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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디트와 <유디트의 승리>

유디트와 <유디트의 승리>

writer 김성현(<조선일보> 문화부 기자)

비발디의 오라토리오 <유디트의 승리>. 이 작품 속 유디트는 관능적이고 아름다운 여성으로 묘사되었다.
당대 화가가 그린 그 어떤 누드보다 더 관능적으로 말이다.

크리스토파노 알로리의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들고 있는 유디트'

크리스토파노 알로리의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들고 있는 유디트’

베네치아와 터키는 지중해의 제해권을 다퉜던 숙적이었다. 1645년 베네치아와 터키 사이에 또다시 전쟁이 일어났다. 이전 해 몰타 기사단이 터키의 수송선을 습격한 사건이 전쟁의 핑계였다. 기사단이 습격한 수송선에는 술탄 황제의 여인들이 타고 있었다. 몰타 기사단의 배가 크레타에 20일 이상 머물렀다는 사실이 터키의 분노를 부채질했다. 당시 크레타를 지배하고 있던 베네치아는 기사단 배의 정박 사실을 몰랐다고 해명했지만 늦은 뒤였다. 70여 년 전의 레판토 해전에서 베네치아가 포함된 유럽의 신성 동맹에 치명적 패배를 당했던 터키로서는 이보다 좋은 설욕의 기회는 없었다. 그리스 남쪽의 지중해에 동서로 길게 누운 크레타 섬이 전쟁의 무대였다. 6만 명의 터키 대군이 크레타 섬에 상륙했다. 주요 도시를 차례로 점령한 뒤 1648년 크레타 섬의 최대 도시인 칸디아(현재 이라클리오)를 포위했다. 당시 베네치아의 수비군은 6천 명이 전부였다. 터키의 압도적 우위였지만, 해상 전력만은 베네치아가 우세했다. 이 공성전이 1669년까지 무려 22년간이나 계속될 줄은 양국 모두 짐작하지 못했다. 서양사에서 가장 오래 지속된 공성전이었다. 1669년 양국은 드디어 종전에 합의했다. 하지만 그 뒤에도 무력 충돌은 끊이지 않았다. 1714년 양국의 마지막 전쟁은 4년간 계속됐다. 이번에는 그리스 북서쪽 이오니아 제도의 최북단인 코르푸 섬이 전쟁의 무대였다. 1716년 7월 터키군 3만3천 명이 외성을 함락하고 포위했다. 하지만 프로이센 출신의 요한 마티아스 폰데어 슐렌버그 백작(1661~1747)이 이끄는 수비군 8천 명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카라바조의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치는 유디트'

카라바조의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치는 유디트’

코르푸 섬의 공방전도 전세는 베네치아 편으로 기울었다. 다음 달 9일 일어난 태풍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은 터키군은 포위를 풀고 20일 철수했다. 이 승전을 기념하기 위해 베네치아의 작곡가 안토니오 비발디(1678~1741)가 쓴 작품이 오라토리오 <유디트의 승리(Juditha Triumphans)>다. 유디트는 구약성서의 외경(外經) 가운데 하나로 이스라엘의 평범한 과부 이름이다. 이방인이나 고아와 마찬가지로 과부는 전통적으로 사회적 약자를 상징했다. ‘유디트’는 아시리아 왕 느부갓네살의 명을 받은 총사령관 홀로페르네스가 군대를 이끌고 이스라엘을 침공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아시리아군의 포위가 계속되자 이스라엘은 비축해둔 식량이 동나고 저수지마저 바닥을 드러내는 위기에 처한다. 결국 유디트는 과부를 상징하는 베옷을 벗고 화려하게 성장한 뒤 홀로페르네스의 막사로 향한다. 유디트의 아름다움에 현혹된 홀로페르네스는 연회에서 포도주를 잔뜩 들이켠 뒤 술에 취해 쓰러진다. 이 틈을 타서 유디트는 홀로페르네스의 머리를 칼로 자른 뒤 자루에 담아서 이스라엘로 돌아온다. 일종의 ‘미인계’였던 셈이다.

