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ST175

혼자서는 연주회를 열 수 없던 피아니스트

제럴드 무어의 <고별 리사이틀 실황> 앨범

혼자서는 연주회를 열 수 없던 피아니스트

제럴드 무어의 <고별 리사이틀 실황> 앨범

writer 이상민(음반칼럼니스트)

피아노를 치는 손

1967년 2월 20일, 당대 최고의 성악가 세 명이 런던의 한 콘서트홀에 모여들었습니다. 오페라 무대는 물론, 웬만해서는 한자리에 모이기 힘든 인기 절정의 스타들이었죠. 그들은 바로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 ‘빅토리아 데 로스 앙헬레스’ 그리고 ‘엘리자베트 슈바르츠코프’였습니다. 세 명 모두 당대를 주름잡던 최고의 명가수들이었죠.

이들이 어렵사리 시간을 내서 런던의 ‘로열 페스티벌홀’에 모인 이유는, 한 가지 같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평생 동안 그들의 음악 동료이자 친구였던, 한 노(老) 피아니스트의 은퇴 무대에 함께 서기 위해서였죠. 그는 평생을 그들과 같이, 같은 시각, 같은 장소, 같은 레퍼토리로 공연했지만, 성악가나 다른 연주자의 도움 없이는 혼자서 리사이틀을 열 수 없었던 피아니스트였습니다.

그도 엄연한 피아니스트였지만, 관객들의 기대와 축하를 한몸에 받는 ‘콘서트 피아니스트’는 아니었습니다. 그 대신 항상 최고의 성악가들과 독주자들 곁에서, 있는 듯 없는 듯 묵묵히 그들을 보좌하는 ‘반주 피아니스트’였죠. 함께한 공연이 끝난 후에도, 언제나 한 발짝 뒤에 물러서서 관객들의 환호를 독주자에게 양보하곤 했으며, 단 한 번도 그들보다 앞에 나선 적이 없었던 피아니스트였습니다.

연주 중 가끔 샘솟는 열정이 찾아오더라도 늘 넘치지 않도록 자제해야 했으며, 언제나 자신의 피아노 소리가 너무 크지 않을까 노심초사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같이 공연하는 친구들의 단점은 적절히 가려주고, 장점은 잘 드러나도록 부각시켜주며, 그들이 가진 것을 최상으로 끌어낼 수 있도록 지원해야만 했죠. 이 지극히 어려운 임무를 언제나 성실히, 최고로, 그리고 평생을 수행해냈던 위대한 예술가! 그의 이름은 바로 ‘제럴드 무어’였습니다.

사실 반주 피아니스트의 위상은 20세기에 이르러서도 지극히 낮은, 보잘것없는 수준이었습니다. 1930년대 러시아의 유명한 성악가인 ‘알렉산더 키프니스’는 반주자의 이름이 자신의 이름과 함께 레코드 라벨에 게재되면 자신의 품위가 떨어진다며 노골적으로 반감을 표시할 정도였죠. 하지만 제럴드 무어는 반주자가 실패한 피아니스트라는 통념을 뒤엎으며, 반주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 최초의 피아니스트였습니다.

그와 함께 공연이나 레코딩을 남기지 못한 성악가가 오히려 최고의 아티스트로 대접받지 못할 정도로, 그는 반주 피아니스트의 위상을 최고로 높여 놓았습니다. 한스 호터,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 엘리자베트 슈바르츠코프, 헤르만 프라이, 빅토리아 데 로스 앙헬레스, 자네트 베이커 같은 당대 최고의 가수들이 앞다투어 그와 레코딩을 남겼고, 폴 토르틀리에, 피에르 푸르니에, 자클린 뒤 프레 같은 최고의 첼리스트들이나 예후디 메뉴힌 같은 위대한 바이올리니스트들이 제럴드 무어와 함께 공연하며 최고의 명반들을 남겨놓았습니다.

