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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개 극장의 엇갈린 운명

3개 극장의 엇갈린 운명

writer 이승엽(세종문화회관 사장)

‘문화폭발’의 바탕에는 예술의 가치에 대한 확장이 깔려있다. 예술 그 자체로서도 가치 있지만사회적, 경제적, 산업적으로도 편익이 크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문화예술이 그만큼 중요해진 것이다.
그 차이가 3개 극장의 엇갈린 운명을 설명할 수 있는 것 중의 하나다.

서울 부민관 / © 한양대학교 동아시아건축 역사 연구실

서울 부민관

1930년대 중반에 문을 연 극장들이 몇 개 있다. 부민관(1934년), 동양극장(1935년) 그리고 명치좌(1936년)는 그 중의 일부다. 부민관은 공공극장이다. 지금의 서울시에 해당하는 경성부가 주동이 되어 경성전기주식회사의 기부금으로 지었다. 근대적 개념에서의 첫 공공극장이다. 위치도 서울의 한복판이었고 규모와 시설은 예외적일 정도로 크고 화려했다. 3개의 공연장 중 가장 큰 대강당은 좌석이 1천8백석에 달했다. 당시로서는 드물게 냉난방 시설을 갖추었고 무대기술 측면에서 최첨단 시설을 갖췄다. 당시 서울시내에 공연을 할 수 있는 실내공연시설이 10여개 있었지만 비교가 되지 않았다고 한다.
식민지시절의 관립극장이었던 부민관은 해방 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국립극장으로 사용되었다. 해방후 시공관으로 사용되던 부민관이 국립극장으로 옷을 갈아입은 것이 1950년 4월 29일이다. 한국전쟁으로 문을 닫기 전 2개월이 채 되지 않은 짧은 국립극장시절이었다. 이후 부민관은 서울수복 후 국회의사당으로 사용되었다.

1975년 여의도에 새 국회의사당이 생겨 옮겨가기 전까지였다. 이후에는 세종문화회관 별관으로 이용되다가 지방자치제 실시 이후 지금까지 서울시의회가 사용하고 있다. 지금도 서울시의회 본회의장에 가보면 의장석이 있는 무대를 알아볼 수 있다.
동양극장의 운명은 가혹했다. 동양극장은 홍순언과 그의 아내 배구자에 의해 지어진 민간극장이었다. 객석수가 648석에 회전무대와 호리전트까지 갖춘 최초의 연극전용극장으로 각광을 받았다. ‘청춘좌’와 ‘호화선’이라는 두 개의 전속극단을 갖추고 레퍼토리시스템으로 운영했다. 탄탄하고 프로페셔널한 극장 운영 방식이다. 순수한 민간극장이었던 동양극장은 격변하는 환경에 따라 출렁거렸다.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치며 공연장으로서의 기능은 마감되고 한동안 영화관으로 사용되었다. 1976년 현대건설에 팔리면서 동양극장은 그나마 유지하던 간판을 내렸다. 현대건설은 이 건물을 해외파견 노동자들의 교육용 강당으로 사용하다 1990년 건물을 철거했다. 1995년 그 자리에 새 건물이 들어섰다. 문화일보 사옥이다. 이 건물에는 동양극장의 맥을 잇는다는 의미에서 조성된 문화일보홀이 있다. 작지만 아담한 이 극장은 낮에는 노인층에 특화한 ‘청춘극장’으로 활용된다. 오래전 동양극장의 간판격이었던 전속단체 중 하나에서 따온 이름으로 보인다. 극장이 철거되는 과정에 연극인들의 항의가 있었지만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동양극장은 몇 장의 사진과 2000년대 초 방영된 TV 연속극으로 남았다.

서울 명치좌 전경 / © 한양대학교 동아시아건축 역사 연구실

서울 명치좌 전경

명치좌는 또다른 길을 걸었다. 명치좌는 식민지시절에 만들어진 영화관중의 하나다. 명치좌가 오픈한 1936년에만도 국도극장이 문을 열었다. 지금도 운영중인 부산의 부산극장(1932년) 광주의 광주극장(1934년) 등은 몇 년 앞선다. 명치좌는 일본인 자본에 의해 일본인 중심구역에서 운영하기도 했지만 주로 일본영화를 틀었다고 한다. 명치좌의 운명은 해방 후에 180도 바뀐다. 적산이었던 명치좌는 다른 영화관들과는 달리 공연장으로 탈바꿈한다. 적산을 인수한 서울시의 시공관으로 사용되다가 한국전쟁 후에는 국립극장으로 변신한다. 1973년 남산에 새로 국립극장을 지어 옮 길 때까지 명동국립극장은 우리나라 공연의 중심이었다.
그러나 남산의 새 국립극장이 본격 가동될 무렵 명동의 국립극장은 조용히 처분되었다. 놀라운 일은 다음이다. 30여년 후 비교적 온전한 상태에서 다시 공연예술계로 환원되었기 때문이다. 드문 예다.

정부가 건물주인 금융회사로부터 이 건물을 되산 것이 2003년이다. 연극인을 중심으로 한 예술인들의 청원도 뜨거웠지만 이를 능가한 것이 명동 상가연합회였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명동이라는 상권에서 좋은 공연장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있었다는 사실이 의미심장하다. 이 극장은 2009년 명동예술극장이라는 이름으로 재개관하며 연극부문의 공공극장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다.
비슷한 시기에 태어난 3개의 공간 중에 하나는 없어졌다. 하나는 다른 용도로 사용되고 있다. 하나만 활발하게 사용되고 있다. 동양극장이 맥없이 사라진 것은 1990년이고 부민관이 서울시의회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이 1991년이다. 명동국립극장을 금융회사로부터 되산 것은 2003년이다. 십여 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나는 그 기간이 19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한 우리나라의 ‘문화폭발’의 첫 10년이었다고 본다. ‘문화폭발’의 바탕에는 예술의 가치에 대한 확장이 깔려있다. 예술 그 자체로서도 가치 있지만 사회적, 경제적, 산업적으로도 편익이 크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문화예술이 그만큼 중요해진 것이다. 그 차이가 3개 극장의 엇갈린 운명을 설명할 수 있는 것 중의 하나다.
그로부터 다시 10여년이 지났다. 꺾일 줄 몰랐던 문화폭발의 기세는 좀 꺾인 것 같다. 대신 광장이 폭발했다. 내가 일하는 세종문화회관은 2016년 뜨거운 광장 한가운데 있다. 세종문화회관이라는 공간은 또 어떤 시대를 살아내고 있고 어디로 가고 있을까, 특히 토요일마다 많이 궁금하다.

촛불시위중인 세종로, 세종문화회관 앞 모습 / © 윤문성 (세종문화회관 홍보마케팅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