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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과 <솔로몬>

열왕기상과 <솔로몬>

writer 김성현(<조선일보> 문화부 기자)

헨델의 <수상 음악>이나 <왕궁의 불꽃놀이> 같은 작품은 영국의 국가적 품격을 높이고자 만들어진 곡일까?
이 작품들에 숨겨진 진짜 이야기를 들어보자.

1714년 영국의 앤 여왕이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났다. 그는 평생 17차례 이상 임신했지만 대부분 유산됐고, 태어난 아이도 유년기를 넘기지 못했다. 앤 여왕은 극심한 통풍으로 제대로 서 있을 수 없어서 의자에 앉아서 살다시피 했다. 이런 습관은 비만으로 이어졌고, 당뇨병과 고혈압의 합병증으로 병치레가 잦았다. 앤 여왕이 세상을 떠나자 영국 왕실은 후임자를 찾기 위해 왕실 족보를 뒤졌다. 하지만 ‘가톨릭교도나 그의 배우자는 영국 국왕이 될 수 없다’는 1701년의 왕위 계승법 때문에 단단히 골머리를 앓았다. 왕위 계승 서열로 볼 때 상위 50여 명이 모두 구교도였던 것이다. 신교도 중에서는 57위였던 독일 하노버 선제후 게오르크 1세(1660~1727)가 그나마 서열이 가장 높았다. 게오르크 1세는 54세에 영국으로 건너와 조지 1세가 됐다. 하노버 왕조의 탄생이었다.
조지 1세는 모국어인 독일어와 프랑스어를 능숙하게 구사했고 라틴어와 이탈리아어, 네덜란드어도 알았다. 하지만 정작 영어는 서툴렀다. 영국 왕이 될 줄은 몰랐으니 영어를 배울 일이 없었을 것이다. 영국인들은 영어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는 ‘외국인 국왕’을 비웃기 바빴다. 조지 1세는 냉소와 조롱의 대상으로 전락했지만, 역설적으로 영국 헌정사에서는 지대한 공헌을 했다. 정치적 실권이 총리에게 넘어갔고, 오늘날 입헌군주제의 기틀이 마련된 것이다. 역사가 앙드레 모루아는 <영국사>에서 “하노버 왕조 초기의 국왕들은 평범했기 때문에 영국의 군주제를 입헌군주제로 전환하는 데 공헌했다”고 재치 있게 평했다. 당시 20년간 내각을 이끌었던 로버트 월폴 경은 영국의 초대 총리로 불린다.

에드워드 포인터의 '시바 여왕의 방문'

에드워드 포인터의 ‘시바 여왕의 방문’

존 우튼의 '데팅겐 전투에서의 조지 2세'

존 우튼의 ‘데팅겐 전투에서의 조지 2세’

조지 1세가 왕위에 오르자, 작곡가 헨델은 발등에 불이 떨어진 신세가 되고 말았다. 조지 1세는 헨델이 영국으로 건너오기 이전에 독일 하노버 궁정에서 모셨던 선제후였던 것이다. 여기서부터 정사(正史)와 야사(野史)의 기술은 다소 엇갈린다. 선제후의 허락을 받지 않은 채 영국에 눌러앉았던 헨델은 새 국왕의 심기가 불편하지 않은지 전전긍긍했다는 것이 야사의 설명이다. 조지 1세의 뱃놀이 소식을 접한 헨델이 부랴부랴 작곡한 작품이 <수상 음악>이라는 것이다. 반면 정사는 기품 있게 ‘헨델이 영국 왕실의 의뢰를 받고 작곡한 관현악곡’이라고만 묘사한다.
작품 이름처럼 <수상 음악>은 1717년 7월 17일 왕실 뱃놀이가 열린 런던 템스 강의 선상에서 초연됐다. 이 작품에 만족한 조지 1세는 이날만 3차례 연주하도록 명했다고 한다. 앤 여왕에게 후사가 없었다는 점이 비밀이 아니고, 조지 1세가 유력한 왕위 계승 후보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정사가 사실에 가깝다는 것이 역사학자들의 중론이다.

