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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과 헨델의 <사울>

사무엘상과 헨델의 <사울>

writer 김성현(<조선일보> 문화부 기자)

헨델의 <사울>이 탄생하기까지는 그의 음악적 재능과 더불어
다른 사람의 의견을 경청하고 받아들이는 음악적 유연성이 있었기에 가능했을지 모른다.

에른스트 요셉손의 '다윗과 사울'

에른스트 요셉손의 ‘다윗과 사울’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

1738년 7월 영국 런던의 헤이마켓 극장에서 개막할 예정이던 오페라 시즌이 급작스럽게 취소됐다. 극장 운영을 책임지고 있던 존 제임스 하이데거(1666~1749)는 “티켓 예매가 부진한 데다, 한 성악가에게 최대 1,000기니의 출연료를 지급하기로 했지만, 이견이 생기는 바람에 부득이하게 진행할 수 없게 됐다”고 취소 사유를 밝혔다. 실은 이전 해에 상연했던 헨델의 오페라 3편이 연달아 흥행 참패를 겪은 것도 원인이었다.
스위스 출신의 하이데거는 일찌감치 런던에서 가장무도회를 개최해서 성공을 거뒀던 공연 기획자였다. 그는 1727년 국왕 조지 2세의 대관식 당시 웨스트민스터 성당에 1,800개의 초를 순식간에 밝히는 이벤트로 화제를 모았다. 이 대관식에서 4곡의 축가를 발표했던 작곡가가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1685~1759)이었다. 하이데거는 1729년 자신이 운영하는 극장의 공동 파트너로 헨델을 영입해서 오페라를 상연했다. 이들은 결별과 재결합을 거듭한 뒤 1738년 새로운 시즌을 의욕적으로 준비했지만, 예상 밖의 흥행 부진 앞에서는 별도리가 없었다.
사정이 다급해진 쪽은 작곡가 헨델이었다. 독일 출신의 헨델은 약관 스무 살에 이탈리아로 건너가 5년간 활동했다. 독일 관현악과 이탈리아 성악의 장점을 고루 흡수했던 ‘음악계의 월드 스타’였던 것이다. 헨델이 1712년 영국에 정착한 직후에 꺼내 들었던 ‘비장의 승부수’가 이탈리아 오페라였다. 헨델은 그 뒤 30년간 40여 편의 이탈리아 오페라를 발표했을 만큼 이 장르에 애정을 쏟았다. 영국 오페라 데뷔작이었던 <리날도>부터 <줄리오 체사레>까지 히트작도 많았지만, 1730년대에 접어들면서 오페라의 열기는 점차 식어 들었다. 영국 관객들 앞에서 이탈리아어로 노래해야 하는 언어 장벽의 문제뿐 아니라 오페라 극장의 난립과 과열 경쟁도 흥행 부진을 부채질했다. 위기감을 느낀 작곡가가 이탈리아 오페라의 대안으로 진지하게 고민했던 장르가 영어 오라토리오였다.

구에르치노의 '다윗을 공격하는 사울'

구에르치노의 ‘다윗을 공격하는 사울’

렘브란트의 '사울 앞에서 하프를 연주하는 다윗'

렘브란트의 ‘사울 앞에서 하프를 연주하는 다윗’

