지 않은 실력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즐비합니다. 예부터 ‘가무’를 즐겨온 민족이라는 것을 굳이 역사책을 뒤지지 않아도 곧바로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래서 불과 10년 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K-POP이 전 세계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이겠죠?
하지만 인류의 역사에서는 ‘노래를 잘하지 못하는 가수’의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오늘 소개하는 소프라노 ‘플로렌스 포스터 젠킨스’가 그중 한 명입니다. 메이저 음반사에서 음반까지 발매한 예술가를 이런 식으로 평하는 건 대단한 실례겠지만, 알려진 소문 그대로를 전하자면 그녀는 “역사상 최악의 소프라노”였습니다. 하지만 이 표현은 남들이 그녀를 평가한 것이었지, 결단코 그녀가 자신을 평가한 결과는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언제나 자신의 노래에 대해 높은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열정적인 예술가였으니까요.
그녀는 1868년 미국 펜실베이니아에서 태어났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150년 전입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윌크스배리의 은행가이자 펜실베이니아 의회에서 도 활동한 유명한 법률가였으며, 대단한 부자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냉철한 분별력을 가지고 있어서 자신의 딸이 소프라노 가수가 되는 걸 결코 허락하지 않았죠.

그녀는 유학을 떠나 제대로 성악을 공부하고 싶었지만, 아버지는 요지부동이었습니다. 그녀는 의사였던 ‘프랑크 손튼 젠킨스’라는 젊은이와 사랑에 빠져 아버지의 집에서 도망 나와 가출한 후 결혼했는데, 그도 그녀의 심오한 예술 세계를 이해해주지는 못했습니다. 34세 때, 결국 그녀는 그와도 헤어집니다. 41살 무렵, 분별력 있고 대단한 부자였던 그녀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그녀는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게 됩니다.
그녀의 어머니는 딸의 간절한 소망을 일부 인정해 그녀가 성악 레슨을 받는 것은 허락했지만, 단서가 붙었습니다. “절대로 대중들 앞에서는 노래를 부르지 말 것!” 아버지처럼 엄격하지는 않았지만, 딸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이 느껴지는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자 그녀는 더 큰 유산을 상속받았고, 그동안 억눌려있던 그녀의 열정은 본격적으로 타오르기 시작합니다. 이미 그녀의 나이 60세 무렵이었는데도 말이죠.
클래식의 세계에는 이 음악이 훌륭한 작품인지 아닌지, 이 연주자가 작곡가의 명곡을 제대로 연주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판단해서 알려주는 평론가들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플로렌스’에게는 이런 평론가들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음악에 문외한이라도, 그녀의 노래를 한 번만 들어보면 그녀에 대한 평가를 즉각적으로 내릴 수 있었기 때문이죠.
그녀의 노래를 처음으로 접한 청중들은 그녀의 기막힌 실력에 입을 다물 수 없었고, 구체적인 비평 대신 어디서도 들어본 적 없는 노래라며 그저 놀랍다고 그녀를 치켜세웠습니다. 평론가들도 비평의 가치를 느끼지 못하고, 대신 반어적인 방법으로 그녀를 표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오히려 대중들의 관심을 집중시켰고, 그녀는 점점 더 유명해져서 그녀의 콘서트 티켓은 월드시리즈 티켓보다 더 구하기 어려웠다고 전해집니다.

