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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서와 헨델의 오라토리오 <여호수아>

여호수아서와 헨델의 오라토리오
<여호수아>

writer 김성현(<조선일보> 문화부 기자)

구약성서의 ‘여호수아서’에 바탕을 두고 만든 오라토리오 <여호수아>.
헨델은 이 작품을 통해 무엇을 전달하고자 했을까? 작품에 숨겨진 또 다른 이야기.

벤저민 웨스트 ‘성궤를 들고 요단강을 건너는 여호수아’

벤저민 웨스트 ‘성궤를 들고 요단강을 건너는 여호수아’

작곡가 헨델 초상화

작곡가 헨델 초상화

1737년 작곡가 게오르그 프리드리히 헨델(1685~1759)이 뇌졸중 증세로 쓰러졌다. 처음에는 심한 류머티즘 정도인 줄 알았지만, 한 달 정도 지나자 오른손을 쓰지 못할 만큼 상태가 악화됐다. 그해 헨델이 의욕적으로 선보였던 신작 오페라 3편이 연이어 흥행 참패를 겪은 것도 작곡가의 심적 부담을 가중시켰다. 재정난에 빠진 오페라극장은 문을 닫고 말았다. 현대 의학적 관점에서는 뇌혈전증이 유력하지만, 윌리엄 프로슈 같은 의학자들은 헨델의 건강 이상을 포도주 과음 탓으로 분석하기도 한다. 당시 런던에는 프랑스산 와인보다 저렴한 포도주가 넘쳐났고, 결과적으로 소문난 식도락가였던 헨델의 음주를 부추겼다는 것이다. 당시 영국 음악계에서는 그의 재기가 힘들 것이라고 수군거렸다. 하지만 헨델은 온천 휴양지인 독일 아헨에서 6주간 머물면서 재활 의지를 다지더니, 결국 오르간 연주에 성공해서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헨델은 1710년 영국으로 건너온 이후 영국의 주요 온천장 가운데 안 가본 곳이 없을 정도로 소문난 ‘온천 마니아’였다. 8년 뒤인 1745년, 그의 뇌졸중 증세가 재발했다. 이번에도 병세는 심각했다. 헨델의 후원자였던 샤프츠버리 백작은 “가여운 헨델이 너무나 아팠다. 차도를 보이기는 했지만, 중풍인 것 같아서 심히 걱정스러웠다”고 썼다. 다행히 상태는 호전됐지만, 작곡가의 심경에는 커다란 변화가 생겼다. 외부 활동을 중단하고 칩거에 들어간 것이다. 이 기간에 그가 완성한 작품은 칸타타 서너 곡이 전부였다. 헨델이 작곡가이자 연주자, 흥행주로 영국 음악계의 주목을 한몸에 받았던 처지라는 걸 감안하면 분명 이례적인 상황이었다.

귀스타브 도레 ‘요단강을 건너는 이스라엘 백성’

귀스타브 도레 ‘요단강을 건너는 이스라엘 백성’

귀스타브 도레 ‘태양을 멈추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여호수아’

귀스타브 도레 ‘태양을 멈추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여호수아’

두문불출하던 그를 음악계로 다시 불러낸 건 영국의 다급한 정치 상황이었다. 1745년 스튜어트 왕조의 복귀를 주장하며 스코틀랜드에서 반란이 일어난 것이었다. 스튜어트 왕조는 1714년 앤 여왕이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난 뒤로 단절됐고, 왕위는 독일 하노버 왕조로 넘어간 뒤였다. 하지만 반란군은 선왕 제임스 2세의 손자인 찰스 에드워드 스튜어트를 왕위에 앉혀야 한다고 주장하며 봉기를 일으켰다. 이 반란은 제임스 2세를 추종한다는 의미에서 제임스의 라틴식 표기를 따서 ‘재커바이트(Jacobite)의 난’으로 불린다. 에든버러가 반란군의 수중에 넘어갈 정도로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헨델은 ‘런던의 지원병들을 위하여(for the Gentlemen Volunteers of the City of London)’ 같은 애국적 노래를 쓰기 시작했다. 1746년 2월에는 ‘특별 행사를 위한 오라토리오(Occasional Oratorio)’를 런던 코벤트가든 극장에서 발표했다. 워낙 급박하게 작곡하다 보니, 자신의 예전 작품에 등장했던 아리아와 합창을 노골적으로 우려먹은 건 어쩔 수 없었다. 이 오라토리오의 2막은 <메시아>의 합창인 ‘할렐루야’로 끝났다. 두 달 뒤인 4월 컬로든 전투에서 대패한 반란군은 예봉이 꺾이고 말았다. 하지만 그 뒤에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등 연이은 내우외환으로 영국은 바람 잘 날이 없었다. 헨델은 1747년 1월 오라토리오 <유다스 마카베우스>를 발표했고, 이듬해인 1748년 3월에는 <여호수아>와 <알렉산더 발루스>를 불과 2주 간격으로 초연했다. 이 오라토리오들은 성서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 외에도 또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이스라엘 민족의 승리를 노래했다는 점이었다. 음악학자 폴 헨리 랑은 “당시 헨델의 오라토리오들은 잉글랜드와 국교도를 위한 ‘명백한 정치적 선전’ 역할을 했다”고 분석했다. 이를테면 작품의 내용은 성경이었지만, 그 속에는 영국 정부군의 승리를 기원하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는 의미였다. 당시 헨델의 작품들은 ‘승리의 오라토리오(Victory Oratorios)’로 불린다. ‘승리의 오라토리오’ 가운데 하나가 <여호수아>였다.