오늘 소개하는 이 유명한 제럴드 무어의 <은퇴 공연 실황> 음반은 ‘슈바르츠코프’와 ‘앙헬레스’라는 걸출한 소프라노 두 명이 권위를 벗어버리고, 익살스러운 고양이로 분해서 노래하는 로시니의 ‘고양이 이중창’이 매우 유명하고(CD1, track 9) , 무대를 떠나는 노 대가의 마지막 ‘연설’도 꽤 유명합니다 (CD2, track 3) . 게다가 평생 처음으로 마음껏 ‘튀는’ 제럴드 무어의 피아노 반주도 제대로 감상할 수 있죠. 하지만 그보다 더 이 음반을 잊을 수 없게 만드는 건, 오직 이 음반에서만, 그 어디에서도 만날 수 없는, 단 한 번뿐인 제럴드 무어의 ‘피아노 독주’를 감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셀 수 없이 수많은 무대에 섰지만, 자신만을 위한 연주를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예술가에게 찾아온, 처음이자 마지막인 피아노 독주! 여러분이라면 이런 은퇴 무대에서 어떤 곡을 연주하시겠습니까? 그가 선택한 곡은 길고 복잡한 소나타도 아니고, 기교로 충만한 비르투오조곡도 아닌, 짧디짧은 슈베르트의 ‘음악에게(An die Musik D.547)’라는 가곡이었습니다(CD2, track 4) .

채 2분도 안 되는 짧은 곡이고, 옆집의 꼬마 피아니스트도 충분히 연주할 만한 단순한 곡이지만, 이 연로한 피아니스트가 들려주는 피아노 소리가 그 어떤 피아노 명곡보다도 긴 여운으로 남아 있는 건, 비단 저뿐만의 상념은 아니겠죠?

마지막으로, 끝까지 유머를 잃지 않은 그의 마지막 ‘연설’을 이 자리를 빌려 말 대신 ‘글’로 소개해드립니다.

모두 자리에 좀 앉아 주세요(웃음). 신사 숙녀 여러분, 오늘 저는 반주자로서 겸손한 태도를 갖추지 못했습니다(웃음). 사실 저는 지금까지 항상, ‘내 반주 소리가 너무 크지 않았나?’ 하는 질문을 계속 해왔었습니다(웃음). 하지만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이렇게 위대한 세 명의 성악가들이, 같은 프로그램, 같은 무대, 같은 시간에, 동시에 공연을 한다는 것은 대단히 자랑스러운 일입니다(박수). 사실 이 세 분이 이 시간에 같은 대륙에 있다는 것 자체가 경이로운 일입니다(웃음). 오늘 저녁, 이분들이 저에 대한 애정으로 이곳에서 공연한다는 것을 알기에, 저는 더욱 영광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박수). 사실 오늘 무대에 서지는 않았지만, 무대 뒤에는 네 번째 인물이 있습니다. 이분은 지난 40년간 저와 같이 일해온 사람입니다. 오늘 이 공연을 기획했으며, 이 공연의 프로그램도 그가 준비했습니다. 그분은 바로 ‘월터 레그’입니다(박수). 그리고 이제 저는 여러분께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이 무대 위에서 제가 지난 수십 년간 경험한 여러분들의 호의가, 절정에 이른 것이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한 여러분이 항상 저에게 보내주신 관대함에도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하지만 여러분에게 한 가지 더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오늘 아마 수백 분들이 ‘엘리자베트’를 만나기 위해 무대 뒤로 오려 할 것이고, 또 수백 분들이 ‘빅토리아’를 만나러 오려 할 것입니다. 그리고 ‘디트리히’를 만나보고 싶어 오시는 분들도 수백 명… 그리고 아마 몇 분쯤은(웃음) 저의 뒤통수라도 보려고 무대 뒤로 오려 하시겠죠. 하지만 오늘만큼은 아티스트의 대기실로 찾아오지 말 것을 부탁드립니다. 만일 오신다면, 오늘 저녁, 우리에게 아름다운 목소리로 큰 기쁨을 선사한 훌륭한 성악가들이, 밤늦게까지 여기에 남아 있어야 하는 것은 물론, 집으로 돌아가는 마지막 버스를 놓치게 될 것입니다(웃음). 그렇기에 오늘 ‘엘리자베트 슈바르츠코프’, ‘빅토리아 데 로스 앙헬레스’,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 ‘월터 레그’. 이 네 분을 대신하여, 제가 이렇듯 훌륭한 저녁을 함께해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이제 여러분께 이별 인사를 드리며, 감사한 마음을 이렇게 표현하고자 합니다(피아노 앞으로 걸어가는 구둣발 소리…. 그리고 들려오는 음악 소리) .

A Tribute to Gerald Moore

A Tribute to Gerald Moore

아티스트 : Gerald Moore

앨범 종류 : 정규

발매일 : 2005.11.28

장르 : 클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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