플로렌스 포스터 젠킨스

그녀는 주로 리츠 칼튼 호텔의 그랜드볼룸을 빌려 오직 소수의 선택된 청중들만을 모아놓고 공연을 했는데, 당시로써는 상상할 수 없었던 기상천외한 공연이었다고 합니다. 노래는 차치하고라도 그녀는 노래 내용에 따라 어떤 때는 누에고치 알에서 나타나기도 하고, 날개를 달고 천사 역할을 하는 등 온갖 놀라운 의상과 창의적인 무대 연출을 보여줬다고 하죠.
지금으로 따지자면 ‘케이티 페리’나 ‘레이디 가가’의 공연처럼 특수 효과가 난무하는 기상천외한 공연이었을 겁니다. 전쟁 통에 의상이 제때 공급되지 못해 공연이 취소라도 되는 날이면, 팬들의 끝없는 탄식이 이어지곤 했다고 하니 그녀의 콘서트가 얼마나 색다르고 매력적이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그녀가 자신의 콘서트 티켓을 판매하는 방식도 매우 색달랐는데, 자신이 직접 청중을 골라가며 매표를 한 것입니다. 호텔방에 티켓 창구를 마련한 그녀는 예매하러 온 사람을 일일이 만나가며 콘서트 티켓을 판매했는데, 이런 식이었다고 합니다.
“질키 씨, 당신은 기자입니까?”
“아니요, 저는 그저 음악 애호가일 뿐입니다”
“다행이군요. 그럼 티켓 값은 2불 50센트입니다. 와인 한잔하시겠어요?”
콘서트 관람을 선택받은 청중들은 공연뿐만 아니라 주인공과 함께 술도 한잔할 수 있었으니 그야말로 혁신적인 티켓 판매 방식이라고 아니 할 수 없을 겁니다.
매스컴들이 사기극이라며 그녀를 헐뜯고, 그녀의 라이벌(?)들이 ‘하이 C의 살인자’라고 그녀에게 욕을 해대도, 그녀는 대범하게 이 모든 세력을 ‘불한당’으로 간주하고, 자신의 능력을 시샘해서 행하는 질투로 치부해버렸습니다. 한번은 교통사고로 다친 적이 있는데, 그녀는 운전사를 고소하기는커녕 그날 비명을 지른 이후 고음이 더 잘 나온다며 택시 기사에게 최고급 시가를 선물할 정도로 작은 일에 개의치 않는 대범한 소프라노였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예술을 논할 때는 결코 대범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밤의 여왕의 아리아’를 녹음한 후, 고음 부분에서 단 한 부분이 마음이 들지 않는다며 못내 아쉬워했을 정도로, 예술에 대해서는 완벽주의적인 열정을 불태운 소프라노였습니다. 소프라노들이 노래 부르길 극도로 꺼리는, 최고의 기교가 등장하는 ‘밤의 여왕의 아리아’나 <라크메> 중 ‘종의 노래’, <낙소스 섬의 아리아드네> 중 ‘체비네타의 아리아’ 등은 오히려 그녀의 주된 레퍼토리였습니다. 그녀가 부르지 못하는 노래는 없었고, 그녀가 부르지 않는 노래도 없었지만, 그녀는 특히 화려한 기교가 돋보이는 콜로라투라 아리아들을 즐겨 불렀습니다.
1944년 10월 25일, 76세의 마담 젠킨스는 마침내 호텔 연회장을 벗어나서, 당시 클래식 연주자들의 성지인 ‘카네기홀’에서 공연을 하게 됩니다. 공연표는 6주 전에 일찌감치 매진되었고, 카네기홀 측은 6,000달러 이상의 매상을 올렸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녀는 공연 한 달 후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혹자는 그녀가 공연 후 혹평에 시달리다 마음의 상처를 입어서 일찍 떠난 것이라고도 하지만, 그녀는 불행했던 소프라노가 아니라 죽는 날까지 자신이 하고픈 일을 마음껏 하다가 떠난 행복한 예술가였습니다.
비록 반어적인 표현으로 쓴 기사이긴 해도 <뉴욕 월드 트리뷴지>의 기사 속에는 ‘마담 젠킨스’를 다른 예술가들과 구별 짓게 하는 그녀만의 독특한 위대함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대중 앞에서 노래하는 모든 가수 중에, 원래의 음표를 4분의 1 낮춰 부르거나 높여 부름으로써 프레이즈에 즉흥성을 부여하고, 독특한 풍미를 덧붙여 노래 예술을 완성시킨 가수는 오로지 ‘젠킨스’뿐이다.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한번 생각해보라. 이 위대한 예술가의 공적을 오직 테크닉만으로 평가하는 것은 매우 무례한 일이다.”
지금 이 이야기를 음악과 함께 듣지 않고 그저 읽기만 한다면 아마도 절대 이해되지 않을 겁니다. 그녀의 음악을 들어본 후라면, 더더욱 이 이야기를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소프라노 플로렌스 포스터 젠킨스는 날개가 녹아 추락해도 포기하지 않고 태양을 향해 끝없이 날아가던 신화 속의 이카루스처럼, 예술에 대한 동경과 열정을 멈추지 않았던 위대한 예술가였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최고가 될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포기하지도 않았던 그녀의 끝없는 열정에 찬사를 보내며, 그녀의 지치지 않는 도전을 영원히 응원합니다.
혹시라도 그녀의 노래를 듣고, 도무지 이 이야기가 믿어지지 않는 독자들이 있다면, 그녀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 <플로렌스>를 감상해보시길 권해드립니다.

플로렌스 포스터 젠킨스 - 잊을 수 없는 목소리 [2016 리마스터]

플로렌스 포스터 젠킨스 – 잊을 수 없는 목소리 [2016 리마스터]

아티스트 : 젠킨스 (Florence Foster Jenkins)

작곡 : 모차르트 (Wolfgang Amadeus Mozart), 리야도프 (Anatoly Lyadov), 구노 (Charles Gounod)

레이블 : 소니뮤직(SonyMusic)

발매일 : 2016. 04. 29

장르 : 클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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