구스타프 클림트의 '유디트'

구스타프 클림트의 ‘유디트’

이스라엘이 대대적인 반격에 나서자 아시리아군도 철수하고 만다. 기독교와 유대교에서 유디트는 역사적 근거가 확실하지 않다는 이유에서 구약성서에 편입되지 못하고 외경으로 분류됐다. 이스라엘 공격을 명령한 느부갓네살이 아시리아의 왕으로 묘사되고 있지만, 실제로는 바빌론의 왕으로 보는 편이 사실에 가깝다는 점이 대표적인 예다. 하지만 피비린내 가득한 전장에 홀로 선 여성이라는 지극히 대조적인 이미지는 수많은 예술가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이탈리아 화가 카라바조(1571~1610)가 빛과 어둠의 강렬한 대비를 통해 극적으로 묘사했다면, 오스트리아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1862~1918)는 황금빛 물결을 통해서 관능적 매력을 한껏 살렸다. 비발디의 오라토리오에서 유디트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조국을 구하는 애국적 여인으로 묘사된다. 연약하지만 독실한 신앙심으로 가득한 여인 유디트가 베네치아였다면, 포악한 이교도 홀로페르네스는 사실상 터키를 상징했다. 적진에 들어가서 홀로페르네스의 머리를 베어오는 유디트의 고결한 행동은 터키의 끈질긴 포위 공격에도 코르푸 섬을 지켜낸 베네치아의 승전을 의미했던 것이다. 작품을 위촉받은 비발디는 바로크 오케스트라의 기본 편성인 바순과 하프시코드 같은 통주(通奏) 저음 악기와 현악기에 트럼펫과 클라리넷, 오보에와 리코더 등 다양한 관악기를 추가해서 관현악적 효과를 극대화했다.

25세 때인 1703년 사제 서품을 받은 비발디는 버려진 소녀들을 돌보고 가르치는 고아원인 ‘오스페달레 델라 피에타(Ospedale della Pieta)’에서 바이올린을 가르쳤다. 1346년 설립된 이 고아원은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을 운영하고 있었고, 악단과 합창단은 유럽 전역에서도 최고 수준으로 손꼽혔다. 비발디의 기악 협주곡이나 종교곡도 이 악단과 합창단을 통해서 연주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유디트의 승리>에서 주인공 유디트뿐 아니라 적장 홀로페르네스까지 주요 배역 5명을 모두 소프라노와 알토 등 여성 독창자에게 맡긴 것도 이 때문이다. 이 작품이 초연된 1716년 무렵 비발디의 명성은 유럽 전역으로 퍼지고 있었다. 1711년에는 암스테르담에서 <화성의 영감> 악보집이 출간됐고, 1730~1740년대에는 파리에서도 비발디의 악보들이 나왔다. 7세 연하의 작곡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1685~1750)는 비발디의 협주곡과 아리아에서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바흐는 <4대의 하프시코드를 위한 협주곡> 등 비발디의 기악 협주곡 17곡을 편곡하기도 했다. 하지만 오페라 작곡가로서 유럽을 평정하고자 했던 비발디의 야심은 비극적 운명으로 귀결되고 말았다.

비발디 초상화(추정)

비발디 초상화(추정)

1728년 비발디는 이탈리아 북부 트리에스테를 방문한 오스트리아 황제 카를 6세를 알현했다. 이 자리에서 비발디는 12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 <라 체트라(La Cetra)>를 황제에게 헌정했다. 이 작품을 마음에 들어 한 황제는 비발디를 빈으로 초대했다. 결국 비발디는 고향 베네치아를 떠나 오스트리아 빈에 진출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비발디가 빈에 도착한 직후인 1740년 황제 카를 6세는 중병에 걸려 55세에 급서하고 말았다. 프랑스 계몽주의 철학자 볼테르는 카를 6세가 독버섯을 잘못 먹은 것이 사인(死因)이라고 회상록에 적었다. 비발디는 최고의 후원자를 졸지에 잃은 셈이 됐다. 결국 작곡가는 극도의 가난에 시달리다가 이듬해 이역만리에서 객사하고 말았다. 오스트리아 진출이라는 야망에 비하면 너무나 허망한 죽음이었다. 그 뒤 200년 가까이 비발디는 서양 음악사에서 철저하게 잊힌 채 남아 있다가, 20세기 들어서야 재발견되기에 이른다. 대표작 <사계>를 연주한 음반이 1,000종 이상 쏟아질 줄은 작곡가 자신도 예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비발디는 생전에 불우했지만, 사후에 복 받은 작곡가이기도 했다.

피에르 레오네 게치가 그린 비발디 캐리커처

피에르 레오네 게치가 그린 비발디 캐리커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