하지만 이 에피소드는 하노버 왕조와 헨델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적지 않은 힌트를 준다. ‘독일인 왕조’와 ‘독일인 작곡가’는 애초부터 영국에서 생사고락을 함께할 수밖에 없는 ‘운명 공동체’였다는 점이었다.
1727년 조지 1세가 세상을 떠나고 아들 조지 2세가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대관식을 올렸을 때, ‘제사장 사독(Zadok the Priest)’을 포함해 4개의 대관식 찬가를 작곡한 것도 헨델이었다. 평소 군사 방면에 관심이 많았던 조지 2세는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일어나자 1743년 데팅겐 전투에 영국군을 이끌고 참전했다. 그는 영국 역사상 전쟁터에서 직접 군대를 지휘한 마지막 군주였다. 이 전투의 승전을 기념하기 위해 헨델이 작곡한 곡이 <데팅겐 테 데움>이다. 헨델은 하노버 왕조의 음악적 대변인이었던 것이다.
조지 2세가 재임했던 18세기 초 영국은 스튜어트 왕조의 복귀를 꿈꿨던 재커바이트 반란과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1740~1748), 7년 전쟁(1756~1763) 등 내우외환이 끊이지 않았다. 전쟁으로 점철됐던 이 시기는 ‘제2의 백년 전쟁’으로 불리기도 한다. 하지만 영국은 북미 대륙에서 프랑스를 누르고 7년 전쟁에서 승리하며 광범위한 식민지를 거느린 제국으로 부상했다. 상비군과 해군 육성에 나서는 한편, 세금 징수와 재정 관리를 위해 중앙 행정 기구를 개편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영국은 전쟁을 통해 산업과 식민지, 군사력에서 모두 세계 최강국으로 발돋움했던 것이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끝난 이듬해인 1749년 헨델이 발표한 오라토리오가 <솔로몬>이다. 전쟁이 막바지로 향하고 있던 1748년 5월 헨델은 오라토리오 작곡에 착수했다. 전쟁을 끝맺는 엑스라샤펠 조약(Treaty of Aix la Chapelle)이 체결된 것은 그해 10월, <솔로몬>이 초연된 건 이듬해 3월이었다. 작품의 대본을 쓴 작사가는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솔로몬> 직후에 작곡한 오라토리오 <수잔나>의 작사가와 동일 인물로 추정된다. 새와 꽃처럼 자연에 대한 은유적 표현을 자연스럽게 구사한 것으로 볼 때 시인이나 전문 작가의 솜씨일 것으로 음악학자들은 보고 있다. 작품에 담긴 정치적 메시지는 노골적일 정도로 명백했다. ‘조지 2세는 솔로몬처럼 위대한 군주이며 영국은 솔로몬 치세의 이스라엘 왕국과 같은 전성기’라는 것이었다. 헨델 전기를 집필한 영국 음악학자 퍼시 영은 “제국의 위대함과 경제적 강대함이라는 시각에서 하노버 왕조의 시대 정신을 찬미하려는 작품”이라고 평했다. 자유 무역과 평화에 기반한 국가 번영이라는 작품의 주제는 조지 2세 당시 집권 세력인 휘그당의 정책이기도 했다.
“무장한 병사들이 더 이상 우리의 희망을 짓밟지 못하리라. 평화가 날개를 펴고 기쁨을 선사하리라”라는 오라토리오 2막의 가사에는 평화를 염원하는 심경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에두아르 함만의 '<수상 음악> 초연 당시의 헨델과 조지 1세'”></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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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두아르 함만의 ‘<수상 음악> 초연 당시의 헨델과 조지 1세’

니콜라 푸생의 '솔로몬의 심판’

니콜라 푸생의 ‘솔로몬의 심판’

구약성서 열왕기상에서 솔로몬의 인간적 흠을 솔직하게 묘사한 구절들은 윤색이나 삭제가 불가피했다. 선왕 다윗에게 왕위를 물려받은 솔로몬은 왕권을 넘보던 이복형제와 반대파를 철저하게 숙청하면서 왕권 강화에 나섰다. 또 호색가였던 솔로몬은 말년에 700명의 왕비와 300명의 후궁을 거느렸다. 외국 여인들이 그의 왕정에 머물면서 우상 숭배의 폐습도 되살아나기에 이르렀다. 달이 차면 기우는 것처럼 솔로몬의 40년 치세는 이스라엘 왕국이 쇠락하는 시기이기도 했던 것이다. 솔로몬 사후, 이스라엘 왕국은 북쪽의 이스라엘과 남쪽의 유다 왕국으로 분열되고 말았다. 하지만 헨델의 오라토리오에는 솔로몬의 도덕적 타락이나 하노버 왕조의 정통성에 의문을 던지는 내용은 담겨 있지 않다. 반대로 살아 있는 아이를 두고 서로 자신의 소생이라고 주장하는 두 여인 가운데 진짜 어머니를 가려낸 솔로몬의 판결이나 이스라엘 궁정의 호화로움에 감탄한 시바 여왕처럼 솔로몬의 지혜로움과 왕국의 번영을 강조하는 일화로 채워져 있다.

심지어 1,000여 명의 아내를 거느렸다는 성경의 비판적 기술과는 달리, 오라토리오 1막에서 솔로몬은 이집트 파라오의 딸인 왕비에게 충실한 인물로 묘사된다. 극적 갈등은 물론, 등장인물의 질시와 대립조차 나오지 않는 이 오라토리오는 통일성이 부족하고 다소 헐겁고 느슨한 구성에 머물고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 오라토리오는 초연 당시 3차례 공연에 그치는 등 흥행 측면에서는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작곡가 생전에 다시 공연된 것은 초연 10년 뒤인 1759년에 이르러서였다. 재공연 6주 뒤 헨델은 세상을 떠났다.
헨델의 적지 않은 작품들처럼, 이 오라토리오에서도 극적인 단조로움을 상쇄하는 것이 음악적인 화려함이다. 특히 3막에서 오보에와 현악기들이 연주하는 ‘시바 여왕의 도착’은 2012년 런던 올림픽처럼 국가적 행사 때마다 즐겨 연주하는 곡이 됐다. <수상 음악>이나 <왕궁의 불꽃놀이> 같은 다른 행사용 작품과 마찬가지로 당초 헨델이 아부하고자 했던 대상은 하노버 왕조였지만, 결과적으로는 영국의 국가적 품격을 높이는 결과를 낳았던 것이다. 어쩌면 이 점이야말로 헨델 음악의 유쾌한 역설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