존 마틴, ‘기브온에서 태양의 정지를 명하는 여호수아’

존 마틴, ‘기브온에서 태양의 정지를 명하는 여호수아’

이 오라토리오는 제목 그대로 구약성서의 ‘여호수아서’에 바탕을 두고 있다. 여호수아는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십계명을 받을 당시에 동행했던 측근이었다. 모세가 요단강을 건너기 직전에 숨을 거두자, 여호수아는 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었다. 요단강을 건넌 이스라엘 민족은 여리고의 벽을 허물고 가나안 지역의 이민족을 상대로 한 일련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뒀다.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한 ‘출애굽기’가 인간들이 지닌 믿음의 한계에 대해서 되묻고 있다면, ‘여호수아서’는 그 믿음이 현실 속에서 구현되는 순간을 묘사했다. ‘출애굽기’가 의심과 회의로 가득하다면, 거꾸로 ‘여호수아서’는 확신과 희열이 넘쳤다. ‘여호수아서’는 분명 성전(聖戰)의 기록이다. 내란의 위기에 처한 영국을 바라보던 헨델이 ‘여호수아서’를 오라토리오의 소재로 고른 건 어쩌면 지극히 자연스러웠다. 극적인 기준으로 보면 이 오라토리오에는 여러모로 약점이 많다. 우선 작품을 이끌고 가는 뚜렷한 주인공이 보이지 않는다. <여호수아>의 주인공은 응당 여호수아일 수밖에 없지만, 이 작품에서 그는 이스라엘 민족을 이끄는 지도자라기보다는 주요 등장 인물 가운데 하나 정도로 묘사되고 있다.

제임스 티소, ‘여리고의 함락’

제임스 티소, ‘여리고의 함락’

전투 장면과 신에 대한 찬양을 헐겁게 이어붙이는 나열식 구성에 그치고 말았다는 점도 극적인 재미를 반감시킨다. 하지만 이 작품에는 모든 결점을 가리고도 남을 만한 매력이 있다. 헨델 후기 종교 음악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합창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거듭된 승리를 거두는 장면에서 합창은 종교적 숭고함과 극적인 효과를 최고조로 끌어올리는 역할을 톡톡히 했다. ‘할렐루야’ 다음으로 유명한 헨델의 합창곡인 ‘보아라, 정복의 영웅이 오는 모습을(See the Conquering Hero Comes)’도 <여호수아>에서 처음으로 등장했다. 헨델은 1750년 무렵 <유다스 마카베우스>를 손볼 때에도 이 합창곡을 알뜰살뜰하게 재활용했다. 베토벤이 ‘헨델의 유다스 마카베우스 주제에 의한 12개의 변주곡’에서 주제로 삼았던 선율도 이 합창곡이었다. 헨델의 <여호수아>는 초연 직후에 재공연을 요청하는 공개 편지가 쏟아질 정도로 인기를 누렸다. 초연 다음날 작곡가가 곧바로 250파운드를 영국 은행에 입금했을 정도로 흥행 성적도 괜찮았다. 이처럼 헨델은 오라토리오를 통해서 독일 출신의 ‘용병 음악인’이라는 질시와 논란을 잠재우고 영국의 국민 음악가로 당당히 대접받았다. 그런 의미에서 <여호수아>는 헨델 자신의 승전가이기도 했다.