헨델은 이탈리아 체류 시절인 1707년부터 간간이 종교적 주제의 오라토리오를 발표했다. 하지만 신교도의 책무에 충실했던 동갑내기 작곡가 바흐와 달리, 세속적 성공의 열망에 불탔던 헨델에게 오라토리오는 어디까지나 오페라에 비해 부차적인 장르였다. 하지만 청중 기호의 빠른 변화 속에서 헨델도 고심을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헨델 앞에 나타난 작사가가 부유한 지주 출신의 예술 후원자였던 찰스 제넨스(1700~1773)였다.
제넨스는 1688년 명예혁명으로 퇴위한 스튜어트 왕조의 제임스 2세와 후계자에게 충성을 서약해서 공직에 진출하지 않았던 선서 거부자(Nonjuror)였다. 하지만 예술에 대한 심미안이 뛰어나 당대 최고의미술품 수집가로 꼽혔고, 셰익스피어 작품집 발간에도 편집자로 참여했다. 헨델과 제넨스가 1738년 처음으로 호흡을 맞춘 오라토리오가 <사울>이었다. 사울은 구약성서 ‘사무엘상’에 등장하는 이스라엘 왕국의 첫 국왕이다. 그는 선지자 사무엘의 점지를 받고 왕위에 오른 뒤 블레셋인들과의 전쟁에서연전연승을 거뒀다. 하지만 사울이 초심을 잊고 신의 뜻을 거스르자, 다윗이 새로운 후계자로 지목되기에 이른다. 질투에 사로잡힌 사울은 다윗을 핍박하고, 다윗은 적국인 블레셋 땅으로 망명해서 목숨을 부지한다. 구약성서의 사무엘상은 무엇보다 ‘살아 있는 권력’과 그 후계자 사이의 갈등에 대한 이야기였다.
헨델과 제넨스는 1742년 오라토리오 <메시아>의 명콤비로 서양 음악사에 이름을 남겼다. 하지만 처음부터 이들의 호흡이 찰떡궁합이었던 건 아니었다. 제넨스는 1735년 7월쯤 대본의 초안을 완성한 뒤 헨델에게 건넸다. 이 대본이 <사울>로 추정된다. 하지만 헨델은 3년간 작곡에 착수하지도 않았다. 그때까지도 헨델의 관심은 오페라에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오페라 흥행 참패로 위기감을 느낀 작곡가는 뒤늦게 곡을 쓰기 시작했다. 일단 작곡에 착수하자 헨델은 전광석화 같은 속도로 3개월 만에 작품을 완성했다.
이 오라토리오는 다윗이 블레셋의 거인 골리앗을 돌팔매로 쓰러뜨리고 사울의 후계자로 부상하는 대목에서 출발한다. 작품 초반부터 권력 투쟁과갈등을 전면에 부각시킨 것이다. 헨델은 엔도르의 무녀(巫女)가 사울 왕의 몰락을 예언하는 3막 장면에서 극적 효과를 부각하기 위해 런던 탑에서 대형 팀파니를 빌려왔다. 하지만 초연 당시에는 헨델이 지나치게 큰 팀파니를 대여하는 바람에 ‘잘못 캐스팅한 성악가들의 목소리를 시끄러운 소음으로 가리기 위해서’라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찰스 제넨스

찰스 제넨스

헨델은 작품 연주를 위해 500파운드를 들여서 자신이 연주할 오르간을 직접 구입했다. 오케스트라에는 차임벨 같은 효과를 내는 건반 악기인 카리용(Carillon)과 트롬본 3대까지 이례적으로 편성했다. 그만큼 다채롭고 풍성한 음악적 효과에 심혈을 기울였던 것이다. 헨델은 4악장 규모의 장대한 서곡으로 오페라의 문을 열었고, 사울이 길보아산 전투에서 블레셋인들에게 패해 전사하는 3막에는 ‘전투 교향곡(Battle Symphony)’을 집어넣는 등 당대의 관현악 기법을 총동원했다. 헨델 연구자인 음악학자 윈턴 딘의 평처럼 “그리스 비극 <오레스테이아>나 셰익스피어의 <리어 왕>에 비견할 만한 극 예술의 걸작”이 탄생한 것이었다.
당초 작곡가가 원했던 결말은 ‘할렐루야’ 같은 화려한 합창이었다. 하지만 작사가인 제넨스의 생각은 달랐다. 사울 왕은 다윗에 비하면 분명히 악당이었지만, 이스라엘 국왕의 죽음으로 작품이 끝난다면 그에 걸맞은 장중한 음악이 필요하다는 의견이었다. 결국 헨델은 ‘할렐루야’ 합창을 1막으로 옮기는 대신, 사울의 죽음을 애도하는 ‘장송 행진곡’으로 작품을 마무리했다. 덕분에 사울도 다윗을 시샘했던 편협하고 옹졸한 인물이라는 일면적 평가에서 벗어나 자기 증오와 질투 같은 복합적 내면을 지니고 있던 비극적 영웅으로 재해석됐다.
1739년 작품 초연 이후 ‘장송 행진곡’은 에이브러햄 링컨 미국 대통령과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 등 세계 지도자들의 국장(國葬) 때마다 연주됐다. 지난 2015년 3월 리콴유 싱가포르 총리가 세상을 떠났을 때 싱가포르의 공군 군악대가 연주했던 추모곡도 헨델의 ‘장송 행진곡’이었다. 음악적 경륜이나 재능에서 제넨스는 도무지 헨델의 상대가 될 수 없었지만, 헨델이 별다른 고집을 부리지 않고 흔쾌히 제넨스의 의견을 받아들인 덕분에 또 하나의 걸작이 탄생한 것이었다. 어쩌면 헨델 최고의 음악적 미덕은 